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 2.5D NOTICE GUEST

아메호쿠을 위한 문구는 "나는 그대에게 줄 게 없었어요. 피도 눈물도 내 것은 하나도 없는 몸뚱이를 그대가 가졌으면." 입니다. 연성해주세요.

 *



 원해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마침 기관에선 재능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고, 그 레이더에 아메히코가 포착 되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아메히코가 원래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도 있었는지 아예 우주로 나가 쓰레기를 청소하는 게 어떠냐는 말까지 했다. 조금 고민했으나 아메히코는 결국 거절하지 않았다. 그게 지금 이 곳에 서 있는 이유였다.


 이 땅 위로 미지의 생명체가 찾아든 것이 벌써 몇 십 년 전의 일이었다. 우주에서 날아온 그것들은 말이 통하지도 않았고, 당시의 기술론 제대로 처리하기도 힘들었다. 대항할 만한 무기를 만들고, 파일럿을 뽑고, 직접 우주로 나가 지구를 지킨다는 어려우면서도 간단한 시스템이 자리 잡은 건 불과 삼 년 전이었다. 치솟기만 하던 희생자 수가 줄어든 것도 그 즈음이었다.


 제법 까다로웠던 훈련과 절차를 무사히 마치고 아메히코는 지금 마지막 문턱에 서 있었다. 우주에서의 이 짧은 연습을 끝내면 곧바로 실전에 투입 될 예정이었다. 아메히코는 저를 도우러 올 선배를 기다리며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하얀 색으로 칠해진 이곳엔 사람의 흔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드문드문 남아 있는 검은 찌꺼기들이 시선을 잡아 끌 뿐이었다. 그것들이 저 멀리서 들리는 발소리에 잠시 술렁거리는 모습을 보며 아메히코도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를 마쳤다.


 “챠오! 만나서 반가워요.”


 상큼한 인사가 울려 퍼졌다. 문을 열고 들어 온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깔끔하게 머리를 올린 남자가 웃음을 띄운 채 걸어 왔다. 아메히코보다 나이는 어려 보였지만 동작 하나하나에 여유로움이 묻어 나오는 남자였다. 남자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쥬인 호쿠토입니다. 쿠즈노하 아메히코씨죠?”

 “그렇다만…….”

 “제가 한참 어리니까 말은 편하게 하셔도 괜찮아요.”


 멀끔한 외모에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남자는 척 봐도 인기가 있을 법한 타입이었다. 악수를 하는 평범한 동작마저도 그림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허나 아메히코는 그 이상의 것을 보고 있었다. 남자는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까맣고 무거운 덩어리들을 덕지덕지 매달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정작 본인에게서 나오는 더러움은 티끌 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어서 아메히코는 처음 보는 이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불쑥 솟았다.


 이쥬인 호쿠토와 쿠즈노하 아메히코의 첫 만남이었다.



 *



 가상 연습과 달리 실제 우주 공간에서 기체를 조종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벌써 네 번째인 연습을 마치고 나온 아메히코에게 호쿠토가 준비한 물과 수건을 내밀었다. 일시적인 훈련용 파트너라곤 하지만 불성실하고 고압적인 사람이 수두룩한 이 곳에서 호쿠토는 놀랄 정도로 성실한 남자였다.


 “처음부터 보았나?”

 “그럼요. 어제보단 많이 익숙해졌어요.”

 “아직도 멀었지만 말이야. 생각 만큼 잘 움직이질 않아서.”

 “처음엔 다 그래요.”


 지금은 이런 식의 보조로 방향을 틀었지만 호쿠토 역시 얼마 전까진 기체를 조종하는 파일럿이었다. 지금처럼 요령이 생기기도 전부터 기체를 다뤘으니 아메히코보다 훨씬 잘 아는 것이 당연했다. 호쿠토가 한 쪽 팔을 든 채 찡긋 눈짓을 해보였다. 아메히코가 어정쩡하게 따라하자 듣기 좋은 웃음 소리가 공중에 퍼졌다. 아메히코의 경직된 자세를 고쳐주며 호쿠토가 그의 팔뚝을 찬찬히 문질렀다. 알려주기 위한 가벼운 접촉임에도 샐쭉 눈을 접어 웃는 호쿠토 때문에 아메히코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굳었어요. 부드럽게 다루는 법을 배워야겠네요.”

 “나름 힘을 빼고는 있다만.”

 “힘을 덜 준다고 해서 부드러워지는 건 아니니까요. 여자를 안는 것과 비슷하죠.”


 덧붙인 말에 아메히코가 고개를 돌려 빤히 응시하자 호쿠토는 생긋 웃어 보였다. 제 옆에 없을 땐 늘 여자들과 함께 였으니 의외인 건 아니었다. 다만 조금 전의 접촉과 상쾌하기까지 한 그 미소가 겹쳐져 불순한 마음이 슬금슬금 피어오른 것이 문제였다. 의도한 걸까, 아니면 착각일까. 아메히코가 간을 보는 사이 호쿠토가 슬쩍 물었다.


 “쿠즈노하씨는 거칠게 하는 타입인가요?”

 “……굳이 따지자면 평범한 쪽이 아닐까.”

 “조금 의외네요.”

 “그런가?”

 “네.”


 아메히코는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말이 아니었다.


 “도와줄 수 있나?”

 “당연하죠. 그걸 위해 왔는 걸요.”


 호쿠토는 기다렸다는 듯 손목에 차고 있던 기계의 버튼을 눌렀다. 공중에 뜬 화면엔 아메히코와 연습용 기체에 대한 여러 기록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빠르게 눈을 굴리는 호쿠토를 잠시 바라보던 아메히코가 살짝 웃었다. 그러곤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기계를 덮어 호쿠토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쿠즈노하씨?”

 “내가 말한 건 그 쪽이 아니야.”


 은근한 시선이 부딪혔다. 침묵이 많은 것을 전했다. 푸른빛을 담은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졌다. 그 눈이 이렇게 접힐 때마다 아메히코는 방금 전과 같은 대사를 수없이 떠올려야 했다. 여유로운 미소와 탄탄하게 자리 잡은 몸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짧은 정적 위로 호쿠토의 시원한 웃음이 쏟아 졌다. 하하하, 웃는 얼굴이 어느 때보다도 상쾌했다. 그런 주제에 아메히코의 손등을 겹치는 동작은 한없이 끈적했다.


 “너무 늦어요.”



 *



 호쿠토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그가 혼자 머무는 방이었다. 아메히코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쓰는 방보다 훨씬 깔끔하고 넓었다. 가운데 크게 자리 잡은 침대 쪽으로 뒷걸음질 치며 호쿠토가 아메히코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일부러 닿지 않는 허공을 향해 쪽, 입을 맞추자 아메히코의 눈이 번뜩였다.


 “이쥬인…….”


 아메히코의 입술이 호쿠토의 뺨을 스쳤다. 귓가를 간질이니 바로 옆에서 푸흐흐 웃음이 터졌다. 아메히코는 그대로 호쿠토를 눕히곤 목을 지나 어깨에 살짝 이를 세웠다. 으응, 간드러진 소리가 새어나왔으나 딱히 아메히코를 말리진 않았다. 아메히코는 티를 올리고 드러난 호쿠토의 상체에 꼼꼼히 입술을 찍었다. 닿을 때마다 매달려 있던 새까만 것들이 소리도 없이 스르륵 사라져갔다.


 발갛게 익은 자국을 곳곳에 새기며 아메히코는 호쿠토의 다리 사이를 문질렀다. 하아, 호쿠토가 숨을 토해낼 때마다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저기에도 이를 세우면 화를 낼까. 속으로만 생각하며 아메히코가 손을 허벅지 위를 미끄러트렸다. 묵직해진 그 주변을 더듬자 위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을 땐 숨을 참는 소리마저 들렸다. 찔러 넣은 손가락을 부드럽게 움직일 때마다 허리가 들썩였다.


 “원래, 이렇게…… 흐응, 공들이는, 아읏, 편인가요?”

 “그럴 상대라면.”


 하얀 허벅지 위로도 입을 맞추며 아메히코가 나직이 답했다. 여린 살을 깨물자 깔린 몸이 바르작거리고 떨렸다. 시트를 꽉 부여 잡는 손 위로 손가락을 얽히며 아메히코가 덧붙였다.


 “원래라고 하기엔 네가 처음이지만.”


 둥그런 무릎 위로 쪼듯이 입을 맞추자 위에서 탄성이 흘렀다. 느낄 때마다 민감하게 떨리는 몸이나 낮게 터지는 신음이 모두 사랑스러웠다. 낯간지러운 수식어였다. 그러나 발갛게 달아 오른 얼굴로 헐떡이는 호쿠토를 내려다 보고 있으면 그 말 외엔 떠오르지 않았다.


 울긋불긋한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아메히코가 제 것을 꺼냈다. 입술로 몸을 탐하는 사이 열심히 풀어 놓은 아래가 환영하듯 발씬거리고 있었다. 그곳에 제 끝을 맞추자 호쿠토가 길게 숨을 뱉었다. 긴장과 함께 흥분이 서려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호쿠토가 다시금 씩 웃어 보였다. 아메히코가 몇 번이고 곱씹었던 바로 그 미소였다. 더 참는 대신 아메히코는 그 안으로 제 것을 밀어넣었다.


 “쿠즈, 노하…… 씨…….”


 달콤한 음성에 이름이 녹아내렸다. 그냥 피부에 닿는 모든 것이 달았다. 공기 중에 흐르는 웃음 소리마저 진득했다. 놓치기 아까운 마음에 아메히코는 다급하게 그 입술을 찾아 들었다. 답하듯 금방 벌어지는 입 안에 혀를 찔러 넣으며 아메히코는 눈을 감았다.



 *



 “거짓말쟁이.”

 “갑자기 뭔가.”

 “평범한 쪽은 절대 아닌 것 같은데요.”


 아직 침대에 드러누운 채 호쿠토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베개에 반쯤 고개를 파묻고 있어서인지 반쯤 먹혀들어간 말투가 어쩐지 칭얼거리는 것만 같아 아메히코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런 모습도 귀엽다고 생각하는 자신은 더 우스웠다.


 “그렇다고 거친 편은 아니지 않나.”


 이불 밖으로 빼꼼 나와 있는 호쿠토의 손을 보며 아메히코가 답했다. 그 시선을 눈치 챘는지 호쿠토가 팔을 들어 팔랑팔랑 흔들어보였다. 새하얀 팔 위로 울긋불긋한 자국이 마치 손자국처럼 피어나 있었다.


 “대신 집요하죠.”


 타박하듯 말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기분 좋아 보여서 아메히코도 덩달아 그런 기분이 되고 말았다.



 *



 오늘은 이른 시간부터 아침 훈련이 있었다. 아메히코가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하고 훈련을 마쳤을 땐 벌써 점심이 지나 있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늦추며 아메히코는 오늘 한 번도 보지 못한 호쿠토를 떠올렸다. 오후엔 볼 수 있을까. 고작 하루 반나절 못 봤다고 그리워진 얼굴을 상기하는 사이, 모퉁이 너머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아메히코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모퉁이를 지나 걸어 오는 반가운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 내려가고 말았지만.


 “이쥬인. 어딜 다녀온 거지?”

 “아, 쿠즈노하씨. 잠깐 볼 일이 있어서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일이라면 내가 아니라 네 쪽에 있던 것 같은데. 혀끝까지 매달린 말을 차마 꺼내진 못하고 아메히코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 기껏 정성을 들여 모두 떼어 냈더니 보람도 없게 다시 또 주렁주렁 매달고 왔다. 여전히 호쿠토에게서 나오는 어둠은 아니었다. 꼭 일부러 붙인 것 마냥 찰싹 엉겨 있는 까만 덩어리들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덕지덕지 가렸다. 걷어 내고 싶다. 끓어오르는 충동에 아메히코가 손을 뻗어 호쿠토의 뺨을 조심히 감쌌다.


 “……쿠즈노하씨?”


 상처 마냥 얼굴에 늘어 붙어 있던 것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사라졌다. 그래도 여전히 검은 부분들이 보여서 아메히코는 당장이라도 이 몸을 눕히고 구석구석 입술을 찍고만 싶었다. 아메히코는 욕구를 억누르며 대신 호쿠토의 피어싱을 손끝으로 간질였다.


 “오늘 밤, 시간 되는가?”

 “……어제부터 생각했는데 쿠즈노하씨 의외로 끈질긴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싫다면 깔끔하게 떨어지지.”

 “그런 말은 안 했는데.”


 호쿠토도 아침부터 제 할 일을 하느라 지쳐있긴 마찬가지였다. 그 피로가 고작 이 사람의 손길 하나가 사르륵 녹는 것만 같아 가슴께가 간지러워졌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은 눈앞의 남자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떨린다는 뜻과도 같았다.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아메히코를 향한 표정이 누그러워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남의 집착은 당하는 입장에서도 즐겁거든요.”



 *



 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뜨거웠다. 호쿠토가 낮은 신음을 토하며 아메히코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둘 모두 오늘 하루를 빡빡하게 보내서인지 평소보다 몸이 더 빠르게 달아올랐다. 아메히코의 손이 지나간 자리마다 열꽃이 우수수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손이 허리를 지나 등 쪽으로 향할 때였다.


 “잠깐.”


 옷을 벗기는 아메히코의 손을 막아 낸 호쿠토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위는 놔두세요.”


 위로 말려 올라간 옷을 다시 아래로 내리며 호쿠토가 아메히코를 끌어 안았다. 싫다는 걸 굳이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뻔히 보이는 것을 무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 어깨에 부비적거리는 호쿠토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이어가며 아메히코는 단정한 옷 아래에서 피어나는 검은 연기를 노려 보았다.


 네가 뭘 끌고 다니는지 모르지? 특히 그 등에 매달려 있는 것들을 어떻게 좀 하고 싶은데.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다짜고짜 이런 말을 꺼내 봤자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 것이 뻔했다. 설명한다한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줄 리도 없었다. 어차피 금방 없앨 수 있으니 설명보단 제가 움직이는 쪽이 빠르기도 했다. 그래도 등허리에 잔뜩 매달려 있는 더러운 것들을 코앞에서 보고 있자니 손이 근질거려 참기가 어려웠다.


 그러고 보면 처음 몸을 섞을 때도 그랬다. 어깨며 가슴, 배, 허리까지 꼼꼼히 입에 담았으나 끝끝내 그 등을 보여주진 않았다. 어쩌면 이것들을 직접 끌어 당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본인이 알고 하는 것이든, 모르고 저지르는 것이든. 차마 등에 닿지 못한 손을 허공 위로 문지르며 아메히코는 호쿠토를 침대 쪽으로 밀어 붙였다. 다행히 몇 번 휘적거리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떼어 낼 수 있었다.


 “날개라도 있는 건가?”

 “……어디서 배운 농담이에요?”

 “……그렇게 반응하니 생각보다 민망한걸.”

 “여기 빨개졌어요.”


 호쿠토가 킥킥 웃으며 아메히코의 귀 끝을 톡 건드렸다. 역시 제가 내뱉기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아메히코 스스로도 제 귀가 타오르듯 붉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에서부터 훅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민망해 하는 아메히코를 보는 일이 재밌는지 호쿠토는 지금까지 중에서도 제일 즐거운 얼굴이었다. 후후, 웃음을 흘리며 호쿠토가 아메히코의 귀를 아프지 않게 씹었다.


 “귀여워요.”


 누가 할 소리를. 급하게 호쿠토를 침대 위로 눕힌 아메히코가 똑같이 호쿠토의 귓가를 씹었다. 혀를 내어 핥아 올리자 흐응, 앓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등을 끌어 안고 있던 손이 슬금슬금 내려가 아메히코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달콤한 소리를 흘리면서도 할 건 다 하는 이 남자야말로 귀여운 존재였다.



 *



 실전 투입 직전의 훈련이라 주어진 기간이 짧았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고, 아메히코에게 남은 시간은 딱 이틀 뿐이었다. 여기서 보내는 것도 이제 끝이다. 마지막에 가까워진 밤을 기념하기 위해 아메히코는 저녁 식사 후 술자리를 찾았다. 홀로 마시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으나 당연하게도 혼자 잡은 약속은 아니었다. 정작 아메히코를 초대한 사람은 일로 인해 늦어지고 있었지만.


 흐르는 노래를 들으며 아메히코는 아침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기체를 다루는 일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완벽에 가까운 결과를 받은 다음 아메히코는 일부러 호쿠토를 불러내 감사 인사를 건넸다. 비록 여자는 아니지만 호쿠토가 말해준 그 방법이 큰 도움이 된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 호쿠토는 시원하게 웃었다.


 “그럼 쿠즈노하씨도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뭐지?”

 “오늘 한 잔 어때요?”

 “……언제라도.”


 정확히는 오늘 밤이 아니더라도, 한 잔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알겠다는 뜻이었다. 아메히코는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눈빛을 받아내며 호쿠토는 벌써부터 잔을 드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럼 이따 봐요.”


 그리고 지금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다소 빨리 오긴 했으나 아메히코는 솔직히 호쿠토 쪽이 먼저 와서 기다릴 거라 생각했다. 느긋히 걸어 오는 아메히코를 향해 챠오! 기분 좋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너무 익숙해서였다.


 다리를 꼬고 앉으며 아메히코는 오후에 우연히 보았던 호쿠토를 떠올렸다. 축 늘어진 어깨와 힘없는 발걸음. 그렇게 기운 없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메히코가 이름을 부를까 고민하는 사이 호쿠토는 근처에 있던 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걸까. 그 뒤로 아메히코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던 그 찡그린 얼굴을 자꾸만 떠올렸다. 그 때 짧게라도 말을 걸었어야 좋았을까. 그러나 아메히코가 보아온 이쥬인 호쿠토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누군가 저를 부르는 순간 곧바로 꾸며낸 미소를 얼굴 가득 그려냈을 터였다. 아메히코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나마 솔직한 민낯을 보여주는 건 잠자리에서만 이었으니.


 그 때 호쿠토가 나온 방향에 있는 건 실험실 딱 하나 뿐이었다. 훈련을 도우려 파견 된 사람이 굳이 그 곳에 갈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발을 무겁게 옮길 때마다 바닥에 질질 끌려가는 매캐한 덩어리들이 제일 거슬렸다. 길게 늘어진 실타래는 실험실 문을 새카맣게 뒤덮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메히코가 몰랐던 것이 의아할 정도로.


 “쿠즈노하씨!”

 “아, 이쥬인.”


 곰곰이 기억을 헤집고 있던 때, 어느새 다가온 호쿠토가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 휘어진 눈썹에서 미안함이 뚝뚝 묻어 나왔다. 그 너머로 흘끗 시계를 보자 약속 시간이 살짝 지나가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별로 안 기다렸어.”

 “쿠즈노하씨는 거짓말이 서툴다니까요.”


 호쿠토는 다시 한 번 사과하며 아메히코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 곳에서 몇 번 마신 적 있는지 주문이 능숙했다. 아메히코의 눈이 그의 단정한 머리부터 깔끔한 신발까지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였다. 아까 만큼은 아니지만 남아 있는 것은 여전했다. 바닥을 보자 호쿠토가 걸어온 자리마다 발자국마냥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저 말고 선약이 또 있었나요?”

 “그럴리가.”

 “그럼 지각한 벌은 침대에서 주세요.”


 시선이 다른 데 가 있는 걸 느꼈는지 호쿠토가 잔을 부딪히며 아메히코를 다시 제 쪽으로 불러냈다. 농담 식으로 건넨 유혹은 시선을 잡아 두기 위한 낚시라기엔 미끼가 너무 달았다. 확실히 눈앞에 이런 남자를 앉혀 두고 새까만 바닥이나 보고 있는 건 실례를 넘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잘 마시나?”

 “평범해요.”


 그렇게 말한 것 치고는 술이 넘어가는 속도가 빨랐다. 젖어드는 입술을 훔쳐 보며 아메히코도 같이 잔을 기울였다. 대화는 드문드문 이어졌다. 그 사이를 메꾸는 것은 술과 가벼운 스킨십이었다. 닿을 듯 말 듯 스치는 발끝에 아메히코가 눈썹을 까딱였다. 평소와 비슷해 보였지만 호쿠토의 웃는 얼굴이 다소 풀려 있었다. 배시시 번지는 미소가 나이를 드러냈다.


 “술 맛은 같이 마시는 사람이 결정한다고 흔히들 그러잖아요.”

 “그렇지.”

 “달아요.”


 혀까지 내보이며 어깨를 들썩이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취한 것이 분명했다. 모르긴 몰라도 기분이 들뜬 것만은 확실했다. 아까 보았던 지친 모습 보다는 훨씬 나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 빨리, 더 많이 마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답을 기다리는 강아지 마냥 고개를 갸웃거리는 호쿠토를 향해 아메히코도 원하는 답을 주었다.


 “나도 혀가 아려오는 참이야.”

 “하하, 과장이 너무 심하잖아요.”


 아메히코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툭 치는 호쿠토는 확연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지금 그 말을 꺼내도 되는 걸까. 누그러진 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는 것만 같아 가슴 한켠이 불편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꺼내지 못할 말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아메히코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이쥬인.”

 “네?”

 “등, 아프지 않은가?”


 잔을 쥐고 있던 호쿠토의 손이 흠칫 떨렸다. 늘 여유가 함께 하던 얼굴 표정도 같이 굳었다. 이내 후후, 평소와 같은 웃음이 덧씌워졌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뜬금 없는 말이란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오늘은 더 심각해 보여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군.”


 으음…….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며 호쿠토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메히코는 더 재촉하지 않았다. 바닥이 보이는 잔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호쿠토가 나직이 물었다.


 “어디서 듣기라도 하셨나요? 아니면 미행? 미남의 집착이 즐겁다곤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둘 다 아니야.”

 “그럼 어떻게……?”

 “본인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지.”


 의미심장한 말에 호쿠토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발을 빼고 말을 돌리면 한숨을 쉬면서도 결국엔 받아 줄 상대였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 털어 놓은 적 없는 이야기를 이 사람에게 해도 되는 걸까. 고민하는 동안 호쿠토는 습관처럼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아메히코는 조용히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침묵은 무겁기 보단 오히려 따뜻한 느낌이 들어서 호쿠토는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럴 의도로 마시긴 했지만 정말로 취한 것일지도 몰랐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메히코가 대뜸 호쿠토의 턱을 가로 챘다. 놀라서 깜빡거리는 눈을 마주하며 아메히코는 엄지 손으로 호쿠토의 입술을 쓸었다. 조금 전까지 물고 씹었던 탓에 입술이 까끌했다.


 “아프잖아.”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그래도 잊지 않고 인사를 덧붙인 호쿠토가 이번에는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얼마 남아 있지 않던 액체를 단숨에 삼키며 호쿠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은 이야기는 방에 가서 할까요?”



 *



 “불은 켜지 말아 주세요.”

 “원한다면.”


 살짝 비틀거리며 들어온 호쿠토가 스위치에 손을 올리는 아메히코를 제지했다. 모두에게 제공된 방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기본 조명이 꺼지지 않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리 어둡지 않으니 불을 켜지 않아도 어차피 다 보일 것이다. 그래도 환한 불빛 아래 등을 드러내고 있으면 꼭 그 장소에 있는 기분이 들어 속이 좋지 않았다. 어려운 용어를 속삭이며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강렬한 조명 아래 벗은 채 누워 있는 자신은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방에 들어온 뒤로 호쿠토의 움직임이 조금 느려졌다. 머뭇거리는 모습엔 처연한 구석마저 있어 아메히코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겉옷을 쥔 채 망설이던 손이 아메히코의 팔을 잡아 끌었다. 느릿느릿 뒷걸음질 친 호쿠토가 침대에 살짝 걸터 앉았다. 아메히코는 어색한 미소가 어울리지 않는 남자의 반듯한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고작 이런 위로에도 성실히 인사를 남기는 부분이 또 호쿠토다웠다. 이내 호쿠토가 천천히 옷을 벗었다. 탄탄하게 근육이 자리 잡은 배를 지나 아메히코가 몇 번이고 지분거렸던 가슴이 드러났다. 어젯밤 아메히코가 짓씹었던 흔적이 아직도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노골적인 시선을 느꼈는지 호쿠토가 일부러 그 부근을 문지르며 웃었다.


 끝까지 벗어 던진 옷을 옆에 살며시 내려둔 호쿠토가 침대 위로 누웠다. 정면으로 바르게 누운 몸은 몇 번을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자칫하면 넋을 빼고 바라볼 정도로. 구석구석 와닿는 시선이 호쿠토에게 흥분과 긴장을 동시에 선사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선명했다. 호쿠토가 등을 돌리는 동안 아메히코는 허리를 숙여 짧은 머리칼에 키스했다.


 조심스러운 움직임엔 묘하게 시선을 잡아 끄는 힘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놓지 말고 봐달라는 듯 기울어진 어깨가 호소하고 있었다. 마침내 호쿠토가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보기 좋게 자리 잡은 등근육과 손에 찰싹 감겨 오는 피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덮는 커다란 상처가 숨을 내쉴 때마다 잘게 떨렸다.


 등을 길게 가로지른 것은 커다란 흉터였다. 움푹 패인 부분도 있는가 하면 볼록하게 튀어 나온 부분도 있어 어떻게 보아도 사람이 입힌 상처는 아니었다. 얼굴을 베개로 가린 채 시트를 꽉 쥔 호쿠토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메히코의 숨결이 등에 닿을 때마다 상체가 움찔 흔들렸다. 아메히코는 빨갛게 익은 호쿠토의 목덜미에 먼저 입을 맞추었다.


 소중한 물건을 쓰다듬는 것 마냥 천천히, 부드럽게 아메히코의 손끝이 호쿠토의 등을 훑었다. 상처 자국을 따라 올라가는 손길은 간지럽고, 뜨겁고, 동시에 상냥했다. 호쿠토의 입에서 달뜬 신음이 터져나왔다.


 “읏, 아……!”

 “아픈가?”

 “아뇨, 그게 아니라…… 흐응, 그쪽은, 좀, 민감하니까…….”


 반쪽만 보이는 얼굴이 붉었다. 솔직한 대답에 감사 인사를 건네며 아메히코는 아예 고개를 숙여 호쿠토의 등허리에 입술을 묻었다. 하읏, 짧은 신음과 함께 상체가 들썩였다. 아메히코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이어진 흉터에 조심히 입을 맞추었다. 살결과 이어진 울퉁불퉁한 부분에 살짝 혀를 세우면 호쿠토가 시트를 꽉 쥐고 헐떡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픔을 느끼기엔 오래 된 상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잊기엔 이른 상처이기도 했다. 엉덩이로 이어지는 꼬리뼈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자 얕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허벅지를 아프지 않게 잡고 벌리자 헉, 호흡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메히코가 다시 입술로 등허리를 간질이자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좋다고 속삭이는 소리는 혼잣말이라기엔 과하게 끈적거려서, 아메히코는 더한 쾌락을 선사하기로 마음 먹었다.



 *



 개운하면서도 지끈거린다. 상반되는 생각을 하며 호쿠토가 반짝 눈을 떴다. 아직 시간을 확인하지도 않았지만 꽤 늦은 오후임을 알 수 있었다. 아침이라기엔 주변이 너무 고요했다. 무엇보다도 늘 찌뿌둥했던 몸이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 마냥 말끔해져 있었다. 꼭 하루를 수면으로 날려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끄응 소리를 내며 뒤척이던 호쿠토가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아메히코의 시선이 쏟아졌다. 아직 허리가 아릿했다. 눈앞의 미남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지만.


 “좀 더 자는 게 좋을 거야.”

 “잘 수 없게 만들었으면서…….”


 호쿠토의 투정에 아메히코가 작게 웃었다. 아직 목소리에 나른한 숨이 섞여 있었다. 어제 술도 마신데다 그만큼 시달렸으니 아직 힘들 게 뻔했다. 베개 위로 얼굴을 부비적거리던 호쿠토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허공을 향해 양 팔을 쭉 뻗었다. 아메히코가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자 호쿠토가 픽 웃었다.


 “이젠 안아주지 않는 건가요?”


 장난기 섞인 어리광을 듣고 나서야 아메히코가 얼른 호쿠토를 잡아 일으켰다. 그의 품에 안기며 호쿠토가 아이처럼 웃었다.


 “술이 덜 깼나?”

 “그럴리가요. 세 번쯤 했을 때 이미 다 깼어요.”

 “뭐, 그것도 그렇지.”


 아메히코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아래서 킥 웃음이 터졌다. 그러곤 아메히코의 등을 감싸듯 안겨왔다. 넓은 등을 끌어안은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역시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원래 이렇게 어리광이 많았나?”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네요. 이대로 자도 될까요?”

 “……이 자세라면 많이 불편할 텐데.”

 “음,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누워 있기가 조금 곤란해서요.”


 알쏭달쏭한 대답에 아메히코가 눈썹을 찌푸렸다. 호쿠토는 살짝 민망한 듯 눈을 아래로 내려 그 시선을 피했다.


 “등이…….”

 “아파?”


 끝까지 듣지도 않고 다급하게 묻는 표정이 진지해서 호쿠토는 말하다 말고 얼굴을 붉혔다. 본인 잘못이 아니니 미안해 할 필요는 없는데. 아니, 탓이라면 탓이긴 했다. 아픈 게 아닐 뿐.


 “아직 예민해서 닿으면 좀…….”


 말끝을 흐리는 호쿠토의 얼굴에 다소 민망함이 번져 있었다. 혹시? 아메히코가 일부러 손끝을 세워 호쿠토의 등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주욱 훑어 보았다.


 “흐앗!”

 “……이쥬인.”

 “아, 안 된다니까요!”


 정말 당황했는지 화들짝 놀란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더 높았다. 그것도 아메히코가 이번엔 손바닥으로 넓게 등을 쓸어내리자 순식간에 흐앙, 하고 달콤한 신음으로 변했다. 아메히코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래서 누울 수가 없다고?”

 “……네. 그렇다고 엎드리면 또 허리가 아파서.”

 “나한테 안기면 이렇게 계속 건드릴 수도 있는데?”

 “장난은 거기까지만 해주세요…….”


 등을 쿡 찌르면 또 움찔거리고 파드득 떠는 것이 못내 사랑스러워 이번엔 아메히코도 크게 웃고 말았다. 호쿠토의 눈동자가 그 호쾌한 웃음에 박혔다. 잔잔한 미소와 함께 저를 내려다 보던 얼굴도 가슴이 두근 거릴 정도로 좋았지만, 이런 표정 역시 설레긴 마찬가지였다. 빤히 꽂히는 시선에 아메히코는 조금 장난기가 돋았다. 아메히코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본 호쿠토가 재빨리 그의 입술을 삼켰다.


 “이걸로 봐주세요.”


 대답이 없자 호쿠토는 다시 입을 맞췄다. 아래로 축 떨어진 눈썹이 간절히 외치고 있었다. 정말 힘들다고. 아메히코라고 거기까지 호쿠토를 놀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호쿠토가 저 때문에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것이 제 욕망 어딘가를 자극한다는 것까지 부인할 수는 없었다. 어린 아이 같은 생각을 접으며 아메히코는 대신 밤 동안 혼자 했던 추측을 물어보기로 했다.


 “기분 나쁜 게 아니라면 조금 더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

 “괜찮아요. 무슨 얘기죠?”

 “피부 위의 흉터를 덮는 치료는 그리 어려운 게 아니야. 더군다나 여기서 일했다면 더더욱 깨끗하게 처리가 가능 했을 테고.”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만큼 치료 기술이 가장 발달한 곳도 바로 이 곳이었다. 호쿠토는 쓰게 웃었다. 보여주려 마음 먹은 순간부터 이미 예상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좀 사정이 있어서 바로 치료 한 게 아니에요. 뭐, 그래도 도움이 됐으니까 괜찮지만.”

 “도움?”

 “음…….”


 답지 않게 호쿠토는 말을 흐렸다.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라면 대답 하지 않고 넘어가도 좋았다. 멋쩍은 웃음이 마음에 계속 걸리는 것을 무시할 수만 있다면. 저보다 경험도 훨씬 많고 능숙하기까지 한 어린 선배가 왜 이렇게 안쓰러워 보이는 것인지, 기분 나쁜 불쾌감이 안에서 소용돌이 쳤다. 물론 원인은 그가 아니라 그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든 다른 요소들이었다.


 “쿠즈노하씨는 우리가 싸우는 적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계신가요?”

 “배운 만큼은 말이지.”

 “그걸 위해 필요했거든요. 그 때는 아직 체계적으로 자리 잡기 전이고 정보도 많이 부족했어서. 제게 남은 흔적은…… 중요한 단서가 되어 주었고.”


 손이 닿지 않는 등을 숨기듯 호쿠토가 움츠러들었다. 짧은 설명만으로도 아메히코는 대략적인 이해를 마쳤다. 이름도, 출처도, 목적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생명체와 조우한 것이 불과 몇 십 년 전이다. 아메히코 역시 그 때를 겪은 사람이었다. 상대를 알기 위해선 그가 남긴 흔적을 샅샅이 뒤져보는 수밖에 없었다. 두고간 부품, 떨어뜨린 살점, 퍼뜨린 무기, 하다 못해 누군가가 입은 상처까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투 중 호쿠토의 등에 그것의 발톱이 아예 박혀버렸다. 일부러 노린 것처럼 딱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의 깊이였다. 정신을 잃은 채 돌아 온 호쿠토를 본 상사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발톱의 제거가 느려진 것도, 상처를 치료하는 일이 늦어진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병원인지 실험실인지 알 수 없는 곳을 넘나들며 호쿠토는 담담히 모든 상황을 받아 들였다. 애초부터 거부권은 있지도 않았지만 만약 있었다고 해도 결국 고개를 끄덕일 터였다. 이게 모두를 위한 일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 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다. 괜찮다고 말했고, 스스로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아물지 않은 흉터를 지속적으로 헤집고 피를 뽑는 건 고통 그 이상의 짐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걸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리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쥬인 호쿠토이기 때문에.


 “그것도 이젠 다 끝났고 지금은 정기적으로 검사만 받는 정도라 괜찮아요.”

 “괜찮다, 고?”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호쿠토는 태연했다. 이 말을 듣는 이가 아메히코가 아니었다면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갈 만큼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굴기엔 아직도 흉터가 깊게 남아 있는 채였다. 입을 열 때마다 그 안에서 많은 감정이 뭉쳐 술렁이는 것을 아메히코가 놓칠 리 없었다. 지금까지 들어 본 적 없는 낮고 진중한 목소리에 호쿠토가 얼떨덜하게 답했다.


 “예에……. 이젠 문제 없으니 괜찮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메히코의 눈이 사나워졌다. 연보랏빛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첫인상과 달리 언제나 뜨겁다고 생각했던 눈이었다. 이쥬인, 나직이 이름을 부르며 저를 내려다 볼 때면 뱃속이 간지러워질 만큼 그 열기가 느껴지곤 했다. 처음 느끼는 냉기에 호쿠토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놀란 표정은 평소와 달리 꼭 그 나이대의 어린 아이처럼 보여 아메히코는 더욱 입이 썼다.


 “……쿠즈노하씨?”

 “그런 걸 물은 게 아니야. 네가 괜찮았냐고 물은 거다.”


 깊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가 위로의 빛을 띄고 있었다. 호쿠토가 입을 벙긋거렸다. 열었다 닫히는 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안에 있던 무언가가 툭 터진 소리만이 겨우 새어나왔을 뿐이었다. 아메히코의 어깨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수천 번 말해왔던 네 글자가 목구멍에서 콱 막힌 듯 뱉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푸른 눈동자가 축축히 젖어 들었다. 차오른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순간 아메히코가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뺨을 핥고 눈물을 삼키는 동작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늘 그렇듯 둘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럼에도 확실히 전달 되는 것은 있었다.


 한참 뒤에야 호쿠토가 입을 열었다.


 “……이젠 괜찮을 것 같아요.”

 “그거 다행이군.”


 어깨에 닿아 오는 호쿠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메히코가 나직이 웃었다. 호쿠토의 손가락이 시트 위를 두드렸다. 천천히 리듬을 만들어내다보니 이유도 없이 대뜸 그 말이 하고 싶어졌다.


 “어릴 땐 피아노를 쳤었어요.”


 아메히코의 시선이 흘끗 호쿠토의 손으로 향했다. 동시에 손가락 하나하나에 짧게 입을 맞추었던 언젠가의 밤이 떠올랐다. 간지럽다며 웃었던 호쿠토의 얼굴 역시 생생했다.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직접 보지도 않았는데 막연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러운 것들과 싸우는 전쟁터보단 그런 쪽이 더 어울리는 남자였다. 터지는 굉음, 흐르는 피, 이를 악문 채 쏟아 지는 것을 견디는 우주보단 박수가 터지고 땀이 흐르고 웃는 얼굴로 설 수 있는 화려한 무대가 훨씬 어울릴 터였다.


 “기회가 된다면 듣고 싶군.”

 “지금은 손이 굳어서 예전 같은 소리는 안 나올 걸요.”

 “그건 그것대로 좋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에 호쿠토가 기분 좋게 웃었다. 피부 위로 전해오는 따뜻함이 좋아서 둘은 한참 서로를 끌어 안고 있었다.


 편안한 침묵을 깬 것은 호쿠토의 알람 소리였다. 계속 안고 싶다는 이유로 호출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메히코도 순순히 호쿠토를 놓아 주었다.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자 아메히코가 다시 호쿠토를 가볍게 안았다 멀어졌다.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흐르는 공기마저 간지러워서 어쩔 수가 없었다.


 호쿠토가 준비를 하고 옷을 입는 동안 아메히코도 시트를 정리했다. 주인도 없는 방에 혼자 남아 있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어제 하루 돌아가지 않았으니 이유를 물을 지도 몰랐다. 대충 그럴 듯한 답을 생각하는 사이 호쿠토가 준비를 마쳤다. 먼저 나가려는 호쿠토의 등을 아메히코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침까지 계속 민감할 정도로 만졌으니 더러운 것들이 아직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단단하고 깨끗한 등이 눈부셨다. 절로 미소가 나오는 것은 뿌듯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호쿠토가 문을 열기 직전, 아메히코가 그를 불렀다.


 “이쥬인.”

 “네?”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호쿠토가 놀라 멈칫했다. 아메히코가 코끝이 스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놀란 호쿠토가 주춤하는 사이 아메히코가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여전히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였다. 보라색의 눈동자가 호쿠토의 놀란 얼굴을 담았다.


 “키스 해도 되나?”

 “……물론이죠.”


 대답과 함께 천천히 입술이 겹쳤다. 부드럽게 안쪽을 파고드는 움직임에 호쿠토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수도 없이 입을 맞추었지만 이 사람과 하는 키스는 늘 처음처럼 떨렸다.


 “오늘 밤에 찾아 와도 괜찮을까.”

 “이제 와서 묻는 건가요?”

 “우습지만 말이야.”

 “괜찮아요. 쿠즈노하씨라면 언제나 환영이고.”

 “그렇다면 내일도?”

 “……쿠즈노하씨?”


 속삭이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려 있었다. 그보다 더한 욕망이란 이름의 감정이 뚝뚝 묻어 나왔다.


 “내가 이 곳을 떠나는 날에도, 다시 돌아온 날에도, 아무것도 아닌 날에도. 이쥬인, 네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

 “그건…….”


 가볍게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진심일 수록 사람은 말을 고르기 마련이었다.


 “저는 당신에게 줄 게 없어요. 피 한 방울 마저도 내 몫이 아닌 이 몸 밖에는.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이제 와서 묻는 건가?”


 조금 전과 같은 대답에 호쿠토 얼굴 위로 옅은 웃음이 번졌다. 아메히코를 올려다 보는 푸른 눈이 맑게 빛났다.


 역시 처음 봤던 그 때와 다르지 않다. 주변에 무엇을 얼마나 달고 있든 이 남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이다. 그 더러움 속에서도 깨끗하다는 수식어를 달아주고 싶을 만큼. 호기심보다 훨씬 커진 감정을 담아 아메히코가 다시 한 번 호쿠토를 불렀다.


 “이쥬인.”

 “네.”

 “사랑한다.”


 발음 조차 어색한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 단어가 틀림 없었다. 호쿠토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어느 때보다도 산뜻한 표정이었다.


 “저도, 좋아합니다.”


 만족하지 못 했는지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손이 여전했다.


 “그것 뿐?”

 “……역시 집요해요.”

 “즐겁다고 한 건 네 쪽이야.”

 “하하, 그것도 그랬죠.”


 아메히코가 보고 싶어 했던 깨끗한 미소가 눈앞에 있었다. 허공을 울리는 목소리마저 곧았다.


 “사랑해요.”


 귓가에 속삭인 고백은 간지러웠다. 쪽,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는 입맞춤은 더욱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