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들어가겠네.”
“됐습니다. 움직이지나 말고 있어요.”
럼로우는 기어코 저를 따라오려고 하는 스티브를 만류하며 단호히 말했다. 스티브의 모습은 정말 보기 힘들 정도였다. 더 빠져나갈 살이 있는지 하루 이틀만 지나도 그 몸이 더 작아져 있었다. 럼로우는 할 수만 있다면 제 몸뚱이의 반을 쪼개 스티브에게 주고 싶었다.
요 며칠 동안 럼로우는 거의 스티브의 집에서 생활하다시피 했다. 사람 온기도 별로 느껴지지 않던 집에 이제는 제법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럼로우도 그 생활에 퍽 익숙해지고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곳에 계속 머물 생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지 말아주었으면, 또 와주었으면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그 말을 입 밖으로는 절대 내지 않는 스티브를 보고 있노라면 오기로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지가 않아졌다. 럼로우는 이젠 콧잔등을 가볍게 퉁기는 것조차 위험해 보일 정도로 빼빼 마른 스티브의 뺨을 조심히 쓸었다 놓는 것으로 그 마음을 대신했다.
럼로우는 정말 꿈만 같은 시간을 보냈다. 스티브가 미간을 찌푸리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다가가 그 팔이며 다리를 주물러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간단하게 요리를 해주는 것도, 거동이 불편한 그를 대신해 청소를 하는 것도 모두 하나같이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까짓 게 뭐라고 지금까지 하지 못하고 망설였나 싶어 럼로우는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고작 이런 것을. 더욱이 소소한 노동의 대가로 돌아오는 것이 스티브의 밝은 웃음이거나 가벼운 키스인 것까지 생각해보면 흘러간 시간이 엄청 손해인 것처럼 느껴졌다.
“럼로우. 자네에게 너무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네.”
스티브는 제가 해야 할 일을 럼로우가 대신 해주는 것이 퍽 미안한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럼로우는 그가 꼭 어미 새를 쫒아 다니는 병아리 같다고 생각했다. 럼로우는 식탁을 정리하며 고개를 저었다.
“웃기지도 않는 얘긴 하지 말고 가만히나 있으십쇼. 괜히 움직이다 다치지나 마시고.”
“그렇게까지 못 움직이는 건 아니라네!”
“부려 먹을 사람이 있는데 뭣 하러 움직입니까.”
럼로우의 말에 스티브가 어벙한 얼굴을 했다. 럼로우는 그런 스티브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스티브는 또 얼굴을 붉히며 럼로우의 목덜미에 조심히 손을 둘렀다. 럼로우는 픽 웃으며 스티브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 옆자리에 앉은 럼로우가 마른 손목을 쥐었다.
“제 나름대로 사과하는 거니까 그냥 받는 게 좋을 겁니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 뿐 이라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더 가득했다. 스티브는 제 손등이 까끌한 턱에 부벼지는 것을 막지 않은 채 작게 웃어 보였다.
“더 이상 사과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말로는 안 하겠다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닙니까.”
가벼운 대꾸에 둘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럼로우가 스티브의 손을 놓자 발갛게 부은 손등이 보였다. 이런. 럼로우는 고작 몇 번 턱으로 쓸어낸 것 가지고 사포에라도 쓸린 것 마냥 붉어진 손등을 황급히 엄지로 문질렀다. 스티브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아프진 않네. 그냥 붉어졌을 뿐이야.”
“나 참, 이래선 제대로 만질 수도 없겠습니다. 이러다 부서질까 두렵네.”
“괜찮으니 마음껏 만지게.”
툭 튀어 나온 말에 럼로우가 놀라 시선을 맞추었다. 제가 내뱉은 말이 뭔지도 모르는지 스티브는 말간 얼굴을 하고선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는 눈빛에 럼로우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말 함부로 내뱉지 마십쇼. 누구 고문할 일 있습니까?”
“그런 거 아니네.”
“그럼 뭔데요.”
“말 그대로 얼마든지 만져도 좋다는 뜻이었네.”
이 사람이 진짜…… 황당한 얼굴의 럼로우와 달리 스티브는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제 손등을 쓸어내리고 있는 럼로우의 손을 강하게 잡아 왔다. 그래 봤자 양 손으로도 럼로우의 한 손을 덮는 것이 고작이었다.
“보고 싶었네.”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미소에 거짓이 섞여 있을 리 없었다. 럼로우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온전히 드러내는 스티브에겐 정말로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제가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던 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의도가 있어서였다. 물론 그럴 때마다 발그레 물드는 스티브의 얼굴이 보기 좋아서 그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그런 저와 달랐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말하고 싶어서 입을 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했네요, 캡.”
“좋은 일 아닌가.”
솔직하게 구는 스티브야 당연히 사랑스럽다 못해 몸이 으스러지도록 와락 끌어안고 싶을 정도였지만 그보다 럼로우에게 먼저 찾아드는 것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럼로우는 거짓과 온갖 꿍꿍이로 뒤덮인 제 과거를 통째로 들어 내고 싶었다. 스티브의 환한 미소를 받아내면 받아낼수록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 걱정을 스티브에게 드러낼 수는 없었다. 스티브의 말에 따르면 이런 감정 역시 럼로우가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다.
자조적으로 웃은 럼로우가 곧 고개를 들어 스티브를 눈에 담았다. 파란 눈동자는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럼로우는 그를 살짝 끌어당기곤 위로 말려 올라간 입꼬리에 잘게 키스를 퍼부었다. 안을 파고들지 않고 입술과 그 근처에만 맴도는 입맞춤이 간지러운지 스티브의 어깨가 떨려 왔다.
그렇게 주말까지 행복하기 그지없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럼로우에게 호출이 날아 왔다. 쉴드에게서 온 것이었다. 어차피 럼로우는 쉴드에게 말해야 할 것도 있었다. 그냥 집에만 있어도 된다는 럼로우의 말에도 스티브는 기어코 뒤를 쫒아 쉴드 건물까지 오고 말았다. 그러나 퓨리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일만큼은 오롯이 럼로우의 몫이었다. 럼로우는 그를 사람들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곤 홀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쉴드에서 부른 이유라곤 지난번 보고에 이어 앞으로의 일정을 잡는 게 전부였다. 그보다 럼로우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는 곧장 퓨리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고 연락을 넣었다. 답이 떨어지길 기다리면서 럼로우는 아래에서 초조하게 저를 기다릴 스티브를 떠올렸다. 그를 생각해서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가능하면 스티브에게 향하는 화살을 제 몸으로 막아주고도 싶었다. 지금의 스티브라면 끌어안는 것만으로도 다 막아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올라오라는 답이 찾아 들었다.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럼로우는 쉴드에 잠입한 이후 오늘만큼 긴장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가 살아온 인생을 통틀어도 지금만한 순간은 없을지 몰랐다. 그는 문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가볍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창밖을 바라보고 서있던 퓨리가 럼로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해야 할 말이 뭔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럼로우의 입이 바싹 탔다. 그러나 물러날 수는 없었다. 럼로우는 주먹을 꽉 쥐고선 바로 대답했다.
“어떤 말이 나오든 캡은 건들지 마십쇼.”
“……자네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지.”
럼로우는 퓨리의 한쪽 눈을 노려보았다. 럼로우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뜩였다가 이내 고요해졌다. 퓨리의 등 뒤로 드넓은 풍경이 보이는데도 꼭 이 세상에 둘만 있는 것처럼 공기가 칙칙하고 무거웠다.
“하이드라의 정보를 넘길 수 있습니다. 쉴드가 절대 알 수 없는 것 까지도.”
“어디서 그런 정보를 구했지?”
“뭐, 여기저기서 구했죠. 직접 본 것도 많고.”
어쩌면 직접 행한 것까지도. 덧붙인 말에 퓨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선 럼로우를 훑어보았다. 한쪽 눈 뿐 인데도 럼로우는 어쩐지 제 속까지 낱낱이 파헤쳐 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한테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뭔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됐을 텐데.”
직접적으로 하이드라 소속이라 말한 것도 아닌데 퓨리는 바로 눈치 채고 럼로우의 의도를 물었다. 럼로우는 잠시 답을 망설였다. 쉴드의 사상에 감회되어서라거나 하이드라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이유는 절대 아니었다. 럼로우가 지금 이곳에 서있는 것은 모두 스티브 로저스란 인간 덕이었다. 그러나 럼로우가 제 입으로 스티브와의 관계를 직접 밝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어떠한 목적이나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입을 여는 것은 더더욱.
“…하이드라를 무너뜨리고 싶습니다.”
“정말로 그게 다인가?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정의를 지키는 것이고, 그렇다면 하이드라는 언제고 깨 부서야 할 적이야. 진짜 이유가 뭔가.”
“제 사람을 위협하는 존재를 치는 게 뭐 이상합니까?”
럼로우와 스티브가 깊은 관계란 것을 퓨리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 스티브가 제 아이의 아버지가 럼로우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기 이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퓨리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자네야말로 그 위협 대상인 것은 아닌가.”
“전에는 그랬죠.”
“지금은?”
망설이 듯 잠시 입을 다물었던 럼로우가 픽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캡틴 소속이죠.”
명색이 스트라이크 팀 아닙니까. 럼로우는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살벌한 눈빛만큼은 진심이었다. 퓨리는 말없이 럼로우를 노려보았다. 주먹을 말아 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럼로우를 역으로 이중 스파이로 이용해 하이드라를 치는 것은 쉴드 쪽에서도 손해 볼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엄청난 이득이었다. 거짓 정보로 교란시킬 수도 있었고 미처 알지 못했던 것까지 다 끌어모을 수도 있었다. 퓨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자네가 하이드라를 괴멸시키는데 큰 도움을 준다고 하더라도 이전에 지은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네.”
“그 점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뭐, 벌을 주신다면 달게 받아야죠.”
“그 벌이 무엇인지 알고?”
“가벼우면 저야 좋겠죠.”
가볍게 웃으며 대꾸한 럼로우의 표정이 이내 굳었다.
“어떤 거든 상관없습니다만, 캡틴은 죄가 없습니다.”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지.”
“잘못 결정 하면 일이 틀어질지도 모릅니다.”
“지금 협박하는 건가.”
“어차피 박쥐처럼 살아왔던 인생 아닙니까? 제 마음은 캡틴꺼라서요. 그에게 좋은 방향으로 돌아서겠죠.”
뻔뻔한 대답이었다. 럼로우도 그렇게 느꼈다. 애당초 하이드라에 몸을 담고 있던 주제에 이제와 캡틴의 편에 선다고 하는 것부터가 쉬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럼로우도 퓨리의 고민이나 걱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가 어찌 되었건 럼로우는 지금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스티브의 곁에 있고 싶었다. 설령 어떤 결과가 들이닥친다 하더라도, 지금은.
“아이까지 건드리는 파렴치한 곳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 아이에게 딱지를 붙인 것은 자네 아닌가.”
퓨리의 말이 비수처럼 럼로우의 가슴에 꽂혔다. 맞는 말이었다. 럼로우는 대답하는 대신 쓰게 웃어 보였다. 하이드라를 역으로 치기 위한 계획을 짜려면 적어도 그 요원들을 상대로는 럼로우가 하이드라라는 사실 역시 밝혀야만 했다. 그 안에는 스티브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나타샤나, 자타공인 캡틴 아메리카 팬인 콜슨 등도 섞여 있을 것이다. 럼로우는 정말 미움 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일단 알려지고 나면 좋든 싫든 소문은 퍼지기 마련이라 곧 다른 이들도 진실을 알게 될 터였다. 그래도 그들이 스티브를 욕하진 않겠지. 쉴드 요원들은 대부분 캡틴을 좋아하니까. 럼로우는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럼 생각해둔 계획은 뭐지?”
뒷짐을 지고 선 퓨리가 고개를 치켜들곤 물었다.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럼로우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단 뜻이나 다름없었다. 럼로우는 스티브가 잠들어 있는 사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자료를 꺼내 들었다.
“하이드라 쪽에서도 여길 칠 계획을 짜는 중이라 아마 그 점을 이용하면 쉬울 겁니다.”
진지한 얼굴로 퓨리는 빼곡히 정리 된 자료를 살펴보았다. 어차피 지금 당장 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럼로우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그곳을 빠져 나왔다. 방을 나와 문을 닫자 형용할 수 없는 안도와 홀가분한 마음이 럼로우를 덮쳐왔다. 불안한 마음 역시 혼재했다. 그래도 이것이야말로 럼로우가 진정으로 과거를 끊는 마지막 라인이자,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시작점이었다. 럼로우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럼로우가 다시 스티브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한 요원과 대화중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진 몰라도 제법 푸근하게 웃는 그를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는 럼로우의 입매 역시 호선을 그렸다. 럼로우는 스티브가 좋았다. 지금에서야 솔직하게 내뱉는 진심이었다. 럼로우의 안을 꽉꽉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정의고, 악이고, 쉴드고, 하이드라고, 사실 럼로우에겐 그 모든 것들이 중요치 않았다. 그저 스티브만이 행복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리고 그를 닮았을, 어쩌면 자신과 더 닮았을지 모르는 그 안의 아이까지도.
“스티브.”
“럼로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스티브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삐딱하게 서있는 럼로우를 보자마자 스티브의 얼굴이 조금 더 환해졌다. 살이 내린 탓에 도드라진 광대가 한껏 위로 올라가는 것을 눈에 담으며 럼로우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갑시다, 캡.”
럼로우는 제 손을 잡아 오는 앙상한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