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 2.5D NOTICE GUEST

시빌워 스포 있음

*


 침대는 두 개였지만 방은 하나였다. 트찰라는 원한다면 다른 방을 주겠다고 말했으나 스티브는 거절했다. 버키는 조금 신경 쓰이는 눈치였지만 별 말 하지는 않았다. 스티브는 버키가 왜 잠깐이나마 망설였는지 알고 있었기에 더 같이 지내고 싶었다. 버키 역시 스티브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지라 토를 달지는 않았다.


 “불편하지는 않아?”


 짐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을 정리하며 스티브가 물었다. 버키는 제 뜯겨진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강제로 쥐어뜯긴지라 끝부분이 정리되지 못해 여전히 날카로웠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묘했다. 엄연히 저와 연결된 금속이었으나 자신의 팔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래도 막상 팔이 없으니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버키는 반이 날아간 붉은 별을 보며 대답했다.


 “딱히 거슬리지는 않아.”

 “가져올 걸 그랬을까?”

 “됐어.”


 그 팔을 굳이 다시 달고 싶지는 않았다. 스티브는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부탁한다면 간단한 의수라도 팔에 달아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버키는 그것까지 거절했다.


 “정리나 좀 해야겠어. 안다가 찔리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건드리면 짜릿하고 전기가 오를 것만 같은 처참한 끝부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스티브가 옅게 웃었다.


 “안아준다고 한 적 없어, 버키.”

 “내가 안으면 돼.”


 버키는 넉살 좋게 웃으며 양 팔을 벌렸다. 그래봤자 한쪽은 둥그렇게 남은 어깨만이 살짝 위로 올라갔을 뿐이었지만. 스티브는 못 말리겠단 얼굴이었다. 속이야 어떻든 겉으론 태연한 척 구는 것이 예전과 똑같아서였다. 그리고 스티브의 이런 생각은 언제나 버키가 스티브를 바라보며 갖던 감상이기도 했다.


 스티브는 조심히 다가가 버키를 안았다. 흙먼지로 잔뜩 더러워진 옷에, 아직 상처가 남은 몰골이었지만 그래도 품은 따뜻했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러고 서있었다.


 “그럼 좀 갔다 올게. 넌 씻고 있어.”


 한참 뒤에 몸을 떼어 낸 버키가 방을 나서며 말했다. 버키는 트찰라가 미리 말해두었던 방으로 향했다. 방이라기 보단 치료실에 가까운 곳이었다. 실은 버키와 스티브 모두 이곳에서 상처를 간단하게나마 치료하란 말을 들었지만 둘은 거절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을 상처였다. 이렇게 도움을 받는 것부터가 매우 고맙고 미안한 일이었다. 버키는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버키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바로 다가왔다. 그는 곧 버키의 잘린 왼팔 끝을 자르고 가다듬어 깔끔하게 정리했다. 마무리로 어두운 색의 마스크 같은 것을 그 끝에 씌웠다.


 “혹시 불편한가요?”

 “아뇨.”


 버키가 팔을 두어 바퀴 돌리며 대답했다. 어색하긴 했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젠 이것에도 익숙해져야겠지. 워낙 사건사고가 많은 삶이었으니 이 정도는 금방 익숙해질 터였다. 버키는 짧게 감사 인사를 건네곤 다시 스티브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은 벌써 저녁을 훌쩍 지나가있었다. 둘 다 입맛이 없어 따로 식사를 하진 않았다. 버키는 가볍게 몸을 풀었고, 스티브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여전히 둘은 말이 없었다.


 그렇게 별 의미도 없이 하루를 보내고 둘은 다소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각자 침대를 하나씩이나 차지하고 누웠지만 잠이 쉽게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 쪽도 입을 열지는 않아서 둘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흘렀다. 정확히 얼마만큼이 지났는지는 몰라도 그 사이 하늘이 더욱 어두워진 것만은 확실했다. 창문 너머로 슬며시 들어오던 달빛도 어느 샌가 사라지고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스티브는 번쩍 눈을 떴다. 잠에서 깬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잠에 들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스티브는 미동도 없이 누운 채로 눈만 뜨고 있었다. 그리고 버키도 마찬가지였다.


 “안 자?”

 “너야말로.”


 둘은 그저 침대에 누워 멀뚱히 천장만 바라 볼 뿐이었다. 밤은 깊어진 지 오래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새벽이 될 터였다. 그럼에도 둘은 잠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잠들지 못했다. 생각할 것이 많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저 습관 때문이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피곤한 날이 아니고서야 이 정도로 밤을 지새우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둘은 서로가 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잠들지 못하는 밤. 어느덧 일상처럼 익숙해진 부분이었다. 그리고 둘은 더 나아가 서로가 악몽을 꾸고 있다는 것까지 짐작했다. 잠이 들 때면 찾아오는 악몽은 기나긴 밤을 더욱 길게 만들었고, 깊은 상처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리고 차마 전할 수 없는 말은 어두운 심연에 잠겼다. 허공을 향해 닿지 않을 이름을 부른 밤이 얼마였던가.


 오늘도 밤은 고요했다. 그러나 어느 쪽에서도 쌔근거리는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어지는 침묵을 깬 것은 스티브였다.


 “버키, 샘이 몰래 말했는데 네 복장이 너무 그렇대.”

 “내가 스티브한테 패션으로 지적을 당하는 날이 오다니.”


 버키는 진심으로 충격 받은 듯 중얼거렸다. 스티브가 작게 웃었다.


 “사실 난 잘 모르겠어. 근데 그 가방은 좀 낡은 것 같더라.”

 “네가 그 때 고집하던 촌스러운 티셔츠 보다는 나아.”

 “그건 안 촌스러웠어.”

 “그래, 그렇게 말하는 건 너 뿐이었지.”


 둘 모두 자연스레 옛날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원래도 옷이 몇 벌 없는 처지이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스티브가 유독 좋아라하던 티셔츠가 있었다. 그리고 버키의 관점에서 그 옷은 누가 줘도 입지 말아야 할 수준의 옷이었다. 버키는 입이 닳도록 그 옷이 별로라고, 차라리 내가 한 벌 사주겠다고 말했으나 스티브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버키가 그럴수록 그 괴이한 옷에 집착하는 바람에 나중엔 버키가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옷 결국엔 찢어져서 버렸잖아. 다시 생각해도 일부러 그랬지?”

 “그럴 리가. 거기 우연히 울타리가 있었을 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옷을 입고 다니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짓이었어.”

 “너라고 매번 옷을 잘 입었던 건 아니잖아!”

 “오, 아닌데. 내가 받은 편지엔 늘 제임스는 패션이 멋지다는 말이 있었어.”


 제 입으로 말하고도 부끄럽지 않은지 버키는 당당했다. 스티브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거기엔 장난 편지도 많이 있었잖아.”


 버키는 확실히 인기가 많아 연애편지를 많이 받는 편이었지만 그 전부가 진짜인 것은 아니었다. 종종 짓궂은 버키의 친구들이 그 편지 속에 장난을 섞기도 했다. 한번은 설레는 마음으로 머리를 정리하고 옷도 단정히 차려입고 나간 자리에 웬 아저씨가 서있기도 했었다. 그 날은 버키가 스티브와 사소한 일로 또 다투었던 날이라 버키는 비꼬듯 오늘 있을 데이트를 한껏 자랑한 뒤기도 했다. 버키는 차마 그 데이트가 거짓이었다고 말할 수가 없어 서성거리며 근처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혼자 영화관에 갔다가 역시나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스티브를 만났다. 입을 쩍 벌린 버키의 얼굴이 민망함에 붉어지는 것을 보고 스티브는 흐느끼듯 웃음을 토했더랬다. 그 생각을 하자 또 웃음이 나와서 스티브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버키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우리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일은 다 잊어버렸다고 하지 않았어?”

 “원래 빌어먹을 기억은 더 오래 가는 법이야. 젠장.”


 괜히 말을 꺼냈다고 생각하며 버키가 툴툴거렸다.


 “그래도 난 그 날 좋았어. 결국 영화 같이 봤잖아.”

 “끝나고 밥도 먹었지.”

 “비도 왔던 것 같은데.”

 “맞아. 그리고 우린 우산이 없었지. 넌 다음 날 내내 앓았고 말이야.”

 “……하루 종일은 아니었어.”

 “그래, 열두시 전에 눈을 뜨기는 했으니까.”


 이번에는 스티브가 반박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희미했던 기억이 대화를 통해 더 선명하고 또렷해졌다. 비가 온 것도, 우산을 들고 있지 않았던 것도 모두 제 잘못은 아니지만 버키는 늘 그렇듯 스티브에게 사과했다. 스티브는 언제나처럼 푸스스 웃었다. “버키, 네가 비까지 조종하는 줄은 몰랐어.” 다 쉬어 빠진 목소리로 열에 헐떡이면서도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스티브의 손을 꽉 붙잡으며 버키도 작게 웃고 말았다. 버키가 건네주는 약을 먹은 스티브는 오래도록 잠이 들었다. 잠을 자는 중에도 호흡이 돌연 거칠어지거나 갑자기 땀이 비오듯 흘러서 버키는 그 곁을 떠나지 못했다. 무의식중에도 스티브는 단단히 붙잡은 버키의 손을 놓지 않았다. 버키도 놓을 생각은 없었다. 딱 스티브가 누우면 다 들어찰 정도로 작고 헐거운 침대에 대충 기대어 앉은 채 버키는 자정이 다 되도록 스티브를 지켰다.


 어차피 평소에도 골골 거리던 몸이라 이렇게 한 번 호되게 아프고 나면 도리어 개운한 느낌마저 들었다. 몸은 여전히 축 늘어지고 힘이 없었지만 정신만큼은 더 맑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스티브는 정말 괜찮았지만 버키는 그렇지 않았다. 언젠가 스티브에게도 호들갑 떨며 말했던 그 예쁜 미인이 데이트 신청을 해왔음에도 단호히 거절한 버키는 대신 스티브와 같이 있는 것을 택했다. 제가 심하게 아프고 난 뒤에는 며칠 동안 버키가 더욱 신경 쓴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익숙해졌다고 해서 민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 스티브는 그런 버키를 밀어냈다. “이젠 멀쩡하니까 가서 데이트나 해.” 버키는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또 데이트하자고 할 텐데 뭘.”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냐고 타박하면서도 스티브는 그냥 웃고 말았다. 자신을 건들면 깨어지는 유리처럼 취급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어머니는 일이 바빠져서 며칠이나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내일은 단호하게 말해서 돌려보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못 이기는 척 버키를 집으로 들였다.


 “그래서 그 뒤에 데이트는 했었어?”

 “아니. 내가 거절한 게 자존심 상했는지 다시 말 걸진 않더라고.”

 “그야 당연하지. 제임스 뷰캐넌 반즈 주제에 그런 미인을 거절이나 하고.”

 “괜찮아. 대신 어떤 브루클린 꼬맹이를 낚았거든.”


 장난기 서려 있던 스티브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누가 낚였다고 그래?”

 “벌써 백년이 다 되어가는데.”

 “착각이야.”

 “부끄러워하기는.”

 “정말 백년은 아니야.”

 “알겠어.”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던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화제는 또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같이 몰래 여행을 갔던 일이나, 스티브가 오기 때문에 넉넉한 옷을 사 입었다가 푹 파묻혔던 일, 잘난 척 하던 버키가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던 일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렇게 둘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밤새 끊이질 않았다.


 여전히 잠들 수는 없는 밤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처럼 힘들거나 외롭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둘은 충분히 위안이 되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