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 2.5D NOTICE GUEST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 지겹도록 요 며칠 내내 비가 퍼붓고 있었다. 한가득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조금씩 내리는 비가 며칠 동안 해를 가려 햇빛도 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기운이 빠지고 축축 늘어지게 만드는 딱 그런 날씨였다. 우중충한 잿빛 하늘을 바라보던 스티브가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살이 쪽 빠졌던 몸도 이제는 적당히 근육이 생겼다. 마르기만 했던 팔에도 제법 힘이 붙었고 푹 꺼졌던 얼굴 역시 다시 살이 올랐다. 혈청의 힘이 다시 돌아왔다는 말은 더 이상 아이에게 힘을 쏟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도 같았다. 지금 스티브의 배는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부푼 상태가 아니었다. 스티브는 꺼진 배를 습관처럼 쓰다듬었다.


 아이를 낳은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아이를 낳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우선 마른 스티브의 몸이 출산을 견디기 힘들어 했고, 혈청의 힘으로 겨우 유지하고 있던 아이도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힘겨워 했다. 그래도 우려했던 것과 달리 어느 하나가 크게 다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스티브는 반쯤 기절했고 아이는 체중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게 태어났지만 그래도 둘 모두 무사했다.


 빽빽 작은 소리로 우는 아이는 척 보기에도 빈약한 상태였다. 스티브는 움직이기도 힘든 팔을 뻗어 가까스로 아이를 만져보았다. 축축하고 뜨거웠다. 솔직히 말해 갓 태어난 아이는 예쁘다고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스티브는 그 순간이 세상에서 제일 감격스러웠다. 내색할 수는 없어도 스티브의 안을 잔뜩 좀먹고 있던 불안과 걱정이 아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그곳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가득 채웠다. 스티브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이를 한참 바라보다 의료원에게 건네주었다.


 스티브는 꼬박 하루를 잠들었다. 다행히 다시 눈을 떴을 땐 몸이 어느 정도 진정 됐는지 움직이기 버겁거나 아프진 않았다. 톡 건드리면 바스라질 것 같이 여리게 태어난 아이는 스티브가 잠들어 있는 동안 여러 검사를 받았다. 혹시 예전의 스티브와 같은 체질인지, 온갖 질병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혈청의 부작용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을 알아보는 검사였다. 스티브는 일어나자마자 옆에 있던 배너에게 아이의 상태를 물었다.


 “보통 아이보다 체중이 한참은 마른 편이라 한동안은 병원에 있어야겠지만 그것 외에는 아주 멀쩡해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를 닮지는 않아 다행이군.”


 스티브는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스티브가 가장 많이 했던 걱정도 바로 그것이었다. 혹시라도 태어날 아이가 예전의 저와 같은 체질이면 어떡하나. 정말 그렇다면 그건 그런 체질을 물려준 스티브의 잘못이었다. 스티브는 자신의 아이가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바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려 숨도 쉬기 힘들어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 아이가 살짝 마르긴 했어도 그 외엔 멀쩡하다는 말을 들으니 스티브를 짓누르던 불안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보면 약간 아쉬울지도 몰라요. 캡틴하고 닮은 부분이 별로 없어서.”


 배너의 말에 스티브는 럼로우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아이는 럼로우를 닮았다는 말이었다. 그가 보면 조금 아쉬워하겠군. 럼로우는 늘 스티브의 배를 조심히 끌어안으며 성격은 무리라도 외모는 당신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속삭이곤 했었으니까. 물론 스티브는 아이가 럼로우를 더 닮기를 바랐다. 그편이 여자 아이라 하더라도 훨씬 멋지게 자랄 것만 같았다.


 럼로우를 떠올리자 스티브의 눈이 슬픔으로 젖어 들었다. 그에게 아이를 보여주고 싶었다. 한때는 피하려고 했었지만 결국엔 이렇게 예쁜 모습으로 탄생한 우리 둘의 결실이라고 말하면서 럼로우의 손을 잡아 주고 싶었다. 스티브는 아직도 럼로우가 많은 죄책감과 불안에 시달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짓을 해도 과거를 완전히 씻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자조적으로 웃던 그였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아이를 럼로우에게 안겨주고 싶었다. “그래도 럼로우, 미래까지 어두운 것은 아니지 않나.” 꼭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 그는 병실에 잠들어 있었다. 배너가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스티브는 럼로우가 처참한 몰골로 돌아왔던 것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충격이 심하면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주위에서 황급히 스티브의 눈을 가렸지만 이미 보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실려 온 럼로우의 피부는 거의 반이 일그러져 있었고 복부며 다리엔 말라붙은 피가 가득했다. 저런 몸으로 럼로우가 다른 요원들에게 연락을 취한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겨우 숨이 붙어 있는 럼로우를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스티브는 그 날 주위 사람들이 말을 걸지도 못할 정도로 입을 꾹 다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거나 감정을 표현하면 나을 텐데, 스티브는 죽은 사람처럼 무표정으로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겉으로 그렇게 보인다 해서 스티브가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스티브는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고 있었다. 너무 큰 충격에 이를 드러낼 수가 없는 것뿐이었다. 자신이 그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고, 정말로 그가 다시 눈을 뜨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다. 그리고 스티브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엄청난 슬픔이었다. 슬픔의 파도가 스티브를 무참히 덮쳐왔다. 스티브는 한없이 밑으로 가라앉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스티브가 예정보다 이르게 출산을 하게 된 것도 충격으로 인한 것일 수 있었다. 갑자기 아랫배에서부터 시작된 진통에 스티브가 참지 못하고 쓰러졌을 때 옆에 있던 나타샤가 재빠르게 호출을 누르지 않았더라면 자칫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스티브는 무사히 아이를 낳았고, 몸도 차차 좋아지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스티브는 그 순간에 럼로우가 옆에 없던 것이 아쉽고 미안했다. 럼로우는 은근히 여린 구석이 있으니 아이의 탄생을 지켜보았더라면 눈물을 쏟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티브에게 그런 추태를 보이지 않겠다고 럼로우는 당당히 말했으나 실은 스스로도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럼로우는 스티브가 아이를 낳고 나면 그 이마에 맺혔을 땀을 닦아주며 부드럽게 속삭여주고 싶었다. “정말 고마워요, 스티브.” 라고. 그러고 나면 북받치는 감정에 진짜 눈물을 펑펑 흘렸을 수도 있었다.


 “아이는 언제 안을 수 있는가?”

 “며칠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캡.”

 “자네 잘못도 아니지 않는가. 괜찮네.”


 하지만 쓸쓸히 웃는 스티브의 얼굴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몸엔 크게 무리가 없는 것 같은데… 움직여도 되나?”

 “격한 활동이 아니라면 괜찮지만 그래도 누워있는 편이 좋아요.”


 어딜 가려고 그러는 거냐고 배너가 물었지만 사실 그도 다 알고 있었다. 스티브가 향할 곳이 어디일지는 뻔했다. 그를 배려해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고 명령까지 내려진 바로 그 병실이 옆에 있었으니까.


 “생각해줘서 고맙네. 하지만 난 괜찮으니 걱정 말게.”


 정말 괜찮지 않은 것은 내가 아니지 않는가. 쓰게 웃는 스티브를 배너로서는 위로해줄 수가 없었다. 스티브는 기어이 그곳을 빠져나와 럼로우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았다. 스티브는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럼로우를 그저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붕대로 칭칭 감긴 손을 한 번 꽉 잡아주고 싶었으나 혹 그가 아파하기라도 할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스티브는 손을 거두었다.


 럼로우가 의식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였다. 그동안 스티브는 아직 쉬어야 한다는 만류에도 굳이 럼로우의 곁에 있기를 고집했다. 스티브의 그런 마음을 아예 이해 못할 것도 아니라 다른 이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면서도 스티브를 억지로 끌고 가지 못했다. 스티브는 일어나지 못하는 럼로우의 옆에 앉아 때로는 책을 읽었고, 대답 없는 그에게 속삭이기도 했으며,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많이 하는 것은 그저 럼로우의 얼굴을 빤히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가 언제 눈을 뜰까 생각하며.


 “럼로우!”


 내내 의식을 차리지 못하던 럼로우가 겨우 눈을 떴을 때, 스티브는 잔뜩 젖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럼로우는 뜨자마자 보인 것이 스티브의 물기 어린 눈동자라는 것을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죽지 않은 것은 고마웠으나 저로 인해 울고 있을 스티브의 모습을 보는 것은 결코 반갑지 않았다. 럼로우는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는 손을 탓하며 최대한 입꼬리를 당겨 웃어 보였다.


 “…캡, 돌아오면 브룩이라 불러준다고 했잖습니까.”


 너무나도 평소와 같은 말투에 스티브는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도 작게 웃고 말았다. 럼로우는 그의 뺨을 쓸어주고 싶었지만 생각만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스티브가 깨지기라도 할 것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럼로우의 손을 잡아 왔다.


 “브룩. 고맙네.”

 “뭐가요.”

 “돌아와 주어서….”


 럼로우의 손을 꼭 잡은 스티브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럼로우의 잡은 손의 온기만으로도 스티브가 그동안 느꼈을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죽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과 걱정, 그리고 제가 그곳으로 몰아넣은 것 같아 죄책감이 가슴을 빠듯하게 조여 왔을 테고 곧 엄청난 슬픔이 들이닥쳤을 것이다. 제발 일어나게, 럼로우. 제가 누워 있는 동안 스티브가 꼬박 곁을 지켰다는 것을 럼로우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다녀오겠다고 말했잖아요. 뭘 걱정했습니까.”


 잔뜩 쉬어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저를 위로해주는 것이 고맙고 미안해 스티브는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젖은 눈으로 저를 한참이나 바라보는 스티브에게 럼로우는 해주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하나도 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하는 것부터가 조금 힘겨웠고 몸은 의지와 달리 움직이지도 않았다. 젠장. 럼로우는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저 발그스름해진 눈가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럼로우가 그 상황에서도 다른 요원에게 연락을 취해 살고자 했던 것은 이런 스티브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따스한 햇살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을힘을 다해서 일어나야 했다. 럼로우는 전에 그랬듯 스티브를 가득 끌어안고서 그의 뺨에 간지러운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제 이름을 불러 오는 스티브의 달콤한 목소리를 제 입술로 삼켜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아마도 무사히 태어났을 자신과 스티브의 아이를 안아보고 싶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난 아주 건강하네. 보는 것처럼 몸도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어.”

 “……아이는요.”

 “걱정하지 말게. 조금 마른 것 빼고는 다 괜찮다 그랬네.”

 “괜찮지 않은 것은 저 뿐이군요.”

 “그렇게 말하지 말게…….”


 서글프게 깜빡이는 눈동자에 금세 물이 차올랐다. 럼로우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광경이었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지금 저 눈물을 닦아주는 것조차 할 수 없으니 정말 최악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럼로우는 마음껏 나불거린 제 입을 탓하며 스티브를 잡은 손에 겨우겨우 힘을 주었다. 그래봤자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것 정도가 다였지만 스티브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뭐, 구르는 게 일상인 직업 아닙니까. 곧 괜찮아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럼로우의 눈은 어떻게든 회복하고 말겠다는 결의로 잔뜩 불타고 있었다. 스티브는 말없이 그의 손등에 상냥히 입을 맞췄다. 럼로우는 다시 한 번, 어떻게든 일어나 스티브에게 입을 맞춰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의지 덕인지 럼로우는 놀라운 속도로 호전되어갔다. 이제는 일어나 움직일 수도 있었다. 의료원이 무리는 하지 말라고 했지만 럼로우는 그 말을 무시하고 가벼운 운동까지 했다. 물론 그것을 스티브에게 들킨 뒤로는 그에게 혼이 나는 것이 무서워 꼼짝 없이 앉아 있어야만 했지만, 그래도 점차 나아지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곧 칭칭 감고 있던 붕대를 모두 벗겨내기까지 했다.


 사실 럼로우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스티브에게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징그럽다고 꺼려할 리는 없었지만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해서 괴로워할 수는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럼로우의 우그러진 반쪽 피부를 보자 스티브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내려갔다. 화상 자국을 슬프게 바라보던 스티브가 손을 가져다대자 럼로우의 몸이 흠칫 떨렸다.


 “…아픈가?”

 “아뇨.”


 스티브는 천천히 럼로우의 뺨을 쓸었다. 손끝에 닿는 이질적인 감각에 울컥하고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저는 럼로우를 도와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것 뿐 아니라 럼로우를 이런 식으로 몰아붙인 것도 모두 제 의지고 고집이었다. 럼로우라면 싫어도 거절할 수 없었을 터였다. 할 수만 있다면 스티브는 제 피부를 몽땅 럼로우에게 주고만 싶었다.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리 없는 럼로우가 제 얼굴을 살살 매만지던 스티브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 손바닥에 쪽쪽 간지러운 키스를 날렸다.


 “오히려 더 민감해진 것 같은데요. 당신이 그렇게 만지는 걸 참을 수 없는 거 보면.”


 너스레를 떨며 말하는 럼로우가 자신을 위로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 스티브는 애써 웃어 보였다. 그의 눈시울은 이미 붉어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어설프게 웃고는 있었다.


 “……자네는 정말 못 말리겠군, 하하.”


 어쩐지 그 모습이 더 애처롭게만 느껴져 럼로우는 참지 못하고 스티브를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란 스티브가 그렇게 움직여도 괜찮냐고 물어왔지만 럼로우는 아랑곳 않고 스티브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제가 눈을 떴을 때부터, 아니 스티브의 곁을 떠났을 때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다. 어린 아이처럼 이마를 비벼오는 럼로우 때문에 스티브는 또 왈칵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스티브는 럼로우를 밀어내거나 눈물을 쏟는 대신 자신도 그 등을 꽉 당겨 안고 말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스티브가 조심히 말을 꺼냈다. 일부러 인지 럼로우는 스티브와 대화를 나누면서 아이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다. 스티브는 아마 그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작고 여린 생명과 마주하는 것이 무서워서.


 “이제 아이를 만져도 된다고 하니 같이 보러 가겠나?”


 럼로우 역시 스티브가 저를 생각해서 해준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아이가 무서워하면 어쩝니까.”

 “그렇지 않을 걸세. 착한 아이니까.”


 럼로우는 조금, 솔직히 말해서 아주 많이 걱정이 되었다. 화상 자국이 제 반쪽을 빽빽이 채웠다. 평생 안고가야 할 업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심각하게 일그러진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가 보기에는 충분히 징그러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럼로우는 아이에게 아버지로서 제대로 해준 것도 없었다. 저를 보자마자 버둥거리고 빽 울 것을 생각하면 벌써 마음이 쓰라렸다.


 하지만 럼로우가 망설일수록 스티브는 더욱 더 아이를 보여주고 싶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부딪혀야 할 일이었다. 마침 이제는 아이와 접촉하는 것도 가능하니 지금이 기회였다. 스티브는 럼로우의 손을 깍지 끼워 잡고서 아이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 오셨네요. 지금 막 깨어났어요.”


 둘이 왔을 땐 마침 곤히 잠들어 있던 아이가 눈을 뜬 상태였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아이는 스티브와 럼로우 쪽을 바라보며 커다란 눈을 반짝였다. 럼로우는 차마 손을 뻗어 만지지도 못하고 아이를 물끄러미 응시하기만 했다.


 스티브를 꼭 닮기를 바랐던 아이는 그와 똑같이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아이가 눈을 굴릴 때마다 투명하게 밝은 눈동자 안에 럼로우의 얼굴이 넘실거렸다. 비록 아이의 머리칼은 스티브와 같이 햇빛같이 눈부신 황금색은 아니었지만 짙은 머리색도 퍽 잘 어울렸다. 럼로우는 왈칵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꼴사나운 모습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눈물이 핑 돌았다. 제 손가락 하나도 다 잡지 못하는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만졌을 때 결국 럼로우는 터지고 말았다.


 “러, 럼로우!”


 놀란 스티브가 허둥지둥 럼로우의 옆을 오갔다. 생각해본 적은 있었지만 막상 정말로 럼로우가 눈물을 쏟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스티브가 버둥거리며 럼로우의 등을 부드럽게도 쓸어보고 뻘뻘거리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자 럼로우가 팔로 제 눈가를 벅벅 비볐다. 정말 이런 것에는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흐느끼면서도 럼로우는 스티브에게 핀잔을 줬다.


 “브룩… 흐, 브룩이라고 부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브룩!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당황한 스티브나 감정을 추스르느라 바쁜 럼로우와 달리 아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방싯방싯 웃었다. 톡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작은 아이가 눈을 접어 웃는 것에 둘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말았다. 꺄르륵 소리가 날 것처럼 해맑게 웃는 아이가 둘을 향해 작달만한 손을 뻗어 왔다. 지금까지 했던 모든 걱정이 그 웃음 하나에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온갖 불안이 거두어지고 환한 햇빛이 들어찬 것만 같았다.


 “자주 안아서 아이에게 온기를 느끼게 해주는 게 좋아요. 그렇다고 너무 꽉 안으면 숨 쉬기가 힘드니까 조심하시구요.”

 “…알겠네.”


 번갈아가며 조심스럽게 안았을 때에도 아이는 벗어나려고 버둥거리거나 울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입술을 오물거리거나 손발을 꼼지락거리는 것이 다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이었다. 아이는 그저 한 번 웃기만 해도 모든 것을 포근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었다. 결국 둘은 다시 아이가 하품을 할 때까지 그곳에 서서 한참이나 아이를 보았다.


 스티브야 혈청의 힘이 있고, 럼로우도 오래 구르면서 부상에 이골이 난 터라 회복이 빨랐지만 아이 또한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져갔다. 역시 둘의 아이라고 배너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아이는 까다롭게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지도 않고 대체적으로 얌전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울음을 터뜨리거나 버둥거릴 때가 있었는데 그 때는 아무도 달랠 수 없었다. 오직 럼로우를 제외하고는.


 “또 왜 이렇게 운답니까?”

 “나도 모르겠네. 달래보아도 듣질 않아서….”


 진땀을 빼고 있던 스티브가 아이를 럼로우에게로 넘겨주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이의 울음이 딱 그쳤다. 아이는 조그만 손으로도 럼로우를 붙잡겠다는 듯 아등바등 거리며 엄지손가락을 잡아 왔다. 럼로우의 입꼬리가 씰룩이며 위로 올라갔다.


 럼로우가 스티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볼 수 없었던 것을 메꾸려는 듯 아이는 럼로우에게 꼭 달라붙어 있었다. 희한하게도 빼액 울던 아이는 럼로우의 품에만 안기면 조용해졌다. 스티브조차 아이를 달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을 때에도 럼로우만 나타나면 아이는 그리로 가겠다고 짧은 팔다리를 마구 흔들었다.


 처음에는 제가 아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할까봐 망설였던 럼로우도 이제는 퍽 자연스럽게 아이를 안게 되었다. 탄탄한 품이 좋은지 아이는 얼굴이 눌릴 정도로 럼로우에게 꼭 달라붙었다. 럼로우는 제 손가락 하나만큼도 되지 않는 아이의 발을 만지작거렸다.


 “다 좋은데 당신을 별로 닮지 않은 게 아쉽네요. 금발 미인이 얼마나 예쁜데. 그리고 제 머리칼 같은 건 보잘 것도 없고.”

 “아니네. 무척이나 아름다워.”


 망설임 없이 쏟아지는 칭찬에 럼로우도 픽 웃고 말았다. 그런 말은 당신에게나 쓰는거구요. 럼로우의 대꾸에도 스티브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눈에는 자네가 가장 예쁘게 보이네.”

 “…저 같은 아저씨가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흠, 미처 몰랐는데 말이죠.”

 “진심일세!”

 “그러시겠죠.”


 거짓으로 칭찬할만한 사람은 아니니까. 오히려 한가득 진심인 쪽이 더 민망했다. 럼로우는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일부러 아이를 바투 끌어안았다. 스티브는 뭔가에 집중하는 것처럼 미간을 좁히느라 그런 럼로우를 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아이는 생각보다도 더 나를 닮은 것 같네.”

 “어떤 부분이요? 외모는 아니겠고, 뭐 좋아하는 거라도 같답니까?”


 럼로우는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에 스티브는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잘만 이야기하다 입술을 꾹 다문 스티브가 의아해 럼로우가 그를 보았다. 그의 뺨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뭐길래 그럽니까.”


 눈치 빠른 럼로우가 스티브의 생각을 모를 리 없었다. 그가 얼굴을 붉힌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스티브의 시선이 럼로우의 품에 안겨 쌔근쌔근 잠이 든 아이의 포동포동한 얼굴을 향해 있었다. 럼로우는 아이가 흔들리지 않도록 살짝만 웃었다.


 “캡틴 아메리카가 자기 자식을 질투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놀리지 말게!”

 “놀리는 거 아니고 사실을 말하는 건데요.”


 그 말에 스티브의 얼굴이 더 붉게 타올랐다. 럼로우는 낄낄 웃으며 팔을 뻗었다. 그러곤 조심히 스티브를 제게로 당겨 안았다. 스티브는 그 사이 다시 키도 커지고 근육도 생겨 품에 꼭 들어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안을 만큼은 되었다. 이렇게 셋이 한 번에 안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잘도 자고 있었다.


 “스티브.”

 “왜 부르나.”

 “엄청 늦었는데, 사실 돌아오면 당장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요.”

 “말해보게.”


 으음. 럼로우는 곤란한 듯 눈을 굴렸다.


 “그런데 준비했던 걸 거기서 잃어버려서. 뭐, 약간은 초라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들어주십쇼.”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진지한 눈으로 스티브를 보았다. 늘 여유로운 미소가 자리하는 만큼 보기 드문 얼굴이었다. 스티브는 홀린 듯 럼로우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결혼합시다.”

 “……브룩?”


 생각도 못한 말에 스티브가 눈을 크게 떴다. 럼로우는 민망한 듯 입술 끝만 올린 채 볼을 긁적였다. 저 역시 살면서 이런 말을 입에 담을 줄은, 미처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것도 임무나 잠입을 위해 거짓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고 온전한 진심을 담아서. 그렇지만 다녀오겠다며 떠나기 전 스티브의 입술에 키스했을 때부터 럼로우는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돌아 오고나면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말해야겠다고.


 놀란 스티브가 어벙한 상태로 입술만 달싹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질 않았다. 그러나 싫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꽃이 몽글몽글 차오르는 것처럼 이미 기분이 하늘 위로 들뜨고 있었다. 그런데도 쩍 굳은 채 말을 하지 못하는 스티브를 보며 럼로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대답 안해 줄 겁니까?”

 “어, 어어…… 당연히! 당연히 받아들이겠네! 그보다 자네, 다시 한 번….”


 쯧쯔. 럼로우가 스티브의 입술을 검지 손으로 톡 막고는 고개를 저었다.


 “두 번은 안 말해요, 캡.”

 “…그, 그런 게 어디 있나! 다시 한 번 말해주게.”

 “됐습니다.”


 스티브의 눈이 아쉬운 듯 처졌지만 럼로우는 다시 말해주지 않고 오히려 말을 돌려버렸다. 스티브가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퍽 귀여워 조금 더 눈에 담고 싶었다. 럼로우는 새삼 나타샤가 왜 그렇게 스티브를 놀리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뭐, 그전부터 저도 만만찮게 스티브를 놀려주고는 있었지만.


 “그보다 아이 이름이나 빨리 정하죠. 아직 이름도 없지 않습니까.”

 “말 돌리지 말게, 브룩. 하지만, 음, 그건 맞는 말이지. 아이 이름은 나 혼자만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혹시 생각해둔 거라도 있나?”

 “아뇨. 그런 건 없는데….”


 고개를 저은 럼로우의 말에 여지가 있는 것 같아 스티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럼로우는 스티브의 부스스한 머리를 한껏 헤집으며 씩 웃었다.


 “하지만 럼로우로 끝났으면 좋겠네요.”


 곧 스티브의 얼굴이 터질듯 붉어졌다. 럼로우는 그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스티브가 놀라 브룩! 하고 외치는 소리에 아이가 놀란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칭얼거리더니 결국 빽 울기 시작한 아이를 달래며 럼로우가 킥킥 웃었다.


 “아이를 울리면 어떡합니까.”

 “아니, 이건, 자네가….”

 “제 탓 하지 마십쇼, 캡. 당신 소리에 시끄러워 깬 거라구요.”


 저를 놀리는 말에도 반박하지 못하고 스티브가 억울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럼로우는 울기 시작한 아이의 뺨을 비비적거리며 그를 달래느라 바빴다. 아빠를 퍽 좋아하는 아이답게 칭얼거리던 소리가 금세 잦아들었다. 아이의 얼굴에 뽀뽀를 퍼붓는 럼로우에 스티브의 마음도 금세 포근해졌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있을 수만 있다면, 럼로우가 이런 식으로 저를 놀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시 재워야 하니 이리 내놓게.”

 “제가 재우는 편이 훨씬 나을 걸요?”

 “그게 아니고 눕혀야 한다는 말이네!”


 큭큭 웃던 럼로우가 곧 아이를 스티브에게 넘겨주었다. 럼로우는 뒤에서부터 그를 끌어안고선 스티브의 드러난 뒷덜미에 입술을 찍었다.


 “우리도 오랜만에 같이 좀 잡시다.”


 럼로우도 계속 병실에 있던 터라 한 침대에 누운 기억이 벌써 까마득했다. 스티브는 귓가에 소근 거리는 낮은 목소리에 놀라 몸을 굳혔다.


 “아, 아직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무리하지 말라고, 그렇게 들었네.”

 “…캡,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겁니까? 전 그냥 같이 자자고만 한 건데요.”


 또 당했다는 생각에 스티브의 뒷목이 뜨끈해졌다. 럼로우는 소리 내어 크게 웃고선 그런 스티브를 조금 더 당겨 안았다.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던 스티브도 곧 제 뒷목을 자꾸 간질이는 입술에 푸흐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여느 때처럼 평범한,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