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다. 럼로우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퓨리의 생각보다도 훨씬 많았고, 또 그만큼 정교했다. 동시에 럼로우는 하이드라 쪽에도 거짓 정보를 흩뿌리고 있었다. 아침에는 쉴드와 함께 일 했고 밤에는 조작한 정보를 하이드라에게 보냈다. 당연히 럼로우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 거의 매일 밤을 잠들지 못하고 일하느라 눈이 퀭해지는 럼로우를 스티브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자네 정말로 괜찮나? 그러다 쓰러지겠네. 잠이라도 잘 자야 하는 게 아닌가.”
“그 정도로 늙어빠진 몸은 아닙니다, 캡.”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여.”
“잘생긴 얼굴이 다 사라져서 아쉽습니까?”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네, 럼로우!”
스티브의 걱정에도 럼로우는 그저 웃으며 넘어갈 뿐이었다. 스티브는 진심으로 럼로우가 걱정 되었다. 자신이야 아이 때문에 살이 빠진다고 쳐도 럼로우의 얼굴이 날이 갈수록 홀쭉해지는 것은 순전히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는 탓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스티브는 내심 속이 상했다.
“뭐, 끝나면 수당 더 챙겨준다고 했으니 너무 걱정은 마십쇼.”
“문제는 그게 아니라네.”
“캡 먹여 살릴 정도는 됩니다.”
농담처럼 가볍게 대꾸하는 럼로우에 스티브의 속이 더 타들어갔다. 럼로우는 시원하게 웃으며 스티브의 손등에 쪽 뽀뽀 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것을 살펴보느라 시선은 여전히 스티브가 아닌 모니터에 박힌 채였다. 스티브의 얼굴에 불만이 들어찼다. 럼로우는 제가 피곤한 것 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스티브는 럼로우의 다크 서클이 뺨을 반쯤은 가릴 지경인 것이 신경 쓰였다. 못나졌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피곤한 것이 느껴져서 그랬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좋았다. 출산이 거의 임박해 있으니 가능하면 빨리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는 럼로우의 심정 역시 이해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정도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전에 비해 잠이 많아진 스티브가 먼저 눈을 감고 나면 럼로우는 새벽이 짙어질 때까지 일을 했다. 스티브는 이제야 자신이 고집을 부릴 때마다 애가 탄다고 투덜거리던 럼로우의 기분을 뼈저리게 이해했다.
“자네가 자지 않으면 나도 자지 않겠네.”
“그건 또 무슨 고집입니까. 당신이 안자면 아이도 피곤해 할 텐데요?”
“그, 그건….”
아이 얘기가 나오자마자 스티브가 당황해선 말을 흐렸다. 단호하게 표정을 굳혀놓고 막상 아이 얘기가 나오니 걱정이 되는 것이다. 럼로우는 그런 스티브가 귀여워 고개만 살짝 돌려 스티브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스티브는 상체만 기댄 채 침대에 반쯤은 누워 있었고 럼로우는 그 옆에 걸터앉아 쉴드 쪽에서 보내온 자료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배를 쓰다듬던 스티브의 손이 럼로우의 허벅지 위로 향했다. 럼로우의 입술이 슬그머니 위로 올라갔다.
“별로 피곤하지도 않아요, 캡. 사실 힘들기로 따지면 예전이 더 힘들었죠.”
“예전이라면…?”
“슈퍼 솔져 체력 따라잡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럼로우가 능글맞게 말하며 슬금슬금 손을 뻗어 스티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몸을 바싹 당겨 가까이 앉으니 스티브의 작은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동그랗게 뜬 눈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귀여웠다. 럼로우는 오랜만에 스티브의 입술을 진득하게 파고 었다. 돌아온 이후로는 늘 입술을 훑고 떨어지는 정도의 가벼운 접촉만 했던 터라 스티브로서도 오랜만에 받아 보는 키스였다.
럼로우의 손이 스티브의 턱과 목덜미 근처를 조심히 잡아 왔다. 눈높이가 퍽 낮아진 탓에 럼로우는 살짝 상체를 굽히기까지 해야 했다. 스티브가 제 입술을 두드리는 혀를 먼저 빨아 당겼다. 럼로우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각도를 틀어 조금 더 깊숙이 혀를 찔러 넣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은 스티브가 럼로우의 등을 끌어안았다. 혀가 얽힐 때마다 외설적인 소리가 서로의 입을 넘나들었다. 틈 없이 빠듯하게 와 닿는 입술에 스티브가 곧 숨을 헐떡였다. 끈적하게 키스하던 럼로우가 나직이 웃으며 스티브의 입술 너머로 숨을 불어넣었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스티브의 얼굴은 과실처럼 곱게 물이 들어 있었다. 오물거리는 입술에 다시금 쪽 입을 맞춘 럼로우가 푸스스 웃었다. 오랜만에 하는 키스에 살짝 달아 오른 스티브가 목을 앞으로 쭉 뺐다. 누르듯 입술이 포개어지자 스티브가 혀를 내어 럼로우의 입술 위를 할짝거리고 지나갔다.
“…스티브.”
이건 옛날에 스티브가 써먹던 암호였다. 직접 말하기엔 부끄럽고, 그렇다고 하지 않고 넘어가기엔 아쉬울 때 스티브는 마치 간지럽히는 것처럼 럼로우의 입술을 가볍게 핥고 떨어졌다. 한 마디로 오늘은 제 옆에서 자고 가라는 의미였다. 물론 럼로우가 처음 집에 왔을 때처럼 단순히 손만 잡고 자라는 순수한 의미는 아니었다.
부끄러워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조금 전 키스로 숨이 차서 그런 것인지 여전히 스티브의 뺨은 장밋빛이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고개를 숙이거나 럼로우의 시선을 피하는 대신 똑바로 눈을 맞추어왔다. 간절하게 저를 바라보는 스티브의 눈빛에 럼로우의 아래가 서서히 뻐근해졌다. 지금까지 럼로우가 스티브에게 무척 가벼운 접촉만 해왔던 것은 모두 스티브를 위해서였다. 안 그래도 살이 쪽 빠져 자기 몸 하나 가누기 힘들 지경인데 럼로우가 달려들면 버티지 못할 것이 뻔했다. 럼로우는 제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간지럽게 구는 스티브가 조금 미워졌다. 곤란하다는 듯 눈을 찌푸린 럼로우가 스티브의 콧잔등을 아프지 않게 콱 깨물었다. 놀란 스티브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누구 고문 시킬 일 있습니까. 이러지 마요, 캡.”
“그럼 오늘은 그만 하고 같이 자게.”
이렇게까지 나오는 스티브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럼로우는 들고 있던 노트북을 저만치 치워버렸다. 스티브가 눈을 반짝이며 럼로우가 누울 수 있도록 몸을 옆으로 비켜주었다. 사실 스티브는 럼로우의 한 품에 폭 안길 정도로 왜소해진 상태라 굳이 옆으로 비켜줄 것도 없었다. 럼로우가 그런 스티브의 목과 어깨 아래로 제 팔을 끼워 넣으며 자세를 잡아 누웠다.
“마음은 알겠는데 또 이러진 마십쇼. 초라하게 화장실에서 혼자 빼고 싶진 않거든요.”
“내가 있지 않나.”
“임산부가 무슨 소립니까, 지금.”
럼로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자 스티브가 럼로우의 팔이 아프지 않도록 살짝 고개를 들며 수줍게 말했다. 말하며 부끄러웠는지 조금 전과는 달리 울긋불긋해진 뺨을 럼로우의 반대편으로 틀기까지 했다.
“나도 자네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네.”
스티브의 깜짝 발언에 럼로우가 머리가 멍해졌다. 답지 않게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럼로우가 잠시 침묵한 사이 스티브의 얼굴은 타오를 것처럼 붉어졌다. 이내 럼로우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살짝 들어 올린 스티브의 머리를 제 팔 위로 아예 기대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와락 제 쪽으로 끌어 당겨 드러난 뒷덜미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나중에 딴 소리 하면 안 됩니다, 캡. 평생 기억해 둘 거니까.”
순간 아랫배가 뭉근해지며 열이 오른 것이 사실이었지만 조금만 건드려도 위태로워 보이는 스티브를 굳이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럼로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스티브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불룩 솟은 배를 찬찬히 쓰다듬는 럼로우의 손길에 스티브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럼로우는 늘 그렇듯 스티브가 먼저 잠들고 나면 몰래 빠져 나와 다시 일정을 검토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스티브 역시 럼로우가 그럴 것이라 예측했는지 제 허리를 두른 럼로우의 손을 아예 꼭 쥐고선 잠이 들었다. 그 연약한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스티브는 잠이 든 와중에도 절대 손을 풀지 않았다. 빼내려고 억지로 힘을 주다간 스티브의 손이 망가질 것 같아 럼로우는 강제로 벗어나지도 못했다. 럼로우는 스티브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그가 정말 못 말린다고 생각했다. 뱃속의 아이 역시 잠들지 않고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 위로 올려놓은 럼로우의 손바닥을 툭툭 쳐왔다. 럼로우는 제가 느낄 수 있는 행복에 감사했다.
럼로우가 그렇게 고생한 덕에 일은 지체 없이 진행되었고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발 맞춰 어느덧 디데이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럼로우는 이미 하이드라 쪽에 거짓 정보를 집어넣은 상태였다. 쉴드 내에 침투해 있는 하이드라를 모조리 색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잘 알려지지 않은 하이드라의 본거지를 쳐 그들을 모두 소탕하는 것이 이 계획의 목적이었다. 당연히 럼로우는 모든 일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
“몸이 이렇지 않았다면 나도 자네를 도울 수 있었을 텐데.”
“됐습니다. 여기서 쓰러지지 않고 건강히 있는 편이 훨씬 안심이 되니까.”
스티브는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캡틴 아메리카의 일을 모두 내려놓은 상태였으나 이번만큼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가능하다면 럼로우와 함께 가 앞에 도사리고 있을 위험에서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럼로우는 역으로 스티브가 캡틴 아메리카의 일을 할 수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같이 갔다면 저를 대신해서 위험한 상황에 처할 테니까. 그것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마지막 밤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어쩌면 새벽부터 럼로우는 소수의 인원과 함께 제 과거를 뿌리 채 뽑아내기 위해 떠나야 했다. 스티브는 아쉬운 듯 벌써부터 럼로우의 손을 꼭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려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고도 섭섭한 말 하나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스티브를 럼로우가 크게 안아주었다. 럼로우의 어깨에 제 이마를 기대고 한참을 있던 스티브가 뒤늦게 무언가 생각난 듯 작은 탄성과 함께 방을 가리켰다.
“준비한 게 있네.”
움직이기 힘든 스티브를 대신 해 럼로우가 방으로 가 물건을 가져 왔다. 스티브가 준비한 것은 다름 아닌 카메라였다. 찍는 즉시 사진이 바로 인화되어 나오는 폴라로이드 카메라. 럼로우에게도 생소한 것이었다. 스티브는 수줍게 웃으며 럼로우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생각해보니 자네와 찍은 것이 한 장도 없기에….”
그 말대로 럼로우가 스티브와 같이 사진을 찍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애초에 럼로우는 사진이란 것과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이라곤 서류에 붙여야 하는 증명사진 정도가 다였다. 스티브 역시 럼로우와 사정이 다르지 않았는지 먼저 사진을 찍자고 말해놓고선 카메라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눈치였다. 럼로우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캡,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진은 웬 사진입니까.”
“으음, 분명히 이렇게 누르면 된다고 했네만….”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던 스티브가 커다랗게 튀어 나온 버튼을 누르자 번쩍 하고 플래쉬가 터졌다. 깜짝 놀란 스티브가 멍한 얼굴로 카메라를 보았다. 카메라는 지잉 소리를 내며 실수로 찍은 사진을 출력하고 있었다. 여전히 영문을 알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는 스티브 대신 럼로우가 그 손에서 카메라를 뺏어 들었다. 아직 까만 화면에 불과한 사진은 스티브의 손에서 점차 밝아져갔다.
“기다리면 사진이 뜰 겁니다. 어차피 버려야 할 사진이겠지만.”
“아니, 이것도 괜찮네.”
“뭐 어떻게 나왔는지 알고 괜찮다 그럽니까.”
스티브가 열심히 카메라를 살펴보고, 저는 뒤에서 그걸 웃으며 바라보고 있을 사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씩 까만 화면이 걷어지고 그 아래에 선명한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티브의 반쪽짜리 얼굴이 사진의 대부분을 차지하곤 있었지만 그 너머로 럼로우가 웃고 있는 것도 분명 보였다. 럼로우는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스티브의 손에서 그 사진을 낚아챘다.
“왜 가져가는가?”
“잘못 나온걸 뭐 하러 가진답니까. 당신 얼굴만 대문짝만하게 나온 건데 필요해요? 액자에 담아서 거울 보듯이 보려고 그럽니까?”
“그, 그런 건 아닐세!”
얼굴이 빨개진 스티브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오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까지 휘휘 내저었다.
“그럼 제가 가지겠습니다.”
“잘못 나왔다면서 자네는 왜 가져가나?”
“전 거울을 봐도 당신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이거라도 봐야 해서요.”
럼로우의 태연한 대꾸에 스티브의 목덜미까지 죄 붉어졌다. 럼로우는 지금 스티브의 뺨이며 목을 깨물면 잘 익은 과일처럼 톡 터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입술만 벙긋거리던 스티브가 받아칠 말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다시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럼로우가 카메라를 최대한 멀리 들고선 스티브와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캡, 치즈예요, 치즈.”
스티브가 입을 열어 럼로우처럼 치즈를 따라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번엔 둘의 얼굴이 제대로 찍혔다. 카메라를 드느라 조금 불편한 자세긴 해도 꽤 다정해 보이는 사진이었다. 스티브도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씩 환해지는 사진을 들고서 어린 아이처럼 웃어 보였다.
“하나 정도는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잘 나온 것 같네.”
조금 어색한 포즈긴 해도 액자에 담아두면 딱 좋을 만한 사진이기는 했다. 아이에게 보여줘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럼로우는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은 영화도 안봅니까. 보통 이런 짓 하는 애들이 제일 먼저 죽어요.”
“그런 불길한 소리 하지 말게.”
“그 불길한 행동을 당신이 한 거라구요.”
놀리는 어투에 스티브의 표정이 굳었다. 럼로우는 금세 딱딱해진 얼굴에 제가 농담거리를 잘못 골랐다고 생각했다. 그는 평소처럼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그런 스티브의 머리를 부스스 헤집어 놓았다.
“표정 푸세요, 캡. 이건 영화가 아니고 현실 아닙니까.”
“내가 괜한 짓을 한 것 같군.”
“됐어요. 그거 보면서 저 찾다가 울지나 마십쇼.”
럼로우는 행여 스티브가 또 안 좋은 생각을 할까봐 아예 카메라와 사진을 저 멀리 치워버렸다. 그러곤 스티브의 몸을 번쩍 안아 들어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무게가 별로 느껴지지도 않는지 몸은 침대에 내려놓아도 시트가 아래로 꺼지지 않았다. 호출이 오면 아직 동이 트지 않았어도 당장 나가야 하건만 두꺼운 이불을 주섬주섬 끌어당기는 스티브를 보니 럼로우는 쉬이 발을 뗄 수가 없어졌다.
스티브는 티를 내려 하지 않았지만 이제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침대에 누운 스티브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정말 못된 놈이 된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한줌 거리도 안 될 정도로 말랐는데 배만 동그랗게 튀어 나온 스티브의 모습에 럼로우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럼로우는 스티브의 손을 조심히 잡았다. 힘이라도 세게 주면 정말 똑 하고 부러질 것만 같았다. 럼로우는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움직이질 못했다. 조금 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굴던 것과는 퍽 상이한 모습이었다. 스티브 역시 럼로우가 끌어안고 있을 불안과 저를 향한 걱정이 얼마나 큰지 잘 알았다. 제가 걱정할까 그걸 대놓고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도.
스티브는 럼로우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었다. 럼로우가 그런 적은 많이 있었지만 스티브가 이런 것은 처음이었다.
“자네야말로 날 찾느라 울지 말아야 할 것 같군.”
하하 웃는 스티브의 얼굴이 눈부셨다. 럼로우는 다시 한 번 스티브가 태양 같다고 느꼈다. 그는 이런 몸을 하고도 다른 사람을 안아줄 수 있을 만큼 너른 품을 지닌 남자였다.
“스티브.”
“왜 그러나.”
“……됐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언가 말하려던 럼로우가 다시 입을 닫았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럼로우는 제 진심을 안으로 꾹 삼켜내었다. 일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그 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도 캡이랑 똑같은 짓을 하고 있군. 럼로우는 이런 말을 하면 꼭 죽어 나가던 영화들을 떠올리며 씁쓸히 웃었다. 하지만 저는 죽을 수 없었다. 다시 스티브의 곁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다면 럼로우, 내 쪽에서 부탁이 있네.”
“뭡니까.”
스티브는 답지 않게 망설이다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돌아오면 자네를 브룩이라고 불러도 되겠는가?”
무슨 말이 나오나 했더니.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럼로우가 이내 픽 웃어 보였다.
“훨씬 더 달달하게 불러도 상관없어요.”
고개를 숙여 마른 뺨에 작게 입을 맞춘 럼로우가 그 귓가에 속삭였다. 스티브, 마이 달링. 간지러운 말에 스티브가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럼로우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스티브의 붉어진 얼굴을 쓰다듬었다. 마침 럼로우의 폰이 시끄럽게 울었다. 럼로우는 몸을 일으켰다. 그저 평소와 같이 임무를 하러 가는 것처럼 무겁지 않게, 그러나 동시에 결심한 듯 무척 단호하게 럼로우가 인사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