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 2.5D NOTICE GUEST

 스티브를 공격했던 밤의 일을 버키 역시 선명히 기억했다. 그러나 기억한다고 해서 그 원인까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 갑자기 정신을 잃었는지는 버키 역시 알지 못했다. 그 날 스티브는 아무 꿈도 꾸지 않았지만 이와 달리 버키는 떠올리기 싫은 꿈을 꾼 것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었다. 누군가가 또 몰래 침입해 윈터 솔져의 키워드를 속삭이진 않았을 테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더 문제였다. 그 꿈은 지금까지도 또 앞으로도 버키를 계속 괴롭힐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꿈속에서 버키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강한 충격에 다시 정신을 차리면 어느덧 새하얀 눈에 파묻힌 뒤였다. 그리고 왼팔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버키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비명을 내질렀다. 전기가 잘 들어오지 않는 실내처럼 시야가 연신 깜빡거렸다. 귓속이 뱀이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알 수 없는 말을 잔뜩 중얼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에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차가운 무언가가 제 피부를 꿰뚫는 것이 느껴졌다.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다수의 비명 소리가 길게 이어지는 장면이 반복 됐다. 자신의 몸이 아니지만 자신의 몸이 맞는 팔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붉은 별이 피처럼 솟구쳐 어둠을 물들였다. 꿈은 끝도 없었다. 감각이 둔해질 정도로 계속 되는 고통과 통증 속에서 버키는 몸부림치고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눈이 떠졌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를 공격한 적은 처음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버키가 기억하기로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버키가 죽이려고 했던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스티브였다. 팔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스티브가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자신을 제압했을 테니. 그게 아니라면 얼굴에 조금 멍이 드는 정도가 아니라 팔다리가 부러졌을 터였다.


 “다친 곳은 어때?”

 “누가 누구 걱정을 하는 거야.”


 가벼운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스티브는 버키의 얼굴을 보자마자 물어왔다. 얼굴에 울긋불긋 멍이 든 것은 피차일반이었다.


 “여기 앞 경치가 생각보다 좋던데. 다음에 같이 나가자.”


 말없이 바라보는 버키의 속을 읽었는지 스티브가 멋대로 대답했다.


 “다들 모르는 곳이라 괜찮아. 그 정도는 돌아다녀도 돼.”


 일부러 인지 스티브는 버키가 폭주한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원인도, 해결책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니 차라리 꺼내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생각할 것이 많아 버키도 일단은 그 일을 화두에 올리진 않았다. 그러나 둘 모두 신경 쓰는 것만은 확실했다.


 버키는 마지못해 대답을 끄덕였다. 원하는 대답을 얻은 스티브가 다른 할 일을 하는 사이 버키는 낡은 가방에 넣어두었던 수첩을 꺼내 읽었다. 단편적인 기억들이 수첩 곳곳에 널려 있었다. 버키는 그것들을 읽으며 짜 맞추듯 기억을 정리해갔다. 때로는 새로운 것을 적어 내려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꽂아둔 캡틴 아메리카의 사진이 나올 때면 한참이나 그것을 바라보았다.


 버키는 거의 반쯤을 채운 수첩을 넘기다 별 생각 없이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가만히 읽고 있던 버키의 손이 멈추었다. 제 수첩과는 다른 종이가 끝이 찢어진 채 붙어 있었다. 제 글씨는 아니었지만 아주 눈에 익은 필체였다. 써있는 내용은 버키의 기억에 전혀 없는 이야기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건 앞으로 하고 싶은 것들의 나열이었으니까.


 마침 스티브도 할 일을 마쳤는지 버키에게 시선을 돌렸다. 버키가 덮은 수첩을 흔들며 픽 웃었다.


 “여기 나도 모르는 낙서가 있는데, 스티브. 네 껀 자리가 부족했어?”


 어차피 묻고자 하는 건 그게 아니라 스티브는 질문에 다른 답을 했다.


 “안을 보지는 않았어. 음, 전부는 말이야.”

 “그럼 내가 몰래 푸딩 뺏어먹은 것도 모르겠네.”

 “오. 그건 안 읽었어. 알고는 있었지만.”


 스티브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버키는 언뜻 본 종이의 내용을 되짚으며 투덜거렸다.


 “그걸 다 하려면 70년을 또 보내야 할 것 같은데.”

 “둘이 하면 반으로 줄 거야.”

 “그래, 우린 공부완 거리가 멀었지.”

 “이건 요즘의 비유적 표현이야.”


 마지막 말에 버키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수첩을 다시 가방 안에 소중히 집어넣기는 했다. 스티브는 못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살짝 의무적인 느낌으로 하던 것도 있었지만 버키와 함께라면 정말 즐거울 것 같아서였다. 어쩌면 버키의 말대로 아주 오래 걸릴지 몰랐다. 그래도 괜찮았다. 스티브는 아주 길고 느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익숙했다.


 그 날, 스티브는 어김없이 꿈을 꾸었다. 한 가지 다른 것이라면 새하얗게 펼쳐진 눈과 얼음도, 서서히 숨을 옥죄는 추위도 존재하지 않는 꿈이라는 점이었다. 따뜻한 조명 아래의 실내는 아늑하고 부드러웠다. 다소 왁자지껄한 분위기긴 했으나 스티브는 어쩐지 그 소리가 익숙했고 또 그리웠다. 말소리와 웃음소리 아래로 잔잔한 음악이 깔렸다. 스티브에겐 너무도 익숙한 옷차림이 눈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스티브는 자연히 깨달았다. 아, 그 때의 술집이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낯익은 목소리가 스티브의 이름을 불렀다.


 “스티브!”


 스티브가 흡, 숨을 들이마셨다. 누군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더 반응하기 힘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친근하게 다가와 스티브의 어깨를 툭 쳤다.


 “마시지 않고 여기서 뭘 하나? 멍청히 서서.”


 하워드가 씩 웃으며 스티브를 잡아당겼다. 스티브가 반응하지 못하고 굳어 있는 사이 하워드가 그를 끌고 모두가 모여 있는 자리로 향했다. 잠들어 있던 사이 추억이 되어 버린 대원들이 술을 마시며 호탕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들은 스티브를 보며 저마다 한 마디씩 말을 건넸다. 같이 술을 마시자는 권유도 있었고, 아는 여자가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는 외침도 있었다. 스티브는 곤란한 듯 웃었다. 어떤 얼굴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랜만이었으나 바로 어제의 일처럼 모든 것이 익숙했다.


 “여자라면 나한테 소개를 부탁해야지. 캡은 여자 쪽으론 완전 쑥맥이라고.”


 그들을 지나쳐가며 하워드가 피식 웃었다. 하워드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었는지 스티브를 붙잡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스티브의 기억이 맞다면 페기와 버키도 이 자리에 있어야 하건만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빈 테이블을 보며 하워드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미 온 줄 알았는데 다들 늦는군. 그럼 우리끼리 먼저 한 잔 하지. 괜찮나?”

 “…….”

 “취하기 힘든 건 알지만 어차피 분위기에 취하는 걸세. 자, 스티브.”


 씩 웃으며 하워드는 스티브에게 제 몫의 술을 넘겼다. 같이 마시자는 뜻으로 하워드가 잔을 흔들었다. 하워드의 턱짓에 결국 스티브도 한 잔을 비웠다. 꿈속인데도 안을 타고 흐르는 술이 뜨거웠다. 벌써 취한 것처럼 하워드는 유독 기분이 좋아보였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자네에게 어마어마한 선물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고작 그 말 뿐이었는데 스티브는 하워드가 주겠다는 선물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는, 정확히는 사용했었던 그 캡틴 아메리카의 상징일 터였다. 지금 스티브의 수중엔 없는 물건이었다. 어디에 있을지 짐작이 가서 더욱 입이 썼다. 하워드는 벌써부터 입이 근질거리는지 실없이 웃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폭발 사고도 잦았고 실험에 실패하는 일도 많았지만 늘 눈을 반짝이며 연구에 몰두하던 하워드였다.


 “사실 지금처럼 즐거운 적이 없었네. 연구야 언제나 재밌지만 이번엔 기분이 좀 다르단 말이야. 그 이유를 알고 있나?”

 “…아뇨.”

 “당사자가 그걸 모르면 어쩌나. 스티브, 자네 때문이야.”


 하워드가 기분 좋게 웃었다. 원래 웃음이 많은 그였지만 지금의 얼굴은 보다 천진하기도 했고 동시에 뿌듯해 보이기도 했다. “캡틴 아메리카!” 쾌활하게 다시 외친 하워드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벌써부터 그의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적당히 노곤해진 기분이 좋았는지 하워드는 콧노래마저 흥얼거렸다. 스티브도 페기에게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이 차가운 얼음 속에 파묻히고 나서도 그가 줄곧 캡틴 아메리카를 찾아다녔노라고.


 스티브는 그때나 지금이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거렸다.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는 순간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질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제 마음 편하자고 가벼운 사과를 늘어놓을 순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건 실제도 아니고 스티브의 기억과 바람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다. 그곳에 하워드를 끌어들였다는 것 자체가 미안한 일이었다. 스티브가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자 하워드가 의아한 듯 목을 쭉 뺐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몸에 이상이라도 있는 거야?”


 걱정스러운 물음에 스티브는 더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스타크.”

 “그래.”


 하워드는 잠자코 스티브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괜히 술을 먹인 것 같아 다소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스티브는 최대한 말을 정리했지만 그 어떤 것도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럴 리 없지만 뒤늦게 술기운이라도 도는지 머리가 핑글핑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몸은 뜨거워지지 않고 오히려 차가워졌다. 손끝부터 버석하게 얼어붙는 감각이 올라왔다. 식은땀이 났다. 스티브는 다시 한 번 힘겹게 하워드를 불렀다. 허나 정말 그 부름이 입 밖으로 나왔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젠 몸까지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워드의 얼굴이 물에 번진 듯 뿌옇게 흐려졌다.


 그리고 어둠이 달려드는 순간 스티브는 번쩍 눈을 떴다.


 “헤이, 괜찮아?”


 걱정을 한껏 담은 채 저를 내려다보는 버키가 시야에 들어찼다. 스티브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까지 냈다. 잠시 지켜보던 버키는 이어지는 흐느낌에 스티브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아야 했다. 일어나라며 몇 번을 흔들자 스티브가 겨우 눈을 떴다. 버키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버키.”

 “물이라도 마실래?”


 대답도 듣지 않고 버키가 미리 준비한 물 한 컵을 건넸다. 스티브는 그것을 마시며 어지러운 머리를 달랬다. 속이 울렁거리고 입이 썼다. 처음 악몽에 시달렸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버키는 스티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스티브가 진정할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스티브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입을 뗐다.


 “어쩌면 나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일지도 몰라.”

 “모두가 그렇지. 나도 그렇고.”


 세상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버키의 말은 달래는 것 같기도 했고 자조하는 것 같기도 했다.


 “미안. 다시 자기도 애매한 시간인데.”

 “어차피 자고 있지도 않았어.”

 “버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진짜로 잠이 안 와서 그런 거야.”


 스티브도 버키를 타박하기엔 그 기분이 어떨지 잘 알 것 같았다.


 “독한 수면제라도 달라고 해야겠어. 아, 들지 않으려나.”

 “……옆에 누울래?”


 꾸물거리며 벽 쪽으로 붙은 스티브가 제 옆을 두드렸다. 둘이 눕기에 넉넉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좁지도 않았다. 망설이던 버키가 이내 비워둔 베개의 반쪽을 차지했다. 자연히 둘의 어깨가 맞닿았다.


 “옛날엔 이렇게 누우면 품에 쏙 들어왔는데.”

 “벌써 몇 십 년 전 얘기지.”


 닿은 온기는 꼭 그때처럼 따뜻했지만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모두 달라져 있었다.


 “버키.”

 “스티브, 일부러 말할 필요는 없어.”


 버키는 이런 식으로 종종 스티브의 속을 읽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었다. 스티브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 위로 까슬한 입술이 겹쳐졌다. 스티브가 조심히 입술을 벌렸다. 울컥하고 가슴 안쪽이 뜨겁게 타올랐다. 눈물이 나오진 않았지만 꼭 그런 기분이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입술 너머의 버키 역시 비슷한 상태라고 짐작했다.


 아침이 밝고 버키는 스티브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스티브가 말했던 대로 경치가 좋았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것 하나 없이 느긋하고 여유로우며 넓은 풍경이 함께였다. 스티브는 가져온 스케치북에 살짝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조금 먼 곳엔 상징이나 다름없는 검은 조각이 우뚝 솟아 있었다. 버키는 하루 종일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바깥을 구경했다. 아주 오래도록.


 그리고 그 이후로도 가끔 버키는 침대를 부수고, 식탁을 망가뜨리고, 벽을 허물었다. 그때마다 스티브의 몸 여기저기에도 상처가 늘었다. 방을 벌써 네 번째 바꿨을 때, 버키는 마음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