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준비하는 무대도 없고 별다른 시험이 있는 것도 아니라 제법 한가한 날이었다. 미츠루는 여전히 날아갈 듯 신난 얼굴로 학교를 질주했고 하지메는 정성스레 홍차를 우렸다. 나즈나는 방송 대본을 위해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저마다 할 일로 바쁜 가운데 유일하게 토모야만이 따분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틈에 춤이나 노래 연습을 바짝 해둘까 싶었지만, 그것도 일주일이나 반복되니 슬슬 지루해지던 참이었다. 토모야는 제가 계속 부장 옆에 있다 보니 그 성향을 닮아간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똑같이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에 부족함이라곤 없을 텐데.
혹시 호쿠토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간 연극부실엔 아무도 없었다. 결코 부장 때문에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토모야는 텅 빈 부실을 죽 훑다가 책상 위에 놓인 얇은 대본을 발견했다. 처음 보는 대본이었지만 무엇일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연극부 부장은 무료함과 정반대에 서있는 사람이었으니 필시 히비키 와타루의 소일거리일 터였다. 사실 와타루에겐 대본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몇 번 본 것만으로도 모든 대사를 모조리 외워버렸고, 심지어 더 그럴듯하게 머릿속으로 각색까지 했으니까. 토모야는 그런 그가 얄밉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조금 멋있다고도 생각했다. 다소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덤이었다. 물론 당사자 앞에서 이런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토모야는 별 생각 없이 대본을 집어 들었다. 토모야도 제법 좋아하는 작품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지난 번에 와타루 역시 스쳐지나가듯 이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변태 가면과 똑같은 취향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겼지만 분명 토모야가 몇 번이고 볼 정도로 마음에 들어했던 작품이었다. 당연하게도 호기심이 일었다. 연극부에 속한 이상 토모야도 이런 종류의 호기심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언뜻 본다면 호러처럼 느껴질 기괴한 제목의 표지를 넘기자 토모야에게도 익숙한 대사들이 튀어나왔다. 과장된 제스처와 실제론 쓰지 않는 말투의 향연이었다.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었지만 토모야는 오히려 그런 점들이 좋았다. 와타루가 이것을 연기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꼭 어울릴 터였다. 토모야가 그리 생각하며 대본을 다시 덮으려던 때였다.
“그래요, 일상의 따분함이란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자 죄악이나 다름 없죠!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토모야군.”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곳에서 불쑥 와타루가 나타났다. 화들짝 놀란 토모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와타루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어디서 또 무얼 하고 왔는지 그의 손에는 화려한 가면이 들려 있었다.
“역시 당신도 이 작품을 좋아하고 있었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제목을 보자마자 경악하기 마련인데 말이죠.”
와타루는 토모야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대본을 흘끗 바라보고선 중얼거렸다. 토모야가 제법 눈을 빛내며 흥미롭게 살피던 일을 지켜보고 있던 것이 틀림 없었다. 토모야는 괜히 다른 곳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했다. 토모야의 시선은 정신없이 반짝이는 가면을 지나 와타루의 어깨 부근에 멈추었다. 또 모자 속에서 비둘기를 불러내는 마술이라도 했는지 그의 어깨에 하얀 날개가 붙어 있었다. 의도한 것이 아님에도 와타루에게는 장신구처럼 잘 어울렸다. 토모야는 겨우 시선을 떼내며 말을 돌렸다.
“그 가면은 또 뭔가요.”
“예상했겠지만 별 거 아닌 여흥거리였답니다.”
들고 있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자 들어본 적도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도 봐서 이제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 토모야가 영 반응이 없자 와타루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시 가면을 치웠다.
“슬픈 일입니다. 당신의 반응이 고작 이 정도라니! 그보다 더 슬픈 일은 정말로 여흥거리에 불과했다는 거지요. 벌써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
정말로 힘이 나지 않는지 와타루의 양 어깨가 아래로 축 처져있었다. 토모야는 그 어깨에 붙은 깃털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와타루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깜짝 놀란 토모야가 비명을 지르며 와타루를 밀쳐냈다.
“우와악!”
“그래요, 이런 생기 있는 반응! 이런 것들이 필요한 상황이지요.”
“무슨 짓이야, 이 변태 가면!”
당황한 토모야의 양 뺨이 발갛게 상기됐다. 투덜거리는 토모야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와타루는 조금 전처럼 슬픈 연기를 이어갔다.
“놀랍게도 저도 당신과 같은 상황이랍니다. 무척이나 심심한 하루가 계속되고 있죠.”
결국엔 심심해서 미칠 것 같다는 말이었다. 토모야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래서 이 사람은 내가 지루해하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따위의 생각을 했다. 와타루는 조금 전의 우울한 기색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갔다. 와타루가 팔을 뻗을 때마다 그의 뒤에서 망토가 펄럭거렸다.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그런 단어들과는 연이 없는 존재 아니겠나요? 그래서 소소하지만 즐거운 무대를 살짝 준비하고 있답니다.”
“그렇게 갑자기 무대를 준비해도 되는 건가요?”
“이 히비키 와타루에게 불가능이란 없는 법!”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를 텐데….”
와타루는 걱정 말라는 듯 허리에 양 손을 척 올리고선 여유롭게 웃었다.
“제가 무대에 올라가는 그 순간부터 오가는 사람들 모두 그 앞에 멈추고선 박수 갈채를 날리겠지요.”
당당한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의 얼굴 표정에서부터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토모야는 또 그런 와타루가 살짝 재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에겐 정말로 그러한 힘이 있었으니까. 토모야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평소라면 와타루가 그렇게 하든 말든 알아서 잘 해보라며 지나쳤을 토모야였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토모야는 지금 답지 않게 심심해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눈앞의 남자가 꼭 지금처럼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에 나타나 정신을 어지럽히던 때이기도 했다.
그 이유를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님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일까. 토모야는 답을 조금 뒤로 미루고선 지금은 우선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몰래 본 건 죄송하지만 이 대본, 보니까 나오는 인물이 두 명이던데.”
“이런. 당신과 같은 기준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제게 두 가지 역할 정도야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도 가끔은 남들과 같이 무대에 서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
토모야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받아쳤다. 곧장 말을 이으려던 와타루가 잠시 입을 다물고 자그마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와타루는 그 미묘하게 흐트러진 표정을 모를 정도로 섬세하지 못한 남자가 아니었다. 와타루의 입매가 기분 좋게 호선을 그렸다.
“이거 놀라운 일이군요. 설마 토모야군이 저와 같이 무대에 서고 싶어하다니. 이건 연극부의 이름을 내걸고 하는 일이 아니랍니다?”
“누가 그걸 몰라요? 그냥… 아까 부장도 말했잖아요. 우리는 같은 상황이라고.”
지겹고, 따분하고, 그래서 생기 있는 일을 바라던 순간. 와타루는 그런 토모야가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이 제안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혼자 하는 것보다 오히려 이편이 더 재미있을 것만 같았다.
“토모야군과 단 둘이라니! 정말 생각도 못해본 일입니다. 그야말로 어메이징하군요. 역시 세상은 앞으로도 놀랄 일이 가득하네요.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싫다는 말이에요?”
“아뇨, 좋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토모야군과 함께라니, 걱정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좋아요! 저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만 같군요.”
와타루가 빙그르르 돌며 가볍게 대답했다. 토모야는 그 정신 사나운 움직임을 눈으로 계속 좇으며 물었다.
“언제 하려던 생각이었는데요?”
“바로 내일입니다.”
“……내일?”
답이 떨어지자마자 토모야가 입을 쩍 벌렸다. 예상도 못한 답이었다. 와타루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토모야는 저 얄미운 볼을 양옆으로 주욱 늘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실수로라도 닿아본 적 없는 뺨이었지만.
“그야 저 혼자만의 무대일 예정이었으니까요. 재미난 일이군요.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 생겼는데 불안한 구석은 몇 배로 늘었다니!”
와타루는 벌써부터 연기를 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턴을 돌아 자리에 가 섰다. 그 사이에 대본을 집어 토모야의 손에 넘겨주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지체없이 대사를 시작했다. 서둘러 대본을 펼쳐 본 토모야의 눈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첫 대사였다. 처음부터 막힘없이 술술 이어진 대사는 와타루가 맡은 역할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다음을 위해 나름대로 준비하던 토모야의 입이 열리는 것을 가로막고 와타루가 상대역까지 모두 연기를 이어갔다. 물 흐르듯 매끄러우면서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목소리며 표정, 연기, 그 무엇하나 흠잡을 구석 없이 완벽했지만 토모야는 그런 와타루를 제지했다. 분명 제 역할이어야 할 부분이었다.
“아직 완벽하게 숙지한 상태가 아닐텐데요. 우선은 저의 이 완벽한 호흡을 봐 주세요! 물론 토모야군에게 이 정도의 능숙함을 바라고 있지는 않답니다.”
토모야가 여전히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이자 와타루가 가벼히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평범해요. 저와 동등한 곳에 서는 일은 아마 평생 무리일테지요. 지금도 저를 이렇게 올려다보고 있지 않습니까?”
악의를 담아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토모야에게는 충분히 거슬릴만한 말이었다. 한쪽 눈썹을 찡그린 토모야가 와타루를 확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와타루가 비틀거리자 토모야가 양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꽉 눌렀다. 그 덕에 와타루의 무릎이 바닥에 닿고 말았다. 늘 생글생글 웃고 있던 얼굴에 살짝 당황이 서렸다. 그 표정이 생각보다도 보기 좋아 토모야가 시원스레 웃었다.
“이렇게 하면 눈높이는 똑같거든요?”
와타루의 눈앞에 토모야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칼 아래로 곧은 눈동자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아직 어리숙하고, 미숙하고, 또 그만큼 서툴지만 제법 강직해보이는 모습이었다.
“……말은 끝까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이것과 반대로, 당신이 상자 위에 올라가면 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진지하게 말하는 듯 보였던 와타루의 말끝에 웃음이 섞였다. 누가 봐도 놀리는 듯한 어투에 토모야가 다시 불퉁한 얼굴을 했다. 어쩐지 자주 보던 그 얼굴이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 와타루는 그의 머리를 흩뜨리는 대신 뻗은 팔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물론 농담입니다. 그런 게 없어도 무대는 완벽하게 만들어보일 예정이에요. 설마, 제게 무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후후, 와타루가 즐겁게 웃었다. 평소보다도 더욱 높고 쾌활한 웃음소리였다.
“그래요. 바로……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입니다!”
지겨울 정도로 자주 듣는 말이었다. 토모야는 가벼운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소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 대사였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란 점을 토모야 스스로는 물론이고 와타루 역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 호칭도 진짜 이상한 거 아시죠.”
“그럼 토모야군이 원하는 수식은 무엇인지?”
답지 않게 망설이는 동그란 머리통을 와타루는 사랑을 듬뿍 담아 내려다보았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앞머리 아래로 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져있었다.
“……당신만의 히비키 와타루.”
조금은 예상 외의 답변에 와타루는 눈을 동그랗게 떠보았다. 허나 그 표정은 곧 즐거운 웃음으로 변했다. 소년의 붉어진 뺨이나 퍽 낯설게 느껴지는 그 답이 제법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런, 토모야군은 욕심쟁이로군요.”
“…그래서 별로인가요?”
“아뇨. 전 욕심쟁이를 좋아한답니다. 벅찰 정도로 많은 것을 원하며 바둥거리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지 않나요?”
토모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언제나 느끼는 거였지만 와타루의 말은 단번에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전 보다 더 많은, 보다 더 큰 사랑을 원하는 몸이라 당신에게는 그 역할이 힘들 것 같군요. 토모야군은 너무도 평범해서 몇 만 명 분의 사랑을 제게 줄 수 없어 보이니까요.”
“그런건 해봐야 아는거 아닌가요?”
“당신보다 몇 겹이나 더 오래 살아온 저는 더 많은 경험을 했답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요.”
토모야는 지지 않고 받아쳤다. 와타루의 눈매가 조금 더 크게 휘었다. 표정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웠다. 한없이 작으면서, 별다른 특별함을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늘 정면으로 맞서오는 소년은 자주 와타루를 웃게 만들었다. 늘 그가 만면에 가득 담고 다니는 미소와는 다른 종류의 웃음이었다.
“삶이 조금은 지겨운 참이었으니, 색다른 시도를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부디 절 즐겁게 해주시길.”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 영원해보이는 그 어떤 것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부서지기 마련이었다. 와타루는 그런 것들을 끊임없이 지켜보았고, 때로는 직접 겪기도 했다. 말을 하는 것이 피곤할 정도로 우울에 잠긴 적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꼭 그만큼의 세월을 더 오래 보내면서 와타루는 적당한 답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어차피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면 그 짧은 순간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삶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덧없이 흘러가 곧 한줌의 추억이 되어버릴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와타루는 생긋 웃으며 토모야를 바라보았다. 투덜거리느라 비죽 튀어나온 작은 입술이 귀여웠다. 와타루는 연기를 이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 그리고 평범하다는 말은 혼자 쓸 수 없는 거예요.”
다시 대본을 집어들며 토모야가 와타루의 등을 향해 대뜸 말을 꺼냈다.
“모두가 특별하면, 결국엔 그게 평범한게 되니까. 결국 그 둘은 서로 함께하는 거라고… 부장?”
토모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와타루가 재빨리 소년의 손을 잡아왔다. 분명 저보다 조금은 작지만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은 손이었다. 제가 꺼낸 말, 갑작스러운 스킨십, 어느 쪽에 놀란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소년은 곱게 물이 들어 있었다.
“아아, 정말 즐겁네요. 100년을 지루하게 살았어도 남은 1년이 그것을 뛰어넘을 정도로 즐거울 수 있다니!”
몸서리치듯 말하며 와타루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환희에 가득 찬 그의 얼굴이 정말로 반짝이고 있어 토모야는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남은 1년을 잘 부탁드려요, 토모야군.”
그것이 정말 1년으로 끝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토모야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