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히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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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안쪽이 욱신거리고 아파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쿠니미는 조금씩 올라오는 아릿한 통증에 자꾸 얼굴을 찌푸려야 했다. 참지 못할 정도로 아픈 건 또 아니라 그저 가만히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오이카와가 세심하게 말을 걸어 왔다. “쿠니미쨩, 어디 아파?” 하고서. 그제야 배구에 열중하고 있던 킨다이치도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요.”
“아픈 거 참았다가 병 나.”
오이카와는 퍽 진지하게 말했다. 쿠니미는 또 지지 않고 “정말 괜찮아요.” 하고 말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아주 가볍게 검지 손으로 쿠니미의 볼을 쿡 찔렀다. 그 순간 퍼져오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냈더니 오이카와가 보란 듯 상큼하게 웃었다. 반박할 수가 없어 쿠니미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어디가 아픈지는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그 덕에 쿠니미는 이른 시간에 학교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꼭 병원에 가라고 오이카와를 비롯한 모두가 신신당부했지만 쿠니미는 별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호들갑 떨 정도로 아픈 것도 아니었다. 충치는 아닐 테고 아무래도 사랑니가 난 것 같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솟아올라 자리를 잡은 듯 했다. 혀끝으로 살살 만져보는데 문득 오래 전 일이 떠올랐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뾰족하게 올라간 눈매에 칙칙한 머리를 하고서 배구 하나에만 열중하던 소년이 있었다. 정말 배구밖에 모르는지라 쿠니미나 킨다이치가 옆에서 알려줘야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 시간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끝이 그렇게 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아직도 연락을 하고 있겠지. 쿠니미는 오랜만에 떠올려보는 그 얼굴에 혀로 입술만 축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카게야마가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만 잔뜩 찌푸리고 있던 날이 있었다. 기분이 나쁜가 싶었는데 또 수업이나 연습은 빼먹지 않았고, 말을 걸 때마다 간단히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는 식으로 대답도 착실히 했다. 종일 뚱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카게야마를 보고 킨다이치는 영문을 알 수 없단 표정을 지었고, 한참을 바라보던 쿠니미가 그런 카게야마를 붙잡았다.
“카게야마.”
찡그린 얼굴에도 한가득 물음표를 달고 저를 쳐다보는 카게야마를 보며 쿠니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이 아프지.”
“…윽.”
말하며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입술 근처를 손끝으로 꾸욱 눌렀다. 반사적으로 카게야마가 눈썹을 찡그리며 아픈 소리를 냈다.
“아, 그래서 말을 못 했구나.”
“입 좀 벌려 봐.”
카게야마는 끝까지 괜찮다고 주장했지만 쿠니미는 단호했다. 카게야마가 거의 억지로 입을 벌렸을 땐 대체 얼마나 미련하게 참은 건지는 몰라도 안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야, 이 좀 잘 닦지 그랬냐.”
킨다이치의 말에 카게야마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눈을 매섭게 떴다. 킨다이치가 움찔한 사이 쿠니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사랑니 난 것 같은데.”
당연한 말이지만 카게야마는 그게 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쿠니미라고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카게야마보다는 나았다. 쿠니미의 설명을 듣고도 카게야마는 여전히 잘 모르겠단 눈빛을 하고 있었다. 늘 있는 일이라 쿠니미는 그러려니 했다. 병원에 가보라는 말을 하려던 쿠니미는 그 말 대신 대뜸 다른 말을 꺼냈다.
“카게야마.”
“어?”
“너 뭐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느냐고 물어보려던 쿠니미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보니 굳이 물을 필요조차 느껴지질 않아서였다. 쿠니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됐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가 궁금하지도 않은지 카게야마는 더 묻지도 않았다. 쿠니미는 분명 말 만들기 좋아하는 어떤 이들이 대충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우습지도 않은 질문을 저 멀리로 날려 보냈다. 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기는 할까. 배구밖에 모르는 앤데.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게야마가 입을 앙 다물고 있는 것이 또 배구 생각이나 하는 게 틀림없었다. 쿠니미는 배구 좋아하냐고 물으려다가, 어차피 답이 뻔한 이야기라 이것 역시 안으로 삼켜버렸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더라. 사랑니를 뽑고 난 뒤에 호들갑 떨며 아팠냐고 묻는 킨다이치에게 카게야마가 고개를 끄덕였던 것 정도만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쿠니미는 그 얼굴을 상기하며 역시 병원은 뒤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래되었다면 오래되었고, 짧다면 짧은 과거 이야기를 새삼스레 떠올린 것은 곧 카라스노와 결전을 치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연히 카게야마는 나올 테고, 쿠니미 역시 경기에 나갈 터였다. 비록 맞은편이라고는 해도 같은 코트 위에 서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지난번의 연습 경기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기분이 벌써부터 싱숭생숭하고 이상했다. 쿠니미는 괜히 지나가던 돌멩이를 발끝으로 툭툭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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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시간이 없던 것도 아니지만 쿠니미는 잘 자란 사랑니를 그대로 방치해두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미약한 통증은 잘 느껴지지도 않았다. 쿠니미는 평소대로 연습했고, 평소와 같은 컨디션으로 시합에 나섰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시작된 시합은 말 그대로 정신없이 흘러갔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다 함께 움직이고, 소리치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해주며 점수를 따내는 열기 속에서 쿠니미도 열심히 움직였다. 땀으로 젖은 이마를 닦으며 쿠니미는 경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귀찮은 일은 질색이라고 해도 언제나 배구 경기만큼은 집중하는 쿠니미였으나 이번에는 그 정도가 더했다.
으르렁거리면서도 지지 않겠다고 투지를 불태우는 카게야마가 자꾸 눈에 들어찼다. 며칠 전부터 내내 머리 한 구석을 차지하고선 사라지지 않던 얼굴이었다. 쿠니미는 아닌 척 하면서도 집요하게 카게야마를 쫒았다. 경기 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으니 눈이 더 가는 것도 당연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가 카라스노의 다른 이들과 같이 호흡을 맞추고 기뻐하는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쿠니미는 현재에 만족하고 있었고 딱히 과거에 미련을 두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법 편하게 웃음 짓는 카게야마를 본 순간 희미해졌다고 생각한 과거가 불현듯 떠올랐다. 쿠니미도 저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 시절의 어느 날 마치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완벽한 호흡으로 움직였을 때, 미처 숨기지 못하고 새어나오던 소박한 웃음이 아직도 선명했다. 몇 백번의 연습 끝에 터져 나온 성과였고 수도 없이 반복한 탓에 카게야마도 쿠니미도 모두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손발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쿠니미는 반쯤 오기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카게야마의 작은 미소를 보았을 때 쿠니미는 지겨운 연습이 한순간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카게야마는 지금의 감을 이어가려는 듯 쿠니미를 슬쩍 바라보았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몸은 피곤하고, 솔직히 쿠니미는 오래 전부터 얼른 끝내고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하고 있지 않았다. 얼굴에 드러나기라도 했는지 카게야마가 입술만 달싹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양손으로는 배구공을 만지작거리는 채였다. 쿠니미는 아주 잠시 생각했다.
“한 번 더 할래?”
무심코 튀어나간 말에 카게야마는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어지는 웃음은 조금 전보다도 더 밝았고, 또 그만큼 기뻐보여서 쿠니미도 덩달아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 날이었다. 정말 딱 한 번만 하고 끝낸 카게야마에게 몇 번 더 해도 괜찮단 뜻이었다고 덧붙인 것까지 모두 빠짐없이 기억했다. 그런 소소한 추억이 마치 어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순식간에 떠올랐다 스르륵 사라졌다. 지금은 그 역할을 다른 사람이 대신하고 있겠지. 카게야마가 코트 위의 제왕이라고 불릴 즈음엔 쿠니미 역시 카게야마와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했으니 저런 편안한 모습을 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 순간 잊고 있던 욱신거리는 통증이 다시금 쿠니미의 안을 파고들었다. 아, 한 번 신경 쓰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데. 쿠니미는 이제야 병원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카게야마의 시선이 제 등 뒤에 닿았을 때는 더 아픈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쿠니미는 가능한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합이 아슬아슬한 접전이 되면서부터는 쿠니미도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어졌다.
그리고 길게 이어지던 경기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깔끔한 마무리와 이에 쏟아지는 환호성, 그 속에서 쿠니미는 조용히 정렬을 마쳤다. 끝나자마자 다시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 같아 쿠니미는 차가운 물을 한가득 들이부었다.
그렇게 다음을 준비하며 호흡을 고르던 쿠니미가 갑자기 인상을 썼다. 내내 잠잠하던 사랑니의 통증이 예고도 없이 입 안 곳곳을 들쑤시며 제 존재감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쿠니미는 인상을 펴지 못한 채로 킨다이치에게 말했다.
“나 잠시만.”
쿠니미는 서둘러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이라도 닿으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모퉁이를 도는 순간, 가장 오래 떠올렸으나 만날 생각은 없던 사람과 부딪혔다. 정확히는 부딪히기 전에 카게야마 쪽에서 빠르게 몸을 뒤로 뺐다.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경기장이 코트 위에서 마주치는 것 외에는 볼 일이 없는 사이이기도 했다. 쿠니미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카게야마를 지나치려고 했다. 최근 혼자서 온갖 기억을 헤집고 있던 것과는 별개로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쿠니미를 카게야마의 낮은 목소리가 붙잡았다. 걸음을 옮기던 쿠니미가 멈칫했다.
“쿠니미.”
“……왜?”
막상 불러 세우니 할 말이 사라졌는지, 아니면 애초에 생각하고 붙잡은 것이 아닌지 카게야마는 한참을 망설이기만 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쿠니미는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카게야마가 입을 열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배구…… 좋아해?”
그리고 툭 터져 나온 말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쿠니미는 열의가 넘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흥미가 없는 일은 시작조차 하지 않는 편이었다. 벌써 몇 년이나 꾸준히 하고 있는 배구를 싫어할 리가 없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살피듯 바라보았다. 농담이나 장난으로 말을 걸어올 상대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끝이 좋았던 것도 아닌데, 그런 상대를 굳이 이렇게 달려와 붙잡을 정도라면…….
쿠니미의 사고가 거기까지 미쳤을 때, 잊고 있던 경기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래도 조금씩은 관계를 이어가며 소통했던 것이 완전히 단절되었던 순간이 생생했다.
“새삼스러운 걸 묻네. 좋아하지 않으면 계속 할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
카게야마의 동글동글한 머리를 바라보다 쿠니미가 덧붙였다.
“좋아해. 배구.”
카게야마는 어쩐지 안심한 것 같기도 했고, 아쉬운 것 같기도 했다.
“너랑 같이 했을 때도 그랬어.”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는 눈을 크게 떴다. 아, 오랜만에 본다, 이 얼굴. 쿠니미는 어쩐지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살짝 올라간 입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카게야마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쿠니미는 온갖 단어가 날아다니고 있을 카게야마의 머릿속을 그려보았다. 카게야마가 그 중에서 낚아챈 문장은 그 언젠가 킨다이치도 한 적이 있는 말이었다.
“다음번에는 안 질 거니까.”
스스로 내뱉고도 어색한지 카게야마는 조금 뜸을 들였다. 쿠니미는 바로 대답했다.
“그때도 우리가 이길 거야.”
“아니, 다음엔 우리가.”
우리라는 단어가 카게야마의 입에서 스스럼없이 나온다는 사실이 쿠니미에겐 묘한 기분을 선사했다.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같은 반이지?” 아직 어렸던 첫 만남에서도 꺼냈던 말이니까. 이제 더 이상 그 우리에 쿠니미는 속하지 않았지만, 그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야?”
쿠니미의 질문에 카게야마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보면 또 달라지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쿠니미는 피식 웃으며 오랜만에 인사를 건넸다.
“잘 가.”
“응.”
인사를 마무리로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지나쳤다. 작별 인사였지만 뒷맛이 씁쓸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이 훨씬 나았다.
문득 쿠니미는 조금 전까지 저를 괴롭히던 통증이 싹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얼했던 턱 부근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보며 쿠니미는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꼭 병원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