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달여울)
*
언제부터인가 하랑은 제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그런 것은 아니었고, 몸이 가누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티엔의 앞에만 서면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방금 수련을 마친 것도 아니고, 힘을 소모하지도 않았는데 이러다 들리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장은 쿵쾅거리고 방망이질쳤다. 하랑이 당황해서 제 가슴께를 꾸욱 누르며 진정시키려 애를 쓸 때면 티엔은 여상한 얼굴로 다가와 이마에 가지런히 손을 올렸다.
하랑, 어디 아픈가?
아, 아프긴 무슨……
당황한 하랑이 티엔의 손을 찰싹 쳐냈다. 살짝 눈치를 보는 하랑과 달리 티엔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민망해서 멀쩡한 이마를 문지르는 하랑을 슥 쳐다본 티엔이 손을 움직였다.
꾀병 부리지 말고 연습하도록.
꾀병이 아니라며 흥분해서 변명을 하는 대신 하랑은 도르륵 눈을 굴렸다. 설마 진짜 자신이 꾀병이라도 부리는 걸까 하며. 제 상태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하랑이 한심하면서도 우스워 티엔이 가볍게 하랑의 머리를 톡톡 쳤다. 기분 나쁠 수 있는 행동임에도 손짓에는 어떤 악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랑은 대답하는 대신 티엔 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티엔은 평소와 다름 없는 눈으로 하랑을 내려다 보았고, 하랑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종일 하랑이 제대로 수련에 임하지 못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랑의 상태를 진작에 눈치 채고 있던 티엔은 부러 하랑의 곁에 가는 대신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기만 했다. 그나마도 티엔의 시선이 제 등이며 뒷통수에 꽂히는 것이 느껴질 때면 하랑이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늘어놓아서, 결국 티엔은 나즈막이 한숨을 쉬며 아예 자리를 떠야 했다.
티엔도 사라지고, 제게 꽂히는 시선도 없어지고 나서야 하랑은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정말 어느 순간부터 티엔을 바라보기가 힘겨워졌다.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티엔인데, 기억도 할 수 없는 어떤 날을 기점으로 티엔은 확 달라져 있었다. 정확히는 하랑의 눈에 담기는 티엔이.
하랑이 앞 코로 애꿎은 바닥만 툭툭 치며 뒷짐을 졌다. 티엔이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긴 했지만 그런다고 집중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영문도 알 수 없이 휘몰아치는 감정 때문에 피곤한 것은 하랑 쪽이었다. 이유를 알면 해결이라도 하지, 원인도 알 수 없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하랑이 옅은 한숨을 쉬자 귓가에 으르렁거리는 낮은 울음 소리가 퍼졌다.
아해야, 무슨 일이 있느냐?
신령이었다.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신령이 삐뚜름히 서서 하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속 시원히 털어놓고도 싶었다. 잠시 망설이던 하랑은 곧 근처 의자에 철푸덕 엉덩이를 붙였다. 신령은 여전히 비딱하게 서서 하랑을 주시한 채 였다.
아니, 그냥 좀… 요즘 상태가 좀 별로인 것 같아서.
하랑은 정말 알 수 없단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걸리는 것이 없었다. 그저 티엔이 옆에 있을 때 그가 무척 신경 쓰이고, 어째서인지 호흡이 가빠지며 손발이 어긋나게 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 무엇도 다를 것이 없었다. 저가 왜 이러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하랑으로선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의 변이였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털어 놓을 대화 상대라곤 신령 뿐 이었다.
신령은 비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신령에게 있어 하랑은 아주 어리숙하고 나약한 존재였다. 물론 신령은 하랑을 필요로 했지만,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 온 신령이 볼 때 하랑은 아직 어린 아이나 다름 없었다. 그 일렁이는 속 마음을 모를 정도로 신령은 아둔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것을 하랑에게 있는 그대로 설명해주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몸 상태는 별반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단순한 핑계는 아니더냐?
정곡을 쿡 찌르는 말에 하랑이 입술을 짓씹었다. 몸 상태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자면 마음 상태가 이상한 쪽에 가까웠다. 한참이나 말을 고르던 하랑이 여즉 서있는 신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신령의 입가엔 여유로운 미소가 가득 했다.
뭔가 알고 있지?
무엇을 말이냐.
내가 왜 이러는지… 너는 알 거 아냐.
하랑은 정말 궁금한 눈치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하랑의 얼굴이 새삼 아이처럼 느껴져서 신령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하랑의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순수한 의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신령은 하랑이 원하는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하랑이 왜 티엔의 앞에서만 서면 평소처럼 굴 수 없는지는 그 누구보다 신령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허나 말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말한다고한들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랑이 해결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므로.
켕기는 것이라도 있는게 아니냐.
그런게 있을리가….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신령에게서 돌아오는 답이 허무해서 하랑이 툴툴거리며 입술을 내밀었다. 언제부터 이리 된 것인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평소의 저가 아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온 몸에 간질간질한 감각이 들어찬다. 하랑도 바보가 아니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대체 어떤 연유로 이렇게 된 것인지가 의문일 따름이었다.
하랑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티엔을 처음 만난 날부터, 그와 대화를 쉬이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제법 친해졌던 날과, 언성을 높이며 다투던 날, 지겹도록 이어지던 수련의 나날까지 모조리 떠올려봤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찾을 수 없었다. 다시 깊은 생각에 잠긴 하랑의 눈동자가 고요했다.
신령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작게 웃었다. 하랑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티엔에 대한 마음이 폭발하기 시작한 기점은 하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제게 있었으니까. 그 때 하랑의 겉가죽을 하고 그 안에 똬리를 튼 것은 신령이었으니 하랑은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도 그 날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었다.
몰래 하랑의 몸을 차지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하랑이 모든 것을 알고 있진 않지만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았다. 간혹 신령이 제 몸을 쓴다는 것 쯤은 하랑도 알고 있었다. 그 빈도수가 제가 생각하는 것만큼 적지 않다는 점은 몰랐지만. 어찌됐건 그 날도 신령은 하랑의 몸을 한 채 여기저기를 거닐었고, 티엔을 마주쳤다. 신령은 티엔을 마주한 것이 제게 있어 득인지 실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을 살았는데도 그 순간만큼은 지금도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신령은 티엔과 시선이 얽히고, 대화를 하는 것을 내심 바라곤 있었으나 하랑이라는 껍질 안에 숨겨진 제게 날을 세우는 매서운 얼굴을 보고 싶던건 아니었다.
평소에도 늘 그러고 다니나?
무엇을 묻는 것이냐.
그 바보가 그리 순순히 몸을 내어주냐고 묻고 있는거다.
티엔이 하랑을 다그치고, 그에게 화를 낸 적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지금처럼 날카롭게 바라본 적은 처음이었다. 잘 벼무린 칼날처럼 예리하게 날을 세우면서도 신령을 노려보는 그 눈동자만은 무서우리만치 차가웠다. 신령은 주먹을 꽉 쥐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해의 허락이 필요한 일은 아니지.
여유로운 대답에 티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둘 사이의 거리는 가깝지 않았으나 그 공기만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했다. 신령은 저를 쏘아보는 티엔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마주했다. 목이 바싹 탔다. 물론 무서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신령의 목을 긁고 있었다. 티엔과 만난 것이 신령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지니든, 그동안 잘 다스리고 있던 감정을 봇물처럼 터져나오게 만든 기점임은 분명했다.
더 말을 이어가려 할 때 근처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고, 티엔은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령이 잠시 빌려 쓰고 있던 하랑의 몸도 반응하듯 꼼질거렸다. 신령은 다시 하랑에게 몸을 내어주기 전에 티엔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욱 살펴보았다. 티엔은 굉음에 정신이 팔려 신령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신령은 노골적으로 그를 훑으며 천천히 입술을 축였다. 타오르는 갈증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였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덧없는 회상에 잠겨 있던 신령을 깨운 것은 하랑이었다. 일어나 자세를 잡은 하랑은 잡 생각을 떨구고 다시 수련을 할 준비를 했다. 으음, 고민하듯이 미간을 찌푸린 하랑이 몇 번이고 포즈를 바꿔 잡았다. 신령은 사라지는 대신 말없이 하랑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입맛이 썼다.
아해야.
응?
연모한다.
뭐?
…그를, 연모하고 있는 것이 아니더냐?
화들짝 놀란 하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내 합 다물어졌다. 정곡을 찔린 사람마냥 하랑이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저도 생각하고 있던 결론이긴 했으나 다른 이의 입에서 들으니 민망한 감이 있었다.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하랑이 다시 신령의 얼굴을 바로 마주했다. 신령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아, 진짜… 내가 왜?
…….
근데 나도 바보는 아니라서 진짜 그런 것 같단 말야. 왜지?
민망했는지 하랑의 볼이 불그스름해졌다. 뾰로통한 얼굴로 툴툴거리며 하랑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않는 신령을 향해 손을 내젓기도 했다. 투덜거리며 내뱉는 말들은 죄다 같은 내용이었다.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제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티엔에게 그런 감정을 갖는지 이해가 안간다고. 그러면서도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은지 살짝 광대가 말려 올라 가 있었다. 신령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떴다.
뭐야, 말 꺼내더니 갑자기 사라졌네.
혼자 몸을 배배 꼬며 멋쩍게 웃던 하랑이 정신을 차리자 신령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원래 소리 없이 나타났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편이긴 했지만, 제 할 말만 훅 내뱉고 사라지는건 무슨 경운가 싶어 하랑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곧 티엔을 떠올리느라 신령에 관한 것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하랑의 앞에서 사라지긴 했지만 신령은 늘 하랑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랑은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자세를 갖추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 가끔 박자가 어긋나 몸이 무너지기도 했고, 그럴 때면 괜히 발을 구르며 이 자리에 없는 티엔에게 욕지거리를 했다. 신령은 모든 것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 감정의 근원이 저라는 것을 하랑은 평생 알지 못할 터였다. 신령 역시 하랑에게 말해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먼저 말하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눈치채지 못할 테니, 하랑은 앞으로도 제가 티엔을 좋아한다고 착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니, 괜찮아야만 했다. 신령은 답지 않게 붉어진 하랑의 목덜미를 내려다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
쉬이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근래에 하랑은 이런저런 일로 바빴고, 신령은 제 나름대로 감정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피곤했는지 금세 곯아떨어진 하랑의 몸을 몰래 차지하고 나온 신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이 포근히 내려앉은 새벽녘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딱히 할 일이 있는건 아니었지만, 신령은 천천히 문을 열고 그 곳을 빠져 나왔다.
어딜가나.
발을 내딛는 순간 바로 뒤에 익숙한 체향이 느껴져 몸을 멈추고 말았지만.
하랑.
…….
아니, 하랑이 아니지.
언뜻 무뚝뚝해 보이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신령은 피싯 웃으며 고개를 돌려 티엔을 보았다. 팔짱을 끼고 선 티엔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시퍼렇게 번뜩였다.
아해를 감시라도 하는 것이냐.
하랑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 뒷 말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기에 신령은 어깨만 으쓱해보였다. 이렇게 대치하고 있어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아예 밖으로 나가거나. 신령이 가볍게 한 걸음 내딛자, 티엔이 한 달음에 달려 왔다. 코 앞에 선 티엔이 신령을 집어삼킬 듯 노려 보았다.
하랑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
내가 일부러 아해에게 그런다고 생각하느냐?
…….
아해에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곁에 있으니 영향을 받을 뿐이지.
신령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애초에 일부러 하랑의 마음을 뒤흔들 이유도 없었다. 신령은 처음부터 제 마음을 자각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한 것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온 것에 불과했다. 우습게도 신령으로선 불가항력이었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을 그대로 티엔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마냥 굴지 말거라. 우스워보이니.
신령이 나직이 웃었다.
인간, 너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 이 나와 달리.
신령은 마지막 문장에 꾸욱 힘을 주었고, 티엔은 얼굴을 구겼다.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내는 티엔의 얼굴을 살피는 신령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