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드에 잠입한 하이드라를 처리하는 것은 그쪽에 남아있는 요원들의 몫이었다. 럼로우는 진작 그 명단을 퓨리에게 넘겼다. 럼로우가 해야 할 것은 몇 명밖에 알지 못하는 하이드라의 본부를 직접 쳐서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워낙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데다 지리를 아는 것도 럼로우 뿐이라 럼로우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조용히 움직여야하기 때문에 선발 부대는 럼로우를 비롯해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타샤도 포함되어 있었다. 럼로우는 나타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제 등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것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차라리 신랄하게 비난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입은 꾹 다문 채 살기등등한 눈빛을 쏘아대는 쪽이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럼로우는 잘 달리다 말고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렇게 불만이면 그냥 말로 해도 되는데 말입니다.”
“불만이라고 한 적 없어요.”
차갑게 대꾸한 나탸사가 흥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
“마음에 안 든다고는 했었지만.”
럼로우는 골이 지끈거리고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나타샤가 저렇게 나오는 심정을 럼로우도 어느 정도 이해하기는 했다. 쉴드 내에서도 나타샤는 유독 스티브와 친한 사이였으니까. 럼로우는 제법 오래 쉴드에 있었지만 나타샤가 그렇게 스스럼없이 웃는 모습은 스티브가 온 뒤에나 볼 수 있었다. 비단 나타샤 뿐 아니라 쉴드에 있는 모든 요원들은 스티브를 좋아했다. 정확하게는 캡틴 아메리카를 동경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스티브는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답게 쉴드의 중심이었다.
고지식한 말투를 쓰는 것과는 별개로 스티브는 아직 이십 대에 불과해서 종종 어리숙한 모습을 보였다. 본의 아니게 70년이란 세월을 훌쩍 넘은 덕에 현대 문물을 따라가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여주었다. 이 더러운 바닥에서 구를 만큼 구른 나타샤가 그런 스티브를 조금은 애 취급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나타샤는 그런 스티브를 도와주기보다는 놀려먹는 쪽에 더 가까웠지만.
그런 스티브를 다 늙어빠진 사내가 임신시켰는데, 그것도 모자라 책임도 지지 않고 도망이나 가고, 설상가상으로 사실은 하이드라였다고 밝혔으니 나타샤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나타샤가 지금 당장이라도 럼로우의 등을 찌르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럼로우는 다시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과 스티브는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기는 했다. 따로 놓고 봐도 신기한 조합인데 살아온 배경이나 주위 환경까지 그러니 엮이는 편이 더 이상했다. 럼로우가 하이드라의 명으로 스티브의 옆에 붙지 않았더라면 아마 말도 한 번 섞지 않은 채 지냈을 것이 뻔했다. 이렇게 따지면 하이드라한테 이것만큼은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럼로우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흐트러진 장비를 다시 고쳐 잡았다.
지금은 임무에 집중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리고 럼로우가 어떤 식으로 고민을 했건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이었다. 지금이 럼로우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였다.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구원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럼로우가 주먹을 꽉 쥐었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걷던 럼로우가 어느 순간 발을 멈추었다. 조금 전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물이 어느새 코앞이었다. 나무 뒤로 몸을 숨긴 럼로우가 손을 들어 따라오던 이들을 멈추게 했다. 럼로우는 아직 하이드라 소속이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럼로우가 먼저 들어가 동태를 살피고 신호를 보내면 다 같이 돌격하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큰소리를 내며 우다다 달려가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조용히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건물이었지만 사실 내부는 매우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럼로우는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 하나하나 표식도 해두어야 했다. 무작정 건물을 부수고 안에 남은 하이드라 잔당을 처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일이 쉽겠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정보 역시 빼가야 했다. 그 때문에 나타샤가 이곳에 있는 것이기도 했다.
“신호 보내면 왼쪽부터 차례로 들어온다.”
말을 마친 럼로우가 제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피고선 당당히 정문으로 걸어갔다. 이미 말을 해둔 터라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까다롭게 숨긴 무기가 있지는 않은지, 도청이라도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검사를 했지만 나오는 것은 없었다. 럼로우는 이미 무전까지 죄 나무 옆에 버리고 온 뒤였다.
손쉽게 안으로 들어간 럼로우는 입구 근처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저를 검사했던 서너 명을 단번에 때려 눕혔다.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나지 않게 잡아다가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별다른 무기도 없이 제압한 럼로우는 저를 주시하고 있었을 다른 요원들에게 시작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타샤가 가장 빠르게 럼로우의 뒤에 붙었다.
“자료는 아까 말했던 그 장소에 있을 테니 거기로 가십쇼.”
“죽지 않으면 근성만큼은 인정해주죠.”
깔끔하게 대답한 나타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마지막까지 톡 쏘는 그녀의 말투에 럼로우가 헛웃음을 뱉었다. 돌아가도 별로 인정해줄 것 같지는 않은 어조였다. 가볍게 웃은 럼로우는 등을 돌리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다른 이들을 처리하고 건물을 폭파하는 것은 럼로우의 일이 아니었다. 럼로우는 저만이 알고 있는 통로 쪽으로 몸을 틀었다.
행여 하이드라가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서는 안됐다. 지금 여기서 모든 것을 끊어내야 했다. 럼로우는 지하실에 바깥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요원들이 건물 폭파를 위해 설치하는 것을 흘끔 바라본 럼로우가 간단한 지시를 내리곤 홀로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실은 웬만한 간부라도 드나들 수 없도록 단단히 통제되어 있었지만 사람이 거의 빠져나간 지금은 철통같은 문만이 서있을 뿐이었다. 럼로우는 미리 준비해둔 것으로 보안 기계와 문을 아예 부셔버렸다. 무너지는 소리를 내며 등장한 럼로우에 놀랐는지 마침 복도에 있던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이곳엔 무슨 일인가, 럼로우. 자네에겐 여기까지 올 권한이 없을 텐데?”
지하실은 모든 실험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그동안 하이드라는 온갖 이상한 것들을 개발해왔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언젠가는 스티브를 캡틴 아메리카로 만들었던 것처럼 효과가 비슷한 약물을 만들기도 했었다.
“어차피 이젠 권한이란 게 다 필요 없어져서 말입니다.”
비죽 웃는 럼로우의 얼굴에 남자는 단번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위에서 쿵쿵거리고 뛰어다니는 소리가 나는 것만 해도 사태를 의심하기엔 충분했다. 남자가 눈을 부라리더니 황급히 옆에 있던 방으로 달려갔다. 바로 그 방이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가 있는 곳이었다. 럼로우가 느긋하게 문을 열었을 때 남자는 잘 쓰지도 않는 통로를 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저번에 열어봤는데 그거 웬만한 힘으로는 못 엽니다.”
럼로우가 비웃듯 말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남자는 누가 봐도 연구원이었고 그에게 문을 열만한 힘은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는 낑낑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일한 시간이 얼마인데, 이제 와 이러는 이유가 뭔가? 그런다고 남은 생이 행복할 것 같나?”
“뭐, 원래 당신들을 위해 일하던 건 아닌데요.”
그냥 편해서 소속되어 있었을 뿐이지. 럼로우는 여상하게 대답하며 계단으로 내려오기 전 다른 요원에게 받은 총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딱히 쉴드를 위해 일하는 건 아니고.”
태연하게 말을 이으며 럼로우가 남자의 복부를 향해 총을 쏘았다. 피하지도 못한 남자가 총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비명과 함께 육중한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남자는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한 배를 양손으로 틀어막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럼로우는 이번에 남자의 머리통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for Captain America.”
속삭이듯 중얼거린 럼로우의 말은 남자가 지르는 비명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깔끔하게 머리를 맞춘 럼로우가 총을 허리춤에 끼워 넣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남자가 쓰러지면서 바로 뒤에 있던 경보 버튼을 눌렀다.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리더니 순식간에 옆방이 쾅 소리를 내며 터져나갔다. 이 옆은 실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을 보관해두는 창고였다. 젠장. 그깟 것들은 어찌되든 상관없었으나 그로 인해 지하실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큰 문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충격 때문인지 테이블에 있던 것 중 무언가가 화르륵 불타기 시작했다. 불꽃은 삽시간에 방 전체를 휘감았다.
어차피 무너뜨릴 건물인데 도와주는군! 럼로우는 혀를 차며 지하 복도로 뛰쳐나왔다. 바로 그 때 옆에 숨어 있던 하이드라 잔당이 럼로우를 향해 총을 쏘았다. 럼로우는 바닥을 구르며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탄환을 피했지만 등 뒤에서 다가오는 것까지 모두 넘길 수는 없었다.
“으윽!”
럼로우의 옆구리에 날카로운 것이 콰드득 꽂혔다. 럼로우의 상체가 앞으로 무너지자 그 틈에 남자 두어 명이 불타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연구원이 아니었고, 그렇다면 그 문을 열어 밖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빌어먹을. 명백한 실수였다.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이미 누군가가 도망친 이상 이 기지를 부순다고 해서 곳곳에 숨어 있는 그들이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머리가 하나 잘리면, 그것은 두 개가 된다. 아마도 하이드라는 어딘가에 또 몸을 숨긴 채 때를 기다릴 것이다. 70년 전에도 그러했듯이.
마음 같아선 당장 일어나 저 둘의 목을 따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생각보다 옆구리의 상처가 컸다. 벌써부터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럼로우가 거칠게 숨을 내몰아쉬며 비틀거리는 몸을 벽 쪽으로 기대었다. 어느새 불꽃은 방 밖으로도 삐져나와 럼로우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망했군. 럼로우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래, 어쩌면 이곳에서 죽는 것이 스티브에게는 더 도움이 되는 일일지도 몰랐다. 돌아가면 럼로우는 징계를 받아야 했다. 이 일을 돕는다고 해서 그 전까지 쌓아왔던 수많은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럼로우는 달게 받아야 할 죗값이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스티브의 눈앞에서 그 모든 것을 받아내기란 무척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럼로우에게도 그랬지만 스티브에게도 그럴 터였다. 차라리 이곳에서 죽는다면 그 편이 스티브에게도 좋은 일일지 몰랐다. 그는 슬퍼할 테지만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여린 사람이 아니니까.
럼로우는 자신의 말로가 대충 이러리라고 이미 예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스티브를 사랑하게 되고 때문에 하이드라를 배신해 쉴드의 편에 붙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거라곤 생각했다. 그런 인생이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삶을 살아오면서도 럼로우는 이토록 제 죽음을 아쉬워했던 적이 없었다. 살면 좋은 일이고, 행운이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럼로우는 회색빛으로 바래진 인생에 어떠한 기대를 걸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여기서 깔끔하게 죽는 것이 가장 좋은 엔딩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삶에 대한 욕구가 럼로우의 내부에서 강하게 솟구쳤다. 여기서 럼로우가 죽는 것이 가장 완벽한 그림일지 몰라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럼로우는 원래 뻔뻔한 인간이었다. 이번에도 돌아오고야 말았다면서 스티브 앞에서 너스레를 떨고 싶었다.
정말 이기적이게도 럼로우는 스티브가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곱게 눈을 접어서 웃는 따스한 미소와 애교를 부리듯이 제 등에 매달려 오는 팔이 좋았다. 시리도록 맑은 눈동자 안에 제 얼굴만이 담길 때 럼로우는 말로 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젖은 몸이 바르작거리며 럼로우를 향해 활짝 열릴 때에는 말 그대로 딱 죽을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이제는 아이도 있었다. 럼로우는 아직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도 못했다. 고사리 같은 손을 만져보지도 못했고, 아이의 첫 울음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스티브가 그 아이를 보면서 어떤 표정을 할 지, 그리고 럼로우에게 무슨 말을 할지도 알아야 했다. 럼로우는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럼로우가 피가 배어 나오는 옆구리를 손으로 꽉 짓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벽에 기대어 걷는 럼로우의 발이 무거웠다. 달리고 싶었으나 움직일 때마다 옆구리가 조여 오는 탓에 걷는 것이 고작이었다. 연기는 벌써부터 자욱해지고 있었다. 아래에서 발생한 화재 때문에 위에 설치해 둔 폭탄이 일찍 터질 가능성이 높았다. 럼로우는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폭발에 휘말린다면 럼로우의 몸은 갈기갈기 찢어져 흔적도 알아볼 수 없게 변할 것이다. 럼로우는 그런 처참한 몰골을 스티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겨우 계단을 올라간 럼로우가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잔기침이 터져 나올 때마다 목이 쓰라렸다. 연기가 이미 시야를 가득 매우고 있었다. 럼로우는 제 기억에 의존해 출구 쪽으로 발을 옮겼다. 몸이 휘청거렸지만 쓰러지지 않게 단단히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이윽고 달리는 듯 걸어가는 럼로우의 귓가에 똑딱똑딱 흘러가는 초침 소리가 확 꽂혀 왔다.
출구는 아직 저 멀리 있었다. 럼로우는 피가 더 뿜어져 나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스티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우습게도 마지막이라고 느끼자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굴러간 이상 하지 않은 편이 나았을 지도 몰랐다. 하긴, 이렇게 살아 온 주제에 이제와 가정을 꾸리겠다는 욕심은 제게 너무 과분한 것이었다. 이를 악물고 달리던 럼로우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곧 럼로우의 발이 멈추었다. 동시에 초침 소리 역시 멈추었다. 세상은 아주 짧은 시간 고요해졌다. 그리고 쾅, 시끄러운 파열음과 함께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만큼 커다란 폭발이 럼로우를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