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자크, 굳이 끝까지 싸우지 않아도 돼. 이미 상처로 엉망이잖아.”
“괜찮으니까 계속 싸우게 해줘.”
언뜻 보기에도 아이자크의 상태는 괜찮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나, 서늘할 정도로 빛나는 푸른 눈을 보니 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자크는 더 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 눈 앞의 괴물을 마주했다. 꽤 크게 베인 아이자크의 팔뚝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으나 정작 본인은 조금의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살짝 떨어진 뒷 편에 서있던 프리드리히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이자크의 뒷모습은 단단했으나 어쩐지 아슬아슬해보였다.
“지시자, 이대로 둬도 괜찮은거야?”
슬쩍 다가온 프리드리히가 조심스레 물었다. 프리드리히와 같은 심정이었으나 본인이 고집을 꺾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었다. 자기가 괜찮다는데 뭐. 작은 한숨이 섞인 대답에 프리드리히도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이라도 건네주고 싶었으나 귀에 들리지 않을게 뻔했다.
짜릿하게 머리 끝까지 타고 오르는 통증을 억지로 꾹 눌러낸 아이자크가 잽싸게 검을 휘둘렀다. 단번에 코 앞까지 치고 들어간 아이자크가 미처 방어하지 못한 상체를 크게 베어내렸다. 아이자크의 얼굴과 군복은 물론이고, 사방에 더럽고 칙칙한 피가 튀었으나 이를 내려다보는 아이자크의 눈동자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온 몸을 뜨겁게 달구는 아픔도, 눈 앞에 쓰러진 흉측한 괴물도, 뒤에서 저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모두 아이자크에게 별다른 느낌을 심어주지 못했다. 아이자크의 피부 깊숙히 스며드는 것은 오로지 단 한 사람의 부재, 그 뿐이었다.
피가 흐르는 팔뚝을 조심히 건드리자 아이자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치료하자는 말에도 아이자크는 대꾸없이 상처 부위를 꾹 누르기만 했다. 이깟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입이 아닌 눈으로 말한 아이자크가 검을 고쳐쥐었다. 칼 끝에 맺혀있는 피를 대충 닦아내는 아이자크는 무심해보였고, 또 덧없어보였다.
“너 이러다 진짜 죽어.”
걱정 어린 말이었으나 아이자크는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
불안정한 기억의 틈새에서 너를 찾아헤맨다. 끝이 정해져있는 이 기억의 파편 속에서 너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보면, 늘 그 곳엔 네가 있었으니까. 우리가 얼마 전까지 그러했듯이 말이다. 네가 없다는 것이 바로 전의 일 같기도 하고, 아득히 먼 추억의 끄트머리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직도 익숙하지 못한 감각이 내 폐부를 들쑤셔놓는다. 내가 이 곳에 있는데, 너는 없다는 그 단순하고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 천천히 나를 옭매어간다.
너의 마지막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네겐 어떤 느낌이었을지. 내 마지막을 너와 함께 보낼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텐데. 그저 나는 네 곁에 있기만 한다면, 그 곳이 어디라도 중요치 않은데. 너와 나를 가로막은 이 단단한 지면이 너무도 견고해서 나는 손을 뻗는 것 조차 할 수 없다. 쌓이는 한숨만이 네 곁을 맴돌다 스러져갈 뿐.
혹시 누군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
“생일 축하해, 아이자크!”
제법 산뜻한 얼굴로 축하의 말을 건네자 아이자크가 어정쩡하게 웃어보였다. 저를 향한 축하의 인사마저 무시하긴 어려웠던 모양인지, 가까스로 올린 입꼬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그걸 모를 리 없었으나 애써 무시하며 다들 가슴에 와닿지도 않는 인사를 전했다.
이 곳에서 처음 눈을 뜬 이후로, 그리고 바다 속에 잠겨있던 기억들을 하나 둘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 뒤로, 무수히 많은 시간이 흘렀으나 오늘은 그 중에서도 특별한 날이었다. 에바리스트 없이 아이자크 혼자 맞이 한 생일은 처음이었으니. 선명하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보면 단 둘이 생일을 보낸 적도 있었으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는 지금보다 행복했던 것만은 분명했다. 아이자크는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헤치고 걸음을 옮겼다.
“지시자. 받고 싶은 선물이 있어.”
교체 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며 고집을 피우던 것 외에는 처음 꺼내보는 부탁이었다.
“뭔데?”
“죽고 싶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떨어진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기도, 예상했던 것이기도 했다.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옴짝거리고 있자 아이자크가 한 쪽 눈을 접으며 작게 웃었다. 그 사이로 아이자크의 무수한 감정이 가득 들어찼다.
“에바의 곁으로 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