“잠깐 쉬자.”
키세가 대답도 하기 전에 카가미는 벤치 옆에 두었던 생수통을 집어들었다. 지금까지 쉬지도 않고 계속 뛰어다녔더니 열이 머리 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웃옷을 펄럭이며 물을 마시는 카가미를 가만히 지켜보던 키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수건으로 대충 땀을 닦아낸 키세는 조용히 카가미에게 다가가 그를 와락 껴안았다.
“으앗!”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카가미가 생수통을 떨어뜨렸다. 더워 죽겠는데 몸에 달라붙는 끈적하면서도 뜨거운 열기가 찝찝해서 카가미가 키세를 밀쳐내려 등을 돌리려던 때, 키세가 자신의 체중에 힘을 실어 카가미를 밀어넘겼다. 쾅, 하는 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둘은 코트 위로 나자빠졌다. 머리나 허리를 세게 부딪혔는지 카가미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키세에게 화를 내려 입을 열었다.
“어이, 키세, 너…!”
“쉬이.”
하지만 하려던 말은 자신의 위에 올라탄 키세가 고개를 숙여 카가미의 달아오른 이마에 작게 입을 맞추는 행위 때문에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행동에 카가미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그런 카가미를 내려다보며 키세가 애처로이 웃었다.
“…싫어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카가미의 정신이 겨우겨우 돌아오고, 키세를 밀쳐내려던 때 키세가 카가미의 손을 쥐고 물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슬픈 음성에 카가미는 잔뜩 화를 내려던 것을 멈추고 말았다. 어, 이게 아닌 거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긴 했지만 눈 앞의 키세가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카가밋치… 좋아해요.”
“어…?”
크게 떠진 두 눈동자에 당혹감이 물든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얼굴마저 곱고 예쁘다. 잔뜩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카가미를 찬찬히 훑어보며 키세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애처롭고, 가장 처량하며, 가장 예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안타깝지만 그러면서도 충분히 예쁘도록. 원체 잘난 외모를 지닌 키세에게 이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안그래도 키세가 위에 올라탄 데다, 키세의 뒤로 태양까지 강하게 빛나고 있었기에 카가미는 키세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수심에 찬 얼굴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기에 카가미는 지금 이 상황이 매우 곤란하게 느껴졌다. 근데 이 때에도 키세의 얼굴은 왜 저렇게도 빛이 나는건지. 결국 카가미가 더듬거리며 꺼낸 말은 카가미 본인에게는 쌩뚱맞지만, 키세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말이었다.
“너, 넌… 생긴게 왜 그렇게 반짝거리냐.”
카가미의 말에 키세는 눈이 휘어지도록 웃었다. 말도 제대로 못 잇고 얼굴을 붉히는 카가미를 보며 키세는 속으로 깔깔 그를 비웃었다. 외모 뿐 아니라 그냥 그 자체에서 빛이 나는게 누군데요. 괜히 쿠로콧치가 빛으로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니까. 오히려 키세에게는 카가미가 너무 눈이 부셔서 함부로 하기 미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키세는 굳이 그걸 입 밖으로 올리지 않았다. 아마 카가미는 말해주지 않는다면 평생 동안 모를 것이다. 그 편이 더 좋다고, 키세는 생각했다.
“카가밋치는 제가 싫어요?”
기어코 터진 질문에 카가미는 입을 열지 못하고 눈알만 데록데록 굴렸다. 차마 키세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당황하는 카가미를 보며 키세는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이게 연기라는 것을, 카가미는 죽어도 모르리라. 자신의 위에 올라타서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는 키세를 밀쳐낼 생각도 못하고 카가미는 입술만 옴싹거렸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키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가만히 카가미의 눈만 쳐다보며 얌전히 기다렸다. 그 침묵이 더 견디기 힘들어서 카가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아니.”
당연히 싫어하지 않는다. 싫어하면 이렇게 같이 농구를 할 일도 없고, 심심하다고 달려드는 상대와 놀아주지도 않는다. 애초에 카가미는 싫어하는 사람 자체가 드문 편이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고, 그리고 자신 역시 상대에게 호의를 보였다면 그 이후로 그를 미워하고 싫어하게 되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카가미 타이가는 그런 사람이니까.
카가미가 정이 많고, 실은 마음도 여린 편이라는걸 키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처세술에 능하고 영악한 편이라는 것도. 그런 키세 료타를 카가미 타이가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늘 힘이 넘치고 밝다는 점에서 그가 자신보다 빛나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역시 우위를 점하는건 자신이라고 키세는 자부했다. 지금처럼 이렇게, 덩치 커다란 남자가 갑자기 들이대는 상황에서도 제대로 밀쳐내지 못하는 점만 봐도 그렇다.
“싫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지. 싫어하는 사람과 1 on 1 할 리 없잖아.”
“저는 카가밋치가 좋아요.”
“저기, 키세….”
싫냐는 질문에 싫지 않다고 답하는 것과 좋냐는 질문에 좋다고 답하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 정도는 카가미도 알고 있다. 키세가 주인에게서 버려질까봐 낑낑거리는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고 카가미를 바라보자 카가미는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묻는다면, 그래, 분명 좋아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키세가 했던 것처럼 갑자기 껴안은 다음에 이마에 뽀뽀를 날리고 싶은 감정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기엔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키세가 마음에 걸렸다. 단호하게 사람의 호의를 거절하는건 카가미가 할 수 없는 행동 중 하나다.
“나는…….”
*
“그 녀석한테 무슨 말 했냐?”
“무슨 말이 정확히 뭘 말하는 검까?”
다 알면서 능글맞게 생글거리는 키세를 보는 아오미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아오미네의 눈썹이 찡그려지는걸 보며 키세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쓸데없는 짓 한거면 죽여버린다.”
“글쎄요. 그게 쓸데없는 짓인지 아닌지 아오미넷치가 어떻게 압니까? 애초에 저는 아오미넷치의 조력자가 아니라구요.”
지나가는 여자가 얼굴을 붉힐 정도로 매혹적인 웃음을 그린 채 커피를 마시는 키세를 보고 아오미네는 뿌득 이를 갈았다. 겉으로는 생글생글 잘 웃어도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잘 모르는 녀석이다. 그래도 동경한다며, 아오미네에겐 진심으로 부딪치는 경우가 많기는 했지만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적당히 사람 좋게 대하면서 은근 거리를 둔다. 아오미네가 둔한 편이긴 했지만, 내내 옆에 붙어 있는 키세를 보면 그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아오미네는 눈 앞의 키세가 불편하고 화가 났다. 저 꾸며낸 웃음을 확 걷어내버리고 싶었다.
키세는 아오미네가 주먹을 꽉 쥐는 것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아오미네도 카가미 못지 않은 바보에, 멍청이다. 허세끼가 심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냉정한 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아오미네가 카기미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라면, 좀 더 날카로운 맹수라는 점일까. 맹수는 자신의 영역에 굉장히 민감하다. 키세가 그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아오미네는 직감적으로 눈치채고 있으리라. 자신이 동경하던 상대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매력적인 쾌감이었다. 그게 카가미 때문이라면 더더욱.
“카가밋치는 너무 상냥한게 탈이란 말이죠.”
“너, 진짜…….”
“선수필승입니다, 아오미넷치. 먼저 채간 사람이 임자예요.”
키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오미네가 분노에 차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그 바람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쪽을 쳐다봤지만 키세는 그 정도 시선 쯤이야 여유롭게 넘겼고, 아오미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만 살의에 찬 눈으로 키세를 노려봤을 뿐이다.
“멋대로 끼어들지마.”
“끼어들다니, 그런 표현 쓰기 애매하지 않나요? 아오미넷치와 카가밋치 사이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였어요. 저와 다를 거 없었잖아요.”
“키세…!”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든, 둘 사이는 그저 1 on 1 하는 정도였잖아요? 그 상황에서 제가 카가밋치에서 고백을 한들 아오미넷치와는 하등 관계없는 일 아닌가요?”
굳이 관계없는 일이라며 악센트까지 줘서 말하는 키세를 보던 아오미네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위 시선이고 뭐고 신경도 안쓰고 주먹을 날릴게 뻔해서 키세 또한 재빠르게 일어나 두어걸음 물러섰다. 부들부들 떨리던 아오미네의 주먹이 코 앞을 스쳐지나간걸 보면 모델 얼굴에 상처낸다는 것은 아예 생각도 못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키세가 휴우,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오미네에게 손을 흔들었다.
“저 이래뵈도 모델이라 다치면 큰일 나거든요. 아오미넷치 무서우니까 먼저 가보겠슴다.”
“거기서, 키세!”
“설 리가 없잖아요!”
경쾌하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카페 문으로 향하는 키세의 등을 멍하니 지켜보던 아오미네는 곧 키세가 등을 돌려 입 모양으로 중얼거리는 걸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입꼬리를 올려 고혹적으로 웃으면서 그는, 명백히 아오미네를 조롱하고 있었다.
“제가 이겼네요, 아오미넷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