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스피아)
*
“베른하드, 요새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어째 고민하는게 있는 눈치야.”
프리드리히의 말에 베른하드는 아니라고 딱 잡아떼고 등을 돌렸다. 더 물어볼 틈도 안주고 멀어지는 베른하드를 보면서 프리드리히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베른하드가 고민하는 것이 있다는 것 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털어놓을 생각이 없어보여서 프리드리히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제 형은 예전부터 늘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도 베른하드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 같으면 조언이라도 해주자고 마음 먹으며 프리드리히 역시 부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프리드리히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 베른하드는 속으로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베른하드가 현재 머리를 감싸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다른 사람에게 밝힐 마음은 전혀 없었다. 프리드리히에게 무언갈 속인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지만, 그보다도 걱정을 끼쳤다는 것이 마음에 무겁게 걸렸다. 허나 절대로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고민인지라 베른하드는 다시 한 번 입을 꾹 다물었다. 본래 남들에게 많은 얘기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것만큼은 상대가 누구라도 절대 털어놓을 수 없었다. 베른하드는 자신이 이런 감정으로 고민하는 것이 죄악스러울 정도였다.
“여어, 베른하드.”
“…아치볼드.”
베른하드는 자신의 등을 가볍게 두드린 아치볼드를 보고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원래 표정이 다양한 편이 아니라 큰 차이는 나지 않았지만 베른하드는 다시 표정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치볼드는 별다른 의심 없이 베른하드 옆으로 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는가?”
“무슨 일이지?”
“별 건 아니고 그냥 한 잔이나 할까 해서 말이네.”
술을 마시는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친우와 함께 술자리에 어울리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상대가 아치볼드라면 다르다. 지금 베른하드는 제 정신으로 아치볼드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설령 아무렇지도 않게 어울린다고 하더라도 접어야 할 마음을 생각하면 되도록 떨어져 있는 편이 나았다. 더군다나 단 둘이서 술잔을 기울인다면 떨쳐내고픈 감정이 더 깊어질지도 몰랐다. 베른하드는 아치볼드를 향해 거절의 의사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그건 아닐세. 다만 술을 마실 기분은 아니라서 말야.”
“그건 한 잔하자의 다른 표현 아닌가? 기다리고 있겠네.”
베른하드의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웃은 아치볼드가 베른하드를 툭툭 치고는 자신의 부대 쪽으로 향했다.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아치볼드를 보면서 베른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된다는걸 알면서도 냉정히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다른 사람이 보면 정말 그 베른하드가 맞냐고 물어볼 일이었다.
아치볼드와 친해진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베른하드나 아치볼드나 둘 다 부대를 이끄는 입장이었고, 통하는 부분도 많았으며, 나이대도 비슷했다. 그런 아치볼드에게 순수한 호의를 느끼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거기에서 끝나야 했다. 베른하드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자신이 그 이상으로 나아갔기 때문이었다. 그 감정을 처음 깨달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 애써 부정해왔지만 누가 봐도 그것은 사랑이었다. 이성 사이에서나 느끼는 감정을 남자인, 그것도 자신의 친우인 아치볼드에게서 느낀다는 것은 베른하드에게 충격 그 이상의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아치볼드와 친하다고는 하지만, 아니 상대가 아치볼드이기 때문에 더더욱 털어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베른하드는 평생 아무도 모르게 꼭꼭 숨기고 혼자서 정리해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하면서 부대로 걸음을 돌렸다.
부원들을 이끌고 훈련을 하면서도 베른하드는 종종 다른 생각에 빠지곤 했다. 그 생각의 끝이 아치볼드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엄격하고 철저한 성격의 베른하드는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기 자신이 어이가 없고, 한심하다고 여기면서도 또 그러고 마는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고뇌에 빠졌으니 늘 옆에서 지켜보는 프리드리히가 요새 베른하드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점차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베른하드는 아무래도 오늘 아치볼드를 만나면 안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부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행여 아치볼드와 마주치면 억지로 끌려갈까봐 일부러 뒷정리까지 모두 맡으며 시간을 죽였다.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보이지 않게 될 때 쯤에야 베른하드는 천천히 돌아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런 베른하드의 노력은 뒤에서 나타난 익숙한 인영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여기서 뭐하는가, 베른하드?”
멍하니 서 있던 베른하드의 어깨를 툭 치며 아치볼드가 물었다. 웬만하면 핑계를 대서라도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한가하게 꾸물거리고 있는걸 들켰으니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바쁘다고 해봤자 믿지도 않을테고, 아무리 말해봤자 한잔만 마시자며 반강제로 끌고 갈 것이 뻔했다. 그리고 베른하드는 그런 아치볼드를 제대로 거절할 자신도 없었다. 결국 베른하드는 멍하니 서 있던 자기 자신을 탓하면서 아치볼드의 뒤를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술집에 들어선 아치볼드는 익숙하게 구석 테이블에 엉덩이를 붙였다. 늘 마시던 것을 주문하고 아치볼드는 의자에 기대 어깨를 풀었다. 요새 일이 많아서 조금 지치긴 했지만 이제 곧 휴가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버틸만 했다. 사실 말이 휴가지 오롯히 쉬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봤자 이틀이었고, 그 사이에 조사하라고 부탁받은 임무도 있었다. 하지만 평소의 고단하고 숨 돌릴 틈도 없는 임무보다는 훨씬 가벼운 편이었다. 늘 앞장서곤 했던 아치볼드에게 있어서 그 정도 임무는 휴가나 다름없었다.
술이 나오자 아치볼드는 제 잔보다도 베른하드의 앞에 놓인 잔을 채우기 바빴다.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베른하드였지만 아치볼드는 그와 함께 마시는 술이 꽤 달았다.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대라 그런걸지도 몰랐다.
“요즘 어떤가?”
“평소와 똑같네.”
가볍게 술을 털어넣으며 꺼낸 화두는 다소 딱딱한 답으로 돌아왔다. 아치볼드는 익숙하다는 듯 픽 웃고는 다리를 꼬았다.
“평소와 같다는건 좋은 현상이지. 평소와 다르다는건 큰 일이 터졌다는 뜻이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베른하드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놓인 술잔을 쥐었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는 해도 여기까지 와서 한 잔도 마시지 않을 순 없었다. 그리고 베른하드는 딱히 술을 싫어한다기보단 술주정을 싫어하는 편이었고, 술 보다는 커피 쪽이 입에 맞을 뿐이었다.
“이틀간 떠난다는 얘기를 들었네.”
“맞네. 가벼운 일이고 하니, 사실상 휴가나 다름없지. 부대를 이끌고 가는 일도 아니니까.”
“쉬는 동안 어딜 갈 생각인가?”
“가야할 곳이 있네. 그동안은 바쁘다는 핑계로 가질 못했지만.”
궁금하지 않은건 아니었지만 더 캐물을 생각은 없었기에 베른하드는 입을 다물었다. 아치볼드도 딱히 얘기를 꺼내고 싶은 눈치는 아니었다. 원래 둘 사이에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기에 조용한 침묵은 어색하지 않고 익숙하게 다가왔다. 아치볼드는 술 기운때문인지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조금 더 자세를 편하게 고쳤다.
술은 평소보다도 맛있는 편이었고, 술 집의 분위기도 편안했기 때문에 아치볼드는 금새 노곤해졌다. 알딸딸하게 술 기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아치볼드는 실실 웃음을 흘렸다. 다른 때 같았으면 적당히 마시고 멈출테지만 휴가를 앞두고 각 잡고 있어야 할 상황은 아니었기에 아치볼드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과음을 했다. 도중에 베른하드가 너무 많이 마시는 것 아니냐고 넌지시 물어보긴 했지만 아치볼드는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몇십 분이 지나고 나서야 마시는 것을 멈춘 아치볼드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치볼드가 그렇게 마실 동안 베른하드가 말리지 못한 것은 그 또한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치볼드가 기분이 좋아서 잔뜩 마시고 취했다면, 베른하드는 생각할 일이 많아서 술잔을 기울였다. 머릿 속이 복잡해서 아치볼드와 이야기를 길게 하고픈 기분도 아니었다. 얘기를 하면 할수록 그나마 남아있던 이성이 조금씩 날아가는 것 같았다. 때문에 베른하드는 아치볼드 쪽을 최대한 보지도 않은 채 술을 마셨다. 베른하드는 살짝 어지럽다고 느낄 즈음에야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고, 눈 앞의 아치볼드가 상당히 취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치볼드. 자네 너무 취했네.”
“으음….”
대답을 않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아치볼드 쪽으로 가니 아치볼드는 졸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어깨를 흔들어도 깰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아치볼드를 내려다보며 베른하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가 없다. 이대로 버리고 가기엔 날이 차니 억지로 옮기는 수 밖에 없었다. 건장한 체구의 사내를 옮긴다는건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부르기도 민망한 것이 사실이었다. 결국 베른하드는 곱게 두 눈을 감고 있는 아치볼드를 빤히 내려보다 그의 팔을 어깨에 둘러야만 했다.
베른하드 역시 조금이지만 취해있던 상태라 그를 옮기는건 매우 힘겨운 일이었다. 자꾸 미끄러지는 아치볼드를 똑바로 고쳐잡으며 베른하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다리가 휘청하고 쓰러질 것만 같아 베른하드는 몇 번이고 발을 멈추어야 했다. 술 기운에 달아올라 후끈거리는 뺨을 타고 땀이 흘러 내렸다. 하지만 베른하드는 묵묵히 아치볼드를 끌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베른하드는 소파 위로 아치볼드를 거칠게 집어던졌다. 소파 위에 대충 엎어진 아치볼드가 끄응하는 소리를 냈지만 베른하드는 신경쓰지 않고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대충 닦아내면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아치볼드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이대로 갈까 싶었지만 널부러진 자세가 퍽 불편해보여서 결국 베른하드는 그의 떨어진 다리며 팔을 제대로 정리해주기 시작했다. 가지런히 손까지 배 위에 포개고 나서야 베른하드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베른하드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아치볼드가 술김에 스치듯이 했던 한마디였다.
고작 이틀이지만 자네가 꽤 보고싶을 것 같군. 평소처럼 허허 웃으며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아치볼드는 별 생각 없이 했던 말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그 말이 베른하드의 가슴 깊이 박힌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치볼드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술을 마셨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갔지만 실은 놀라서 잠시 굳어있을 정도였다. 자신의 안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을 애써 무시하려고 애를 써봐도 이렇게 툭 던져지는 말 하나에도 온 몸이 반응해버린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이성적인 생각으로 해결될 감정은 아니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아치볼드를 말없이 내려다보며 베른하드는 알 수 없는 우울함에 빠졌다.
이제 마지막이 될 얼굴이다. 물론 아치볼드가 영영 떠나는 것은 아니고, 베른하드가 그 사이에 죽을 리도 없었지만 이런 감정으로 그를 보는 것은 마지막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설령 마음을 완전히 놓는 것이 불가능 하더라도 더 이상은 이 감정때문에 고민할 수 없었다. 자신에겐 그럴 여유도, 자격도 없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씁쓸함을 막을 수 없었다. 더군다 베른하드도 지금 살짝 취해 있는 상태였다. 베른하드는 아치볼드의 눈이며 코나 입술 따위를 꼼꼼히 훑어보다 저도 모르게 헝클어진 머리칼에 손을 갖다대었다. 손질이 안 된 거친 머리칼이 예상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작게 웃다가 이내 손을 내려 뺨을 쓸었다. 오래 전장에 있었던만큼 매끄러운 피부는 아니었지만 그런 것 치고는 꽤 부드러웠다. 그리고 손이 아치볼드의 까슬한 수염 쪽을 건드렸을 때, 베른하드는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급히 손을 등 뒤로 숨겼지만 그렇다고 없던 일이 되는건 아니었다. 작게 뒷걸음질 치는 베른하드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이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고민했던 주제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같잖은 마음이라도 생긴걸까. 아무리 술에 취해 있다곤 해도 자신이 했던 행동이 믿겨지질 않아 베른하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더 이상 이런 자신을 두고볼 수 없다. 단순히 마음먹는 것에서 끝내지 않고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이 마음을 떨쳐낼 수 있도록. 입을 꾹 다문 베른하드는 서둘러 방을 떠났다. 하지만 방을 나가려는 순간 발이 멈칫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겨우 옮기면서, 베른하드는 드러누운 아치볼드의 얼굴을 스치듯이 눈에 담고 자리를 떴다.
밤이 늦었던 터라 누군가 깨어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베른하드를 맞이한 것은 아직까지 깨어있던 프리드리히였다. 딱히 일이 있어서 눈을 붙일 수 없었던게 아니라 베른하드를 기다리고 있던게 틀림없었다. 그 증거로 베른하드가 돌아오자마자 프리드리히가 꽤 매서운 눈을 하고 베른하드를 추궁했다.
“왜 이렇게 늦어?”
“…아치볼드와 한 잔 했다.”
“한 잔이 아닌 것 같은데.”
진하게 풍겨오는 술 냄새 외에도 베른하드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많이 흐뜨러져있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걸까 싶어서 베른하드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던 프리드리히가 눈썹을 찡그렸다. 단순히 술에 취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베른하드의 얼굴이 너무 창백했다. 작게 떨리는 속눈썹이며 꼭 말아쥔 주먹 등이 평소엔 볼 수 없던 베른하드의 모습이었다.
“잠깐, 베른하드. 얼굴이 왜 그래?”
“무슨 말인가?”
“속이려하지마. 표정이 이상한데?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작게 대답하는 베른하드를 보고 프리드리히가 답지 않게 언성을 높였다.
“베른하드, 날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지 말고 털어놔 봐.”
“……프리드리히. 신경쓰지 않아도 돼. 정말로.”
조금 더 추궁할 기세였던 프리드리히는 뒷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아랫 입술을 꾹 깨물다가 겨우 단어 하나하나를 내뱉듯이 읊조리는 베른하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기에. 베른하드의 얼굴이 안그런 척 해도 정말 괴롭다는 듯이 일그러져 있었고, 당장 쓰러진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창백했기에 프리드리히는 더 이상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보다는 대체 무슨 일이길래 하는 걱정만 켜켜히 쌓여갔다. 작은 일이라면 천하의 베른하드가 이 정도로 혼란에 휩싸여 있을 리는 없었다. 프리드리히는 걱정이 가득 담긴 눈을 하고 베른하드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빨리 쉬어.”
제 상태를 눈치채고 더 묻지 않는 프리드리히가 고맙긴 했지만 베른하드도 딱히 남을 신경 쓸 상태는 아니었다. 대충 정리하고 수면을 취하기 위해 침대에 누운 베른하드는 어지러운 머릿속과 달리 쉽게 감기지 않는 눈 때문에 뒤척여야 했다. 이대로 있으면 안된다. 자기 자신도 고삐를 제대로 잡을 수가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사고를 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치볼드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런 일로 사이가 틀어지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베른하드는 이깟 감정으로 고민하고 망설이는 자기 자신을 가장 용서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렇게 여유롭고 평화로운 상황이 아닌 것이다.
신경쓰지 않아도 돼. 정말로. 프리드리히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에게 당부하면서, 베른하드는 겨우 눈을 감았다.
*
굳게 마음을 먹은 베른하드가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던 것은 아치볼드가 떠나기 하루 전이었다. 늘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 곳이긴 했으나 그 중에서도 부대로 이동하지 않는 개인에게 주어지는 일이란 꽤 드문 것이었다. 그것도 혼자서는 결코 해내기 어려운 희생에 가까운 임무는 더더욱. 단신으로 괴물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곳에 침투해서 상황을 파악하고 보고를 올리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 없었다. 더군다나 그 괴물은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진 적도 없는 미지의 생물이었다. 큰 희생 없이 지나가기 위해선 꼭 필요한 일이었으나, 임무를 맡은 대원의 생사는 장담할 수 없었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처지긴 했으나 나서서 개죽음 당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다들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참이었다.
“내가 가지.”
갑작스러운 베른하드의 말에 그 곳에 있던 대원은 물론이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프리드리히까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리스크가 큰 이런 일에 베른하드가 자진해서 나설 줄은 예상도 못했던 까닭이다. 저 멀리서 프리드리히가 뜨악한 얼굴을 하는 것을 봤음에도 베른하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가겠다고 읊조린 베른하드의 눈동자가 고요하고도 깊었다.
베른하드가 가겠다고 말을 꺼낸 이후엔 당연하게도 자진해서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런 위험하고 보상도 없는 일에 뛰어들 바보는 어디에도 없다. 묘하게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는 베른하드를 제외하고는. 살짝 웅성거리는 대원들의 반응을 지켜보던 베른하드는 반론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등을 돌렸다.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프리드리히가 빠른 걸음으로 베른하드의 뒤를 쫒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베른하드, 무슨 짓이야!”
베른하드 역시 프리드리히가 달려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프리드리히는 생각처럼, 어쩌면 생각보다도 더욱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늘 프리드리히에게 조언이나 충고를 하던 평소와 달리 프리드리히의 잔소리를 듣게 되다니, 베른하드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프리드리히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잠자코 들어주기로 했다. 달려온 탓인지, 화가 난 탓인지 프리드리히는 급박한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는거 알잖아!”
“하지만 누군가는 가야 하는 일이지.”
“그게 베른하드일 필요는 없어. 이건 버리는 임무라고.”
“그렇다면 대원들 중 누군가를 버리겠다는 뜻인가?”
베른하드의 딱딱한 대답에 프리드리히가 작게 혀를 찼다. 서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그게 아님을 잘 알면서도, 묘하게 대화가 어긋나고 있었다.
“그런 말 아니란거 알잖아!”
“……적어도 이번 일은 말리지 말게.”
잠시 말을 고르던 베른하드가 겨우 내뱉듯이 말하는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떨리고 있어서 프리드리히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감정의 변화 폭이 넓은 형은 아니다. 표출하기 보다는 담아두고 있는 편이 많은 형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함께해온 프리드리히는 베른하드의 작은 말투, 표정, 손짓으로도 그의 상태를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 눈 앞의 베른하드는 평소와 다른게 확실했다.
“평소에 계속 이상했던거, 그거 때문이야?”
“…….”
대답이 없는건 긍정의 표시다. 프리드리히는 말 없이 베른하드를 바라봤다. 작게 한숨이 나오긴 했지만, 이를 말릴 수 없다는 것쯤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갔다오면 해결은 되는거야?”
“…확답은 불가능하다.”
“베른하드, 그렇게 말하면 내가 더 보내주기 힘들잖아.”
이번 임무가 위험하다는 것, 그에 비해 얻을 수 있는 대가는 적다는 것은 베른하드 역시 뼈저리게 알 터이다. 그럼에도 먼저 말을 꺼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제 스스로에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암시를 걸면서 손을 툭툭 털어냈다.
“솔직히 말하면 싫어. 굳이 베른하드가 가지 않아도 되는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더 말해봤자 들을 것 같지도 않고… 나도 베른하드 잔소리 무시한 적 많잖아?”
평소처럼 호쾌하게 웃어보인 프리드리히가 조금 아프게 베른하드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뒤돌아본 베른하드의 눈에 보인 것은 진지할 때만 보이는 프리드리히의 굳은 얼굴이었다.
“무리하지마.”
프리드리히의 말을 가슴에 담아두면서 베른하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굳이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출발할 것은 없었지만 베른하드는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떠나고 싶었기에 남들의 눈을 피해 새벽에 준비를 마쳤다. 프리드리히는 어딜 갔는지 밤부터 보이질 않았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도 아니고, 다시 얼굴을 봐봤자 달라질 것도 없으니 베른하드는 프리드리히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기로 했다.
날이 아직 풀리지 않았던터라 밤공기가 찼다. 딱히 챙길 것도 없었으니 몸도 가벼웠다. 빠르게 자리를 뜨려는데, 베른하드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뭘 그렇게 빨리 가는가?”
베른하드에겐 안타깝게도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였다.
“……여긴 어쩐 일인가, 아치볼드.”
“어째 반갑지 않다는 목소리군.”
벽에 기대어 서있던 아치볼드가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베른하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치볼드도 가벼운 복장이었지만 제대로 챙겨 입은 것이 도저히 휴가를 떠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설마 하면서도 베른하드가 미간을 좁히며 아치볼드에게 물었다.
“휴가를 간다는 사람이 아직 뭘 하는겐가.”
“그보다도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그쪽 일을 우선하기로 했지.”
“…그렇다면 어서 일을 하러 가도록 하게나.”
“그래서 지금 여기 있지 않는가?”
여유로운 미소까지 띈 아치볼드는 은근슬쩍 베른하드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베른하드가 순간 움찔했지만 그 손을 쳐내진 않았다. 대신 아치볼드의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질문을 던졌다.
“서프라이즈일세. 자네도 적적하게 혼자 가는 것 보다는 같이 가는 편이 든든하고 좋지 않은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굳이 두 사람이나 갈 필요는 없어.”
“섭섭한 말을 하는군. 그리고 이번 임무가 만만찮은 것 쯤은 자네도 알고 있을거야.”
베른하드가 무뚝뚝하게 대답함에도 신경쓰지 않고 아치볼드는 작게 웃으며 받아쳤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이렇게 나온 이상 아치볼드를 다시 돌려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원래 레지먼트란 집단은 고집이 강하기로 유명하다. 돌아가라고 해서 순순히 돌아갈 그가 아니었다. 베른하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자네 휴가는 어쩌고.”
“친우가 급박한 와중에 내가 쉬는 일이 중요한가? 휴식이야 언제든지 취할 수 있어.”
“나는 자네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도 없을텐데 대체 어떻게….”
“글쎄. 걱정되는 형을 위해 SOS 신호를 보낸 착한 동생 덕이 아닐까 싶네만.”
프리드리히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니 이것 때문이었나. 베른하드는 프리드리히의 쓸데없는 짓에 혀를 작게 찼다. 일이 괜히 더 꼬여버리고 말았다. 아치볼드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 굳이 임무를 맡은 것이었는데, 그 아치볼드와 함께 가게 됐으니 제대로 정리가 될 리 없었다. 어쨌거나 베른하드는 한시라도 빨리, 조금이라도 더 멀리 그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었던 것이니.
베른하드가 나름대로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 프리드리히는 몰래 아치볼드를 찾아 갔었다. 한밤중이긴 했지만 아치볼드 역시 자지 않고 깨어 있었기에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아치볼드가 베른하드와 친한 사이긴 했지만 프리드리히가 굳이 그를 택한 것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둘 사이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공기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건 아니었다. 베른하드가 요즘 이상한 것도, 무언가 고민이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 원인이 아치볼드라는 것도 프리드리히는 전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문제인가는 뒤로 하고라도 말이다. 프리드리히는 베른하드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았고, 결국 베른하드가 자신에게 안 좋은 결과를 내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늘 자기 혼자서 짊어지고, 모든걸 속에 담아두기만 했으니까. 프리드리히는 더 이상 그런 베른하드를 보고 싶지 않았다. 베른하드를 위해서도, 프리드리히 자신을 위해서도 베른하드 옆엔 아치볼드가 꼭 필요했다.
“그렇게 이상하게 보지말게. 사실 이상한건 자네야.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자네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임무를 맡은건 도저히 자네같지가 않아.”
“…이 일의 적임자는 날세.”
“아니, 아니야. 자네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일에 굳이 나선거지. 그 이유가 궁금해지는군.”
나는 가야만 해. 베른하드가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읊조리는 것을 아치볼드는 놓치지 않고 들었지만 더 이상 말을 꺼내진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둘 모두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 뻔했다. 결국 둘이 함께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임무의 확실성을 고려하면 둘이 가는 편이 안전하긴 했다.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아서인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베른하드의 옆 모습을 흘끗 보던 아치볼드가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예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베른하드는 늘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다. 가끔은 자신을 풀어주기도 해야 하는데, 꽉꽉 눌러두고만 있으니 스트레스가 제대로 발산될 틈이 없다. 반듯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금방이라도 바삭거리며 부셔질 것 같은 베른하드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아치볼드는 발을 옮겼다.
*
당연히 가는 일이 순탄할 리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예상보다도 더 거칠고 힘겨웠다. 아무도 안쓰던 숲 속을 헤치고 가야 한다는 점도 문제였지만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도 문제였다. 작은 괴물 한 두 마리 정도는 가볍게 해치울 수 있었지만 숲 속 깊숙히 들어갈수록 괴물의 덩치도, 숫자도 커져만 갔다.
나무로 둘러쌓인 사방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긴장한 상태로 걸음을 옮기던 베른하드는 이내 왼쪽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발을 멈추었다. 따라오던 아치볼드도 경계 태세를 취하며 몸을 낮추었다. 곧 베른하드의 예상대로 왼쪽에서 커다란 덩치의 늑대가 튀어나왔다.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괴물이 베른하드를 향해 달려들었고, 베른하드는 재빠르게 검을 뽑으며 옆으로 피했다. 그리곤 괴물의 옆구리를 빠르게 찔렀다.
“아치볼드, 조심하게!”
그렇게 외친 것이 무색하게도 베른하드가 뒤를 돌았을 땐 이미 두 마리의 괴물이 아치볼드를 향해 덤벼들고 있었다. 능숙하게 총을 뽑아낸 아치볼드가 먼저 달려든 괴물의 머리통을 정확히 노렸고, 몸을 살짝 비틀어 피한 뒤 옆에서 덤비는 괴물의 목을 꿰뚫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지만 여유롭게 대처한 아치볼드가 총을 다시금 고쳐잡으며 베른하드를 향해 찡긋 눈짓을 보냈다.
“내 걱정은 말고 자네나 조심하게, 베른하드.”
베른하드는 딱히 대답하지 않고 검을 다시 정돈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등을 돌리는 베른하드를 보며 아치볼드가 묘한 미소를 그렸다. 어째 혼자 둘 수 없는 타입이다. 오히려 프리드리히보다도 단단하지 못한게 베른하드라고 생각하면서 아치볼드가 서둘러 뒤를 쫒았다.
“이 쪽 길은 맞는가?”
“아마 그럴걸세. 허나 확답은 할 수 없지.”
“괴물이 나오는 횟수가 늘어난걸 보면 맞는 것 같군.”
몇 걸음 더 걷지도 않았는데 저 멀리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게 분명했다. 이 상태가 지속 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체력이 바닥날 것이 뻔했다. 되도록 재빠르게 헤치우고 몸을 숨길 곳을 찾는 편이 나았다. 말은 안했지만 속으로 같은 생각을 했는지 달려드는 괴물을 거침없이 베는 베른하드와, 심장을 정확히 겨눈 아치볼드의 움직임이 신속했다.
바닥에 쓰러진 괴물이 죽은 것을 확인한 베른하드가 눈짓으로 왼쪽을 가리켰다. 방향을 조금 틀어서 가자는 의미였다. 아치볼드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베른하드의 뒤에서 검은 물체가 공격 태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치볼드는 더 생각할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총을 쐈고, 괴물은 베른하드를 향해 달려들기도 전에 바스라지고 말았다.
“서두르도록 하지.”
아까와 달리 짐짓 진지해진 아치볼드를 향해 베른하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마음으로 출발을 했든 지금은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
왼쪽으로 길을 튼 것이 행운이었는지 아까와 달리 튀어나오는 괴물의 수가 현저히 줄었다. 간간히 습격 당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우스울 정도였다. 불행 중 다행이긴 했지만 이도 아직 날이 밝아서 그런걸지도 몰랐다. 쉽게 어두워지는 숲의 특성상 밤이 깊어지기 전에 대충이라도 머물 곳을 찾아야 했기에 베른하드와 아치볼드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아치볼드, 이 쪽으로.”
꽤 적당한 장소를 찾았는지 베른하드가 아치볼드를 불렀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에서 적당하게 몸을 뉘일 수 있는 공간이 보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뒤가 트인 것도, 주변에 나무나 바위 따위의 장애물이 많다는 점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상 지금은 어디라도 자리를 잡아야만 했다.
가져온 짐을 커다란 나무 아래에 내려놓은 아치볼드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여 괴물이 이 근처에 있다면 상당히 위험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위를 주시하던 아치볼드는 이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고개를 돌렸다. 긴장을 하면서 온 터라 어깨가 다 뻐근했다. 베른하드를 향해 시시껄렁한 농담이라고 날리려고 할 찰나, 저 멀리서 휘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치볼드가 귀를 세우고 베른하드 쪽을 쳐다보자 베른하드 역시 들었는지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주 멀리서 들리는 소리였지만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울음소리, 걸음소리,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잠시 뒤에야 둘은 그것이 날개 소리 였음을 알아차렸다.
조심하라고 외치기도 전에 거대한 몸집의 괴물이 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딱 봐도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괴물은 눈을 번뜩이며 둘을 노려보고 있었다. 베른하드는 들고 있던 짐을 대충 바닥에 버리고 검을 쥐었다. 아치볼드 역시 총을 꺼내들었다.
“버거운 놈이군.”
아치볼드의 말은 결코 엄살이 아니었다. 눈 앞의 거대한 상대는 한 눈에 보기에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괴물이라 그 실체를 잘 모른다는 것도 큰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커다란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괴물이 굉장히 포악해보이고, 단단한 피부는 상처를 입히기 힘들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했다. 금방이라도 덤빌 듯이 발을 구르는 괴물을 찬찬히 주시하던 베른하드가 재빠르게 몸을 낮춰 먼저 두터운 다리를 찔렀다.
괴물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긴 했지만 울퉁불퉁한 피부 덕에 상처가 크게 나지는 않았다. 괴물은 자신을 공격한 베른하드를 노려보며 얼굴을 휘둘렀다. 빠른 속도로 피하긴 했지만 워낙 갑작스러운 행동이었기에 왼쪽 팔에 길다란 상처가 생기고 말았다.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피를 보고 아치볼드가 괴물의 얼굴에 총구를 겨눴다. 그러나 긁힌 정도의 상처밖에 나지 않은 괴물은 쓰러지는 대신 타겟을 아치볼드로 돌렸을 뿐이었다.
“아치볼드!”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꼬리가 빠르게 달려들었고, 아치볼드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날아가고 말았다. 저 멀리 날아가 나무에 부딪힌 아치볼드를 보며 베른하드가 크게 소리쳤다. 다행히 아치볼드는 배쪽을 움켜쥐고는 있었지만 다시 총을 제대로 고쳐잡으며 일어나고 있었다. 크게 다치진 않았다는 것에 안심하며 베른하드 역시 검을 똑바로 쥐고 거대한 몸집의 용을 노려보았다. 처음 보는 괴물이라 어디가 약점인지 알 수 없었다.
“엄호하마. 조심하도록.”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내장이 타격을 입었는지 배 안쪽이 욱신욱씬 쑤셔왔다. 아치볼드는 애써 고통을 참아내며 총을 들어 베른하드를 엄호하기 시작했다. 베른하드는 손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피가 거슬리긴 했지만 미끄러지지 않도록 검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 그리곤 잠시 타이밍을 고르다가 이내 검을 꼭 움켜쥐고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베른하드가 뛰어듦과 동시에 아치볼드가 빠르게 사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괴물의 단단한 피부에 총알이 제대로 박히질 못하고 퉁겨져 나갔다. 베른하드가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지만 작은 상처밖에 내지 못했다. 쉽게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둘의 선공에 괴물은 화가 났는지 포악하게 울부짖으며 베른하드 쪽으로 달려들었다. 베른하드는 잽싸게 피했고, 괴물의 얼굴을 향해 아치볼드가 몇 발을 더 쏴댔다. 그러나 오히려 화만 돋구었는지 괴물이 아치볼드 쪽을 노려봤고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거칠게 달려들었다.
“윽!”
서둘러 방호사격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는지 아치볼드가 괴물의 날카로운 손톱에 복부를 베이고 말았다. 가까스로 몸을 돌려서 피하긴 했지만 안그래도 다쳤던 부위인지라 단순히 스친 상처에서도 피가 무수히 쏟아지기 시작했다. 살점이 아예 떨어져나갔는지 복부에 느껴지는 통증이 아찔할 정도라 아치볼드가 무릎을 꿇었다. 간신히 의식을 잃지는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고통이었다. 아치볼드가 힘을 못 쓴다는걸 눈치챘는지 괴물이 다시 한 번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막은 것은 베른하드의 가시나무였다.
“아치볼드! 괜찮나?”
간신히 괴물을 붙잡아둔 베른하드가 아치볼드 쪽으로 서둘러 달려가 상처를 살폈다. 피가 워낙 많이 흐르고 있어서 이대로 두면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이 뻔했다. 한시라도 빨리 괴물을 처지하고 치료를 해야 한다. 아치볼드에게 더 이상 전투를 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베른하드가 아치볼드를 일으켜 근처 나무 옆으로 피신시켰다. 걸을때마다 복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다리를 타고 흘렀다. 끈적한 액체로 손을 온통 적시면서도 베른하드는 붙잡은 검을 놓지 않았다. 애써 침착한 척 하고 있었으나 검을 쥔 손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무서워서, 겁이 나서 떨리는건 아니었다. 그것은 아치볼드가 다쳤다는 사실에 대한, 그리고 무능한 자신에 대한 순수한 분노였다.
“난 괜찮으니 걱정말게. 혼자서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부상자를 엄호하며 싸우는 것보다는 낫지.”
아치볼드가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베른하드는 짧게 거절하고는 괴물 쪽을 노려봤다. 엉킨 가시나무를 거칠게 찢어내며 괴물은 슬슬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재빠르게 괴물을 향해 달려드는 베른하드의 뒷 모습을 보며 아치볼드가 총을 조준했다. 총구를 괴물의 눈에 정확히 겨누고는 힘을 실어 한 발 날렸다. 그 반동으로 피가 울컥하고 터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갑작스러운 총격에 베른하드가 속으로 혀를 찼지만 망설이지 않고 괴물에게 달려들어 눈을 찔렀다. 연약한 부위를 두 번이나 맞은 것이 치명상이었는지 괴물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완전히 숨통을 끊기전에는 안심할 수 없는 법이다. 쓰러져서 크르렁거리는 괴물을 매섭게 노려보며 베른하드가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괴물은 끈적한 액체를 토하며 부들거리다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혹여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괴물을 잠시 주시하던 베른하드가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하고 아치볼드가 쓰러진 쪽으로 달려갔다.
“자네와 함께 와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었어.”
“따라오지 않았으면 될 일 아닌가!”
“하지만 내가 없었다면 베른하드 자네도 죽었을걸세.”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베른하드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혼자서 처리하기엔 버거운 상대였다. 어쩌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둘의 상태가 너덜너덜한 것만 봐도 혼자 상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베른하드는 말을 하는 대신 아치볼드의 상처 치료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치볼드의 배에 난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대충 닦아내는 베른하드를 잠자코 바라보던 아치볼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베른하드. 언제까지 숨기고서 고민만 할 생각인가?”
“그게 무슨 소린가?”
뜬금없는 아치볼드의 말에 베른하드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지금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다, 아치볼드의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득했기에 베른하드는 그 질문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치볼드는 대화를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파악하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가까운 사람이라면 더더욱 말일세.”
무슨 밀이냐고 다시 묻기도 전에 아치볼드가 베른하드의 손을 턱 낚아챘다. 배에서 나온 피가 묻어있었지만 아치볼드는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그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조용히 가져다대었다. 움켜쥔 베른하드의 손 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며칠 전날 밤을 말하고 있는걸세.”
“……깨어있었던건가.”
마주보는 아치볼드의 눈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확고해서 오히려 베른하드가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잠이 들지 않았다고 해도, 취해있어서 기억하지 못할거라 생각했는데. 베른하드는 자기 자신을 탓하며 작게 혀를 찼다. 곧 손을 빼내려고 힘을 주는데 아치볼드가 양 손을 이용해 베른하드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강하게 잡아챘다.
“피하지 말게, 베른하드. 그래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어.”
“이 일은 나 혼자 해결할테니 신경쓰지 말도록. 아치볼드 자네를 귀찮게 굴진 않을테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평소대로 말하고 있었지만 베른하드의 손이 차갑게 얼어 있다는 것과, 그의 얼굴 근육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아치볼드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베른하드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할 뿐. 그런 베른하드가 너무 그 다우면서도 답답해서 아치볼드는 잡은 손에 더욱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리곤 그를 자신의 쪽으로 확 잡아당겨 밀착시켰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에 당황한 베른하드가 빠져나가려 하자 아치볼드가 그의 어깨를 쥐었다.
“그게 아니야, 베른하드.”
“무슨…….”
“이 상황에서는, 눈을 감는걸세.”
손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는 베른하드의 허리를 능숙하게 감싸며 아치볼드가 천천히 입술을 포개었다. 까슬하면서도 거친 입술이었지만 따뜻했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놀라서 오히려 굳어버리고만 베른하드의 뒷덜미를 강하게 잡은 아치볼드가 잠시 입술을 뗐다가 다시 겹쳐왔다. 두번 와닿는 감촉에 베른하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겨우겨우 아치볼드를 밀쳐낸 베른하드가 미간을 좁히며 험악한 얼굴을 했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베른하드를 보며 아치볼드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그런 감정으로 고민한 사람은 자네 혼자가 아니라고.”
아치볼드의 목소리 역시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베른하드는 그 내용에 더 당황해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한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벙찐 얼굴을 하고 있는 베른하드를 바라보던 아치볼드가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곤 베른하드의 차가운 뺨을 매만졌다.
“자네와 같은 마음이라는걸세.”
결국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은 아치볼드가 답지 않게 쑥쓰러운 듯 볼을 긁적였다. 하지만 그런 아치볼드를 제 눈으로 보면서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베른하드였다. 눈만 동그랗게 뜨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베른하드를 빤히 바라보며 아치볼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고지식한 베른하드가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도 이 순간에는 솔직하게 기뻐하면 좋을텐데. 아치볼드는 다시 한 번 말을 꺼내는 대신 베른하드를 꼭 껴안았다. 베른하드가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자 아치볼드가 허허 웃었다.
“아프니까 움직이지 말게.”
“…아치볼드, 자네….”
“돌아가서 멋지게 말하고 싶었는데 혹시나 싶어서 이런 곳에서 말하게 됐네. 이해하게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게나.”
그제야 평소처럼 말하는 베른하드를 보고 아치볼드가 작게 웃었다. 그리곤 베른하드와 눈을 맞추었다.
“그럼 돌아가서 다시 제대로 말하겠네. 그러니 베른하드 자네는 대답을 준비하도록.”
넉살좋은 아치볼드의 말에 베른하드는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아치볼드는 놓치지 않고 똑똑히 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