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 2.5D NOTICE GUEST

 얼굴을 알아볼 이가 많지는 않다 하더라도 숨어 지내는 이상 함부로 돌아다니기는 어려웠다. 스티브는 행여 버키가 답답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리고 그런 시선이 제 뺨에 닿을 때면 버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랜만에 둘이 같이 보내고 좋지 뭐.”


 전혀 개운하지 못한 얼굴로 버키가 중얼거렸다. 같이 있는 시간이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워낙 일이 많았으니 아직도 신경 쓰이는 것이 많아서였다. 그건 스티브나 버키 둘 모두 마찬가지였다. 스티브는 조금 망설이다 이내 버키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먼저 안기도 하고 웬일이야.”

 “이젠 내가 안아도 품이 넉넉하거든.”


 버키는 픽 웃고 말았다. 민소매를 입고 있던 터라 버키의 어깨 끝자락에 닿은 피부가 차가웠다. 스티브의 시선이 한동안 그 왼팔에 머물렀다. 그 위에 그려진 반만 남은 별 모양이 아프게만 느껴졌다. 버키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와 별반 다를 것 없다고 추측하면서 스티브가 버키의 뒷머리에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버키. 괜찮아.”


 스티브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과도 같았다. 버키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괜찮지, 스티브.”

 “버키.”

 “내가 괜찮아서도 안 되고.”


 버키는 제 목덜미를 두르고 있는 스티브의 팔을 풀어냈다. 빙글 몸을 돌려 스티브를 정면으로 마주한 버키의 입가에 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네가 원해서 그랬던 일이 아니잖아.”


 스티브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나 버키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스티브도 이런 말 하나로 끝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말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지금은 버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버키가 느끼는 무게를 제가 짊어지고도 싶었다.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버키가 절대 넘겨줄 리는 없지만서도.


 버키는 또 원치 않는 상황이 생길 것 같아 두려웠다. 그건 자의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키워드 몇 개를 줄줄 읊는 것만으로 자기 통제권을 상실해버린다. 그리고 정신이 깨어나는 순간, 버키는 제가 했던 모든 일을 기억했다. 자신의 손아래에서 죽어가던 모든 이를 떠올렸고 그들이 어떤 눈으로 저를 쳐다봤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그들은 가끔 어두운 밤이면 버키를 찾아들어오기도 했다. 끔찍한 비명, 코를 찌르는 비린내, 처절한 몸짓이 아른거리며 버키에게 절망을 속삭였다. 버키는 스티브를 등지고 일어섰다.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어.”


 간절한 외침이었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스티브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망가진 만큼, 다시 회복 하는데 꼭 그만큼의 혹은 더한 시간이 들 터였다. 그렇게 하더라도 완전히 정상이 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문득 어둠이 내리던 그 어느 날 밤 버키가 스티브를 붙잡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스티브는 안고 있던 온갖 병이 충돌이라도 일으켰는지 며칠 동안 생사를 넘나들었다. 간신히 눈을 뜬 스티브를 보고 버키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애원했다. “조금 큰 병원으로 가보자. 고칠 수도 있어.” 그리고 스티브가 했던 답이 이번에는 버키의 입술에 걸렸다.


 “내 일은 내가 더 잘 알아, 스티브.”


 버키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스티브는 잡지 못했다.


 그를 기다리며 스티브는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필요한 게 없냐는 물음에 버키가 부탁한 거였다. 버키는 그림과 거리가 멀었기에 스티브는 그게 누굴 위한 부탁인지 잘 알았다. 스티브는 괜찮다고 재차 말했지만 버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건 질문을 한 쪽도 마찬가지였는지 얼마 뒤 방엔 간소한 그림 도구가 생겼다. 이왕 생긴 것을 먼지만 쌓이게 두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스티브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간단한 그림을 그렸다. 의외로 시간이 잘 가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스티브가 두어 장 정도를 완성했을 땐 이미 저녁 하늘이 어슴푸레해져 있었고, 그제야 버키가 돌아왔다. 버키는 일찍 자겠다면서 먼저 씻고 누웠다. 스티브는 굳이 그런 버키를 말리지 않았다. 스티브도 서둘러 화구를 정리하고 침대에 누웠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스티브는 결국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꿈을 꾸지 않는 날이었다. 여러 의미로 스티브를 괴롭게 하는 꿈은 오늘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동안의 밤들로 스티브는 얕은 수면에 익숙해져 있었다. 곤히 잠든 적이 거의 없어서였다. 스티브도 버키도 그런 점을 서로 안타까워했지만 지금만큼은 잘 된 일이었다. 불현듯 드는 숨이 막히는 느낌에 스티브가 얼른 눈을 뜰 수 있어서였다.


 “…윽!”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무언가가 스티브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팔에 천천히 힘이 들어가고, 모자란 숨을 쉬기 위해 스티브가 버둥거렸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이었지만 스티브는 제 위에 올라탄 이가 누구인지 알았다. 익숙한 그림자가 저를 짓누르고 있었다. 막힌 숨 때문에 점차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스티브는 완전히 정신을 놓기 전에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힘껏 몸을 비틀었다. 결코 만만찮은 상대는 아니었지만 스티브 역시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다. 스티브는 제 목을 움켜 쥔 단단한 팔을 턱 붙잡았다. 그것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힘을 주어 밀어내었다. 동시에 발을 들어 올려 복부를 가격했다. 재빠르게 피하는 바람에 스티브의 발은 허공만 차올리는 꼴이 됐지만 덕분에 목을 조르던 팔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다.


 “크헉, 윽, 버, 버키.”


 스티브가 연신 기침을 해대며 여전히 경계 태세를 풀지 않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은색 잔해가 번쩍였다. 죽기 직전의 위험에 처해있던 것은 저임에도 스티브는 그런 버키가 안쓰러웠다. 지금은 버키라고 불러도 답이 없겠지. 매서운 눈으로 스티브를 노려보는 이는 버키보단 윈터 솔져에 가까웠다. 또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다시 눈을 뜨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런 폭주를 막기 위해선 스티브 역시 가벼운 부상쯤은 각오해야만 했다. 어쩌면 버키의 한쪽 팔이 뜯겨져 나간 것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내장을 토할 기세로 기침하던 스티브가 눈물까지 맺혔던 눈가를 대충 비비적거림과 동시에 버키가 달려들었다. 버키가 들고 있는 무기는 없었지만 스티브 역시 방패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스티브는 빠르게 날아오는 버키의 주먹을 아래로 몸을 숙여 피했다. 예측이라도 한 듯 날아오는 발차기는 미처 막지 못해 뒤로 한 바퀴 굴러야 했다. 스티브가 다시 균형을 잡고 일어나기도 전에 버키가 주먹을 휘둘렀다. 스티브가 재빨리 고개를 꺾지 않았더라면 지금 뭉개진 것은 바닥이 아니라 그 얼굴이 됐을 터였다. 스티브는 그 언젠가 벌였던 사투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버키, 정신 차려!”


 버키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대답대신 그의 주먹이 연달아 쏟아졌다. 스티브는 막기에 급급했다. 틈을 노려야 했지만 윈터 솔져인 버키에게서 틈을 찾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스티브는 어깨에 꽂히는 주먹을 양 팔로 막아 밀어내고, 자신의 체중을 실어 버키를 바닥에 눕히고자 했다. 버키는 빙글 몸을 돌려 스티브를 피했다. 곧이어 팔꿈치가 스티브의 등을 빠르게 가격했다. 스티브는 바닥을 뒹굴며 가까스로 그 일격을 피했다. 이번에는 한 번만 맞아도 뼈가 부러질 법한 내리찍기가 날아왔다. 정신없이 피하며 스티브는 와중에 방을 바꿔야겠단 생각을 했다. 다른 생각을 한 것이 들켰는지 망설임 없이 꽂히는 주먹에 스티브의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으윽, 괴로운 소리를 내는 스티브의 목을 단단한 팔이 감쌌다. 이번에 또다시 목을 졸리면 도망치기란 어려웠다. 스티브는 오히려 저를 감싼 버키의 팔을 힘껏 잡은 채 몸의 반동으로 버키를 들어 올려 바닥에 내리꽂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버키가 유연하게 몸을 말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스티브는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버키. 아무도 네게 간섭하지 않아. 이렇게 굴 필요 없어.”


 반발하는 것처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버키가 날아들었다. 몇 번의 공방이 정신없이 이어졌다. 공격을 퍼붓곤 있었지만 버키 역시 한쪽 팔이 없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지 이전처럼 막아내기 버거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버키를 막아내면서 스티브는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버키는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억지로 정신이 들게 만드는 수밖엔 없었다. 스티브는 입술을 꽉 깨물며 벽을 무너뜨릴 기세로 달려드는 버키의 옆구리를 차올렸다. 제가 쓰던 반대쪽 침대에 버키가 처박혔다. 스티브는 얼른 그 위로 올라탔다.


 스티브의 주먹이 버키의 왼쪽 뺨에 날아들었다. 스티브는 연거푸 주먹을 휘둘렀다. 가능하면 얼굴 같은 부위는 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버키의 얼굴에 금세 멍이 드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스티브가 잠시 주춤한 사이 버키가 손바닥으로 스티브의 주먹을 감싸왔다. 멀쩡한 왼팔이었다면 스티브의 주먹이 쪼개졌을지도 모르겠지만 다행히 오른팔이었다. 스티브는 얼굴을 찌푸리며 팔을 뒤로 뺐다. 동시에 버키가 스티브의 어깨를 내리 눌렀다. 금세 위치가 역전됐다. 이번에는 버키가 스티브의 얼굴을 갈겼다. 당연하게도 그는 스티브와 달리 봐주는 것이 없었다. 스티브는 얻어맞으면서도 열심히 틈을 찾아 버키의 옆구리 부근을 쿵쿵 내리쳤다. 결국 둘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침대가 와지끈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그 틈을 타 스티브가 버키의 왼다리를 걸었다. 균형이 살짝 무너진 버키에게 스티브가 온 힘을 다해 일격을 가했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버키가 뒤로 엎어졌다.


 다행히 이 한 방이 잘 먹혀들었는지 버키는 거칠게 숨만 내쉴 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스티브 역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버키 못지않게 호흡이 거칠었다. 스티브는 반이 부서진 침대에 살짝 걸터앉으며 바닥에 드러누운 버키를 내려다보았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이 스티브도 잘 알고 있는 빛으로 돌아왔다.


 “……날 밝으면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방안의 몰골에 버키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음엔 나무로 된 침대를 쓰면 안 되겠어.”


 스티브가 헛웃음을 뱉으며 답했다.


 “아예 비브라늄으로 부탁하지 그래.”

 “나쁘지 않네.”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며 스티브가 버키에게 팔을 뻗었다. 잠시 망설이던 버키가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아직도 얻어맞은 머리가 어지러웠고, 몸 여기저기가 쑤시듯 아파왔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어차피 좀만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터였다. 제 몸은 그렇게 생각하는 주제에 버키는 스티브의 얼굴이 한쪽이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을 보고는 얼굴을 팍 찌푸렸다.


 “젠장. 꼴이 말이 아니잖아.”


 스티브는 어깨로 대충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학교 옆 골목길에서 마이클한테 맞았을 때보단 괜찮아.”


 넉살좋은 대답에도 버키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한 짓이라 더 그랬다.


 “그 새낀 내가 되갚아줬잖아.”

 “나도 방금 날 때린 만큼은 갚아줬어.”


 스티브의 시선이 버키의 부은 얼굴에 가 닿았다. 버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터진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쓰라렸다. 버키는 조심스레 스티브의 옆에 앉았다. 바닥에 닿을 듯 다 무너진 침대라 자세가 어정쩡했다. 버키는 스티브를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미안.”


 스티브 역시 버키를 보지 않았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부서진 잔해만이 눈에 담겼다.


 “괜찮아.”


 둘 사이에 거짓말이 차곡차곡 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