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 2.5D NOTICE GUEST

 간단히 점심을 먹고 있던 중이었다. 과일 몇 개를 베어 먹은 버키가 대뜸 그랬다.


 “스티브. 나 결정한 게 있어.”


 스티브는 그것이 무어냐 묻지 않았다. 대신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버키.”

 “무슨 말인지 들어보지도 않고?”

 “내가 모를 것 같아? 안 돼, 버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야.”


 스티브의 마지막 말에 버키는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눈썹은 아래로 내려가 있었지만 눈빛은 이미 확고했다. 스티브가 이렇게 나올 줄 다 알고 있던 눈치였다. 그리고 버키는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이 방법밖엔 없어, 스티브.”


 둘은 서로를 잘 알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고집쟁이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스티브는 다시 반대했고, 버키는 역시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의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한순간의 마음으로 정한 일이 아니니 당연히 스티브의 설득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다 알면서도 스티브는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추워야만 하는 걸까. 윈터 솔져, 그 놈의 이름이 문제였다. 그 겨울은 끝나지도 않았다.


 “난 더 이상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도, 상처 입히고 싶지도 않아.”

 “내가 막을 수 있어.”


 스티브가 재빠르게 덧붙였다. 그러나 그 답이야말로 버키가 가장 원치 않던 말이었다.


 “빌어먹을. 난 그게 제일 싫다고.”


 예나 지금이나 버키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지금은 저보다 체구도 크고 웬만한 공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캡틴 아메리카라지만 버키의 눈에는 그냥 스티브 로저스였다. 제가 알고 있던 브루클린의 그 꼬맹이. 이렇게 누군가를 위하고, 생각하고,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유일한 존재. 버키는 스티브가 상처 입는 꼴이 보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제 손으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넌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놈도 아니잖아, 이 머저리야!”


 말하며 감정이 치솟는지 버키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내가 그럴 때마다 가장 고생하는 건 너야! 그리고 난 그게 싫어!”

 “난 싫지 않아! 방법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버키, 넌 충분히 나을 수 있어. 지금도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잖아.”

 “며칠에 한 번씩 방을 부수면서 말이지.”


 버키가 비꼬듯 툭 뱉었다.


 “덤으로 네 얼굴도 같이 박살내고.”

 “지금은 다 나았어. 그리고 그 정도도 아니야.”


 스티브는 단호했지만 버키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 거짓말은 이제 질렸어, 스티브.”


 냉정히 답한 버키가 아예 등을 돌렸다. 스티브는 더 버키를 막을 수 없었다. 스티브도 버키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알았다. 제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누군가를 해친다면, 더 나아가 죽이기까지 한다면 누구라도 미칠 터였다. 이미 버키는 몇 번이고 그런 적이 있었고 그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상처이자 과오가 되었다. 또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그 대상이 스티브가 될지도 모르니 더더욱 그랬다. 상황이 반대였다면 스티브 역시 버키와 같은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 마음에 공감한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얼었던 적이 있기에 둘은 그것이 어떤 감각인지 잘 알았다. 누군가 제 삶을 가위로 똑 오려내서 다른 끈에 이어붙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눈을 뜨면 제가 알던 세상과 다른 곳이 펼쳐져 있다. 세상은 느리지만 꾸준히 변화하기 마련이었고, 얼어있는 시간은 서서히 그 세상에서 밀려만 갔다. 자신이 알던 것들이 모르는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없어진 그 쓸쓸한 기분. 스티브는 그 고통을 뼈저리게 알았다. 버키를 다시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허나 이제는 무너질 바람이었다.


 “……네가 매번 하던 말이지만 진짜 못 말리겠는 건 바로 너야, 버키.”

 “그래서 우리가 친구인 거잖아.”


 다르지만 같은 점도 많았다. 무엇보다 한번 결정한 일에는 조금의 양보도 없이 강경하게 구는 점이 그랬다. 버키가 결국 스티브의 입대를 막지 못했듯 스티브도 버키의 선택을 막을 순 없었다. 버키는 스티브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감돌기 전에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가볍게 말했다.


 “친구보다 더 나아가기도 했고.”


 스티브는 기꺼이 버키의 노력에 응했다.


 “사람 보는 눈이 별로 없었지.”

 “그렇게 나오기야?”


 버키가 너스레를 떨며 과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다고 웃으며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스티브는 다시금 입술을 꾹 깨물고 말았다. 무수한 감정이 스티브를 스치고 지나갔다. 결국 스티브가 토해내듯 뱉은 건 고작 이런 말 뿐이었다.


 “…농담이야.”

 “나도 알아.”


 약간의 한숨과 함께 버키가 다가와 한 손으로 스티브를 안았다. 꼭 그 시절처럼.



 *



 확고히 결정을 내려서인지 그 뒤로 버키가 침대를 부수는 일은 없었다. “이번에 또 망가지면 진짜 비브라늄으로 만들어 달라 하려 했는데.” 이젠 그런 농담이나 던졌다. 스티브는 아직 버키의 선택이 마음에 걸렸고 가슴 한 구석이 씁쓸했지만 한결 나아보이는 버키의 상태를 보자 더 물고 늘어질 수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버키는 오히려 얼기로 결심한 이후에 더 괜찮아졌다.


 시시한 대화를 마친 버키는 수첩 가장 뒤에 끼워둔 종이를 다시 스티브에게 돌려주었다. 아직 하나도 지우지 못한 앞으로의 목록이 빼곡했다.


 “내 몫 남겨놓긴 해.”


 스티브는 쓰게 웃으며 종이를 받아들었다가 다시 버키에게 주었다. 스티브는 아직도 알아야 할 것이 많았고 해야 할 것도, 봐야 할 것도 많았다. 그리고 손에 든 이 종이는 그 중에서도 버키와 같이 하려고 골라둔 거였다. 어차피 혼자선 실행할 것 같지도 않았다. 스티브는 억지로 버키의 손에 구겨진 종이를 올렸다.


 “버키. 난 끝까지 너와 함께 할 거야.”

 “같이 얼겠단 소린 하지 마.”


 버키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스티브를 보았다. 아주 잠깐 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스티브는 버키와 함께 얼어붙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버키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도 여전히 그 곁에 있고는 싶었다.


 “뭐, 이건 안 받을 것 같아서 받을만한 걸 준비하긴 했지.”


 어쩔 수 없이 다시 수첩 안에 종이를 끼워 넣고 버키는 등을 돌렸다. 요 며칠 틈틈이 준비했던 것이 있었다. 우습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해서 만들면서도 몇 번이나 고민했던 것인데 끝내 완성을 하기는 했다. 마지막이니 이런 거라도 전해주고 싶었다. 진짜로 하고 싶은 건 어차피 할 수도 없으니 대신이었다.


 “선물이야.”


 버키의 손에 들린 것은 어디서 엮어왔는지 몰라도 파릇한 봄 새싹과 꽃으로 연결된 화관이었다. 저 모습으로 혼자 들판에 앉아 이것을 만들었을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스티브는 푸스스 웃으면서도 입으로는 투덜거렸다.


 “나한테 정말 안 어울릴 것 같은데?”

 “내 생각에도 그래.”


 버키는 픽 웃으며 화관을 들어다 스티브의 머리 위로 올렸다. 한 손으로 만드느라 이음매가 영 엉성한 그 화관은 스티브가 쓰기엔 조금 작은 감이 있었다. 무슨 링 마냥 금발 위에 폭 놓인 것을 보며 버키는 당황하는 대신 태연하게 말했다. “그 꼬맹이가 생각보다 많이 크긴 했네.” 그리고 다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스티브. 손 줘 봐.”


 스티브는 군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이쪽 말고 왼쪽.” 버키의 타박에 왼팔을 내밀자 네 번째 손가락에 무언가가 끼워졌다. 차갑거나 무겁진 않았다. 오히려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웠고 또 부드러웠다. 스티브가 머리에 쓰고 있는 것과 똑같은 재료였다. 다만 원이 조금 더 작아서 스티브의 손가락에 꼭 맞을 뿐이었다.


 “하이드라 놈들이 무보수로 부려먹어서 있는 게 없었어.”

 “……나쁘지 않네. 어릴 적 생각도 나고.”


 영화에서 보았던 로맨틱한 고백 장면을 따라한답시고 버키가 대충 풀을 뜯어다 얼기설기 엮어 손가락에 끼워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앙상한 스티브의 손가락에도 꽉 맞을 정도로 대충 만든 반지여서 결국 끝까지 들어가기도 전에 다 부서지고 말았더랬다. 바닥으로 파스스 흩어지는 풀떼기를 보며 둘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이런 고백이었으면 여자 주인공이 아마 거절했을 거라고, 스티브가 웃으며 한 말에 버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만들었던 것보단 훨씬 튼튼하고 손가락에도 딱 맞았지만 그래도 그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덩달아 웃음도 같이 번졌다.


 “아. 버키, 너도 손 내밀어 봐.”


 뒤늦게 무언가 떠올랐는지 스티브가 대뜸 말했다. 버키는 얌전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스티브는 가끔 그림을 그릴 때 사용했던 붓을 가져왔다. 제 손에 있는 것과 똑같은 풀색을 쿡 찍어 바르고선 버키의 네 번째 손가락을 잡았다. 순식간에 둥근 원이 생겼다. 버키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멍하게 있던 버키가 한 박자 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정성이 없는 거 아니야?”

 “그럼 보석도 그려줄게.”


 장난이 아니었는지 밋밋한 원 위에 반짝이는 모형이 새겨졌다. 붓 자락이 움직일 때마다 닿는 손가락이 간지러웠다. 실은 스티브가 잡고 있는 손 뿐 아니라 다른 곳도 모두 간지러웠다.


 “스티브. 고개 들어 봐.”


 왜? 스티브가 고개를 들자마자 버키가 입을 맞춰왔다. 스티브는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