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 2.5D NOTICE GUEST


 둘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가는 길 내내 서로에게 한 마디 말도 걸지 않았고, 심지어 멀린이 준비해둔 좌석대로 앉지도 않았다. 에그시는 따로 돈을 더 내고 저와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는 찰리 덕에 기가 찬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찰리는 불퉁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일부러 에그시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린이 불렀을 때는 불평 하나 하지 않더니 이제 와서 저러는 이유가 뭐야? 에그시는 기분이 더 나빠졌다.


 찰리는 에그시가 눈치 채지 못하게 아주 잠깐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두기를 반복했다. 찰리는 출발하기 전부터 기분이 바닥을 내리치다못해 아주 땅속으로 꺼질 지경이었다. 내가 왜 저 빌어먹을 에그시 때문에 이렇게 기분 나빠하는 거야? 찰리는 이유를 알지 못해 속만 삭혔다. 실은 제가 왜 이러는지 아주 정확히 알고 있어 더 짜증이 나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일은 일이었다. 손발이 착착 맞을 일은 죽어도 없을 게 뻔했으니 가능하면 빨리 끝내고 돌아가는 편이 나았다. 인적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구석진 곳에 위치한 건물 앞에 도달한 에그시가 조심히 그 너머를 살폈다. 표면상 문을 닫은 건물은 불빛 하나 없이 고요했지만 에그시는 어쩐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캐보면 정말 무언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가득했다.


 “멀린이 보내준 지도를 보면 지하 쪽에 뭔가 더 숨겨져 있는 것 같던데.”

 “아마 그렇겠지.”


 들키지 않도록 몸을 낮게 숙인 찰리가 에그시의 옆에 바짝 붙어 왔다. 감정이 상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일은 깔끔하게 끝내야 했다. 말을 꺼내 놓고 긴장했는지 뻣뻣하게 굳은 꼴을 보아하니 걱정이 앞서기는 했지만 찰리는 곧 별 일이야 있겠나 싶은 마음으로 가볍게 넘겼다. 설마 멀린이 위험한 곳에 우리 둘을 보냈을까? 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머릿속에 새겨둔 지도의 최단 루트를 되새겨보았다.


 “뒤쪽으로 들어가는 편이 더 안전하고 빨라.”

 “그럼 내가 열게.”

 “오, 길바닥에서 그런 기술을 연마했나보지?”


 물론 이렇게 꽉 막힌 건물을 뚫고 들어가는 방법은 에그시도 알지 못했다. 어차피 멀린이 준 장비로 열어야 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찰리는 이죽거리며 에그시의 심기를 건드렸다. 일일이 대응하면 저만 피곤해질 게 뻔해서 에그시는 무시하기로 했다. 에그시가 반응하지 않자 찰리도 곧 조용해졌으나 그의 얼굴 가득 불만이 차올랐다.


 문을 여는 것은 아주 쉬웠다. V자가 크게 적힌 문을 간단히 열어 젖힌 찰리와 에그시는 사방을 살피며 조심히 안으로 들어섰다. 아주 밝은 것은 아니었으나 복도엔 분명히 불빛이 있었다. 빙고. 에그시가 작게 웃는 사이 찰리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들키지만 않는다면 지하로 내려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찰리가 앞서 걷는 동안 에그시는 예민하게 감각을 세웠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날쌔게 반응하는 것은 에그시의 주특기나 다름없었다. 바닥을 밝히는 불이 있다는 이야기는 누군가 분명 이곳에 있다는 말이었고, 그렇다면 침입자를 발견했을 때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몰랐다.


 “야, 잠깐.”


 찰리가 다음 코너를 돌기 위해 몸을 앞으로 빼자 에그시가 다급히 그 팔을 잡아 왔다. 찰리가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에그시는 손가락을 입술 위로 갖다 대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작은 소리긴 했으나 분명 너머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앞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시간 벌 테니까 먼저 아래로 가.”

 “시간을 끌겠다고?”

 “어. 거기서 뭐 빼올 거 있으면 후딱 처리하고 나오면 되잖아. 나 때문에 금방 눈치 못 챌걸?”


 찰리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미간을 좁혔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두 명이 들어왔다는 것을 모두 다 들키고 정면 돌파하는 것보다는 한 명은 미끼로 쓰고 다른 하나가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더 안전한 선택이기는 했다. 하지만 찰리는 에그시의 제안에 따르고 싶지 않았다.


 “에기 널 어떻게 믿고? 시간을 벌기는커녕 금방 쓰러질 것 같은데.”

 “못 믿겠냐? 곱상한 도련님과 달리 난 이런 일에 익숙하거든요.”


 에그시는 빈정거리며 찰리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난 솔직히 길 잘 모른다고. 그러니까 얼른 가.”


 이런 일에 능숙한 베테랑이었다면 둘이 같이 움직이는 편이 더 수월할 수도 있었지만, 마음도 맞지 않는 상태에서 호흡이 척척 맞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서로의 발을 잡아끄는 짐이 되느니 차라리 갈라지는 편이 나았다.


 찰리는 몇 번이고 에그시를 뒤돌아보며 입술을 달싹거리길 반복했다. 제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이 복잡한 감정을 토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찰리는 끝없이 고민했다. 에그시는 얼굴을 팍 찌푸리며 빨리 가라고 손을 휘저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찰리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그럼에도 자꾸 에그시 쪽으로 눈이 가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미적거리며 찰리가 제 뒤로 걸어가는 동안 에그시는 고개를 슬쩍 빼 주변을 살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지만 시끄럽지 않은 것으로 보아 들키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어쩌다가 찰리랑 이러고 있는 거지. 에그시는 멀린보고 들으라는 듯 일부러 소리 내어 말했다. 멀린은 아무 답이 없었다.


 “멀린, 쟤네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봤자 지금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에그시는 벽에 등을 붙이며 오른쪽으로 몸을 꺾었다. 내내 말이 없던 멀린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 에그시, 그 쪽은…. 멀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에그시의 귓가를 때렸다.


 “침입자다!”


 씨발, 언제 들켰지? 순식간에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발소리만 들어도 한둘이 아니었다. 분명히 이 장소는 남아 있는 사람이 없는 폐쇄된 건물이었다. 나 참. 구라도 정도껏 쳐야지! 에그시는 혀를 차며 재빨리 다른 쪽 코너로 몸을 날렸다.


 “우왓!”


 숨을만한 장소는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제법 가까이 다가온 남자들이 에그시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전부 다 무장한 채였다. 당황한 에그시가 버벅거리는 찰나 총알이 에그시의 오른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쓰고 있는 안경이 바닥을 향해 날아갔다. 저도 모르게 가슴팍에 손을 올린 에그시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미친, 이러다 진짜 죽는 거 아니야?


 에그시의 예상대로 여러 개의 총구가 똑바로 저를 향해 왔다. 일단은 숨어야 했지만 그들이 계속 다가온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에그시는 속으로 멀린에게 온갖 욕설을 날렸다. 안경이 날아가는 바람에 입 밖으로 내봤자 멀린은 듣지 못할 터였다. 이런 일에 고작 후보생인 우리를 보내도 되는 거냐고! 에그시가 투덜거림과 동시에 사방에서 총알이 쏟아졌다.


 유연하게 바닥을 구르며 에그시는 벽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두다다 쏟아지는 소리만 들어도 온몸이 오싹해졌다. 한 방만 제대로 맞아도 끝장일 게 뻔했다. 에그시는 강하게 요동치는 심장이 잠잠해질 수 있도록 호흡을 고르다 이내 포기하고 바닥을 찼다. 이 상황에서 침착하게 구는 것은 무리였다.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에그시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야했다. 반대쪽 방향으로 에그시가 몸을 틀었을 때, 그쪽에서도 무장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에그시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탄환이 정면을 향해 날아 왔다.


 “에그시!”


 동시에 어디선가 나타난 찰리가 후다닥 달려와 에그시를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다. 다행히 탄환은 둘은 비껴나갔다. 아야… 에그시는 잔뜩 인상을 쓴 채 제 위에서 숨을 헐떡이는 찰리를 보았다. 저 멀리서 달려왔는지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었다. 눈을 깜빡이며 멀뚱히 그 얼굴을 보던 에그시가 문득 드는 생각에 언성을 높였다. 씨발!


 “멀대 새끼야, 거기서 튀어나오면 어떡해!”

 “그럼 가만히 보고 있으라고?”


 찰리와 함께 바닥을 뒹군 에그시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찰리가 급하게 달려드는 바람에 엉덩이며 머리통이 바닥에 세차게 부딪혔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깟 고통이 아니었다. 에그시는 아직도 건너편엔 무장한 남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고 꽥 소리를 질렀다.


 “몰래 움직이려던 계획이 다 실패했잖아! 너 바보야?”


 조금 전에 급하게 달려든 것과 달리 찰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에그시가 화를 낼수록 찰리의 피는 차갑게 식었다. 저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평소보다도 훨씬 서늘해서 에그시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찰리는 한 자 한 자 씹듯이 말을 이었다.


 “그럼 널 죽게 내버려두란 말이야?”

 “야… 찰리.”


 홧김에 목소리를 높이긴 했지만 찰리가 이런 식으로 반응할 줄은 미처 몰랐기에 당황한 에그시가 눈을 굴렸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하는 말이 가장 먼저 튀어나왔지만 에그시는 가까스로 그 말을 안으로 꾹 눌러 삼켰다. 어쩐지 찰리에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상대가 그 누구도 아닌 찰리라서.


 급하게 몸을 피하던 조금 전보다도 더 머리가 복잡하게 뒤엉켰지만 그렇다고 둘을 향한 탄환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똑바로 저를 보는 찰리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힘겹게 받아내던 에그시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찰리의 팔목을 잡은 에그시가 우선 뒤쪽으로 발을 놀렸다.


 “일단 튀고 말하자.”


 상황 파악을 못 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닌지라 찰리는 순순히 에그시의 뒤를 따랐다. 아무 의식 없이 제 팔목을 낚아챘을 에그시의 손에 절로 시선이 따라 붙었다. 찰리는 두 쪽으로 갈리는 길목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 지 망설이는 에그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답지 않게 흐트러진 머리칼이 얼굴을 간질여왔다. 앞 뒤 상황 생각 못하고 무작정 움직이는 것은 찰리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제 뒤에서 총소리가 들렸을 때, 그리고 그 방향이 에그시가 있는 곳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 찰리는 머릿속으로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발을 내딛고 있었다. 죽지는 않았구나. 에그시와 함께 바닥을 굴렀을 때 찰리는 남몰래 안도의 숨까지 내쉬었더랬다. 이것저것이 뒤엉킨 감정을 채 갈무리하기도 전에 저를 향해 왜 왔냐고 소리를 높이는 에그시에 기분이 팍 상하고는 말았지만.


 건물 내부를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에그시는 순전히 감에 의지해 왼쪽을 택했다. 안타깝게도 길은 얼마 가지 않아 벽을 보였다. 어떡하지? 에그시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으나 답을 내릴 순 없었다.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던 찰리가 에그시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뭐야.”

 “따라오지 않는데?”


 뭐? 에그시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찰리의 어깨 너머를 살펴보았다. 보이는 사람도 없었고 따라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왜지? 에그시와 눈을 맞춘 찰리가 저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순간,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바닥이 푹 꺼졌다.


 “으악!”


 마땅히 잡을 것도 없는 상황에서 둘은 허우적거리며 새까만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오늘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하는 한탄과 함께 멀린의 화난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허공에 떠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자세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착지하는 바람에 엉덩이며 무릎, 어깨, 등 따위가 쑤시고 아팠지만 크게 부러지거나 휘지는 않았다. 에그시와 찰리는 끙끙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작 서너명이 누우면 꽉 찰 정도로 작은 밀실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꼼짝 할 것 같지 않은 문이 한 짝 있긴 했으나 당연히도 잠긴 채였다.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실전은 처음이라지만. 그리고 같이 호흡을 맞춰야 하는 상대가 앙숙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망칠 수가 있는 건가? 팀워크가 맞지 않을 거란 점은 이미 둘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에그시는 저와 찰리를 엮은 멀린을 원망했다. 애당초 서로에게 맞는 부분이라곤 상대방의 성기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자극해야 더 물을 잘 빼는지 정도에 불과했다. 에그시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연락이 안 되는 걸 멀린이 알았으니 백업을 보내든가 어떻게 처리해주겠지.”

 “그럼 그 때까지 이러고 있어야 한단 말이야?”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대답을 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는지 찰리는 제 머리를 잔뜩 헝클었다. 답답하기는 서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공격을 당해서 당황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우왕좌왕할 일은 아니었다. 잘 판단하고 침착하게 굴었다면 이렇게 함정에 빠지는 일은 없었으리라. 이미 밑도 끝도 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순간 둘은 스스로를 자책했으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얌전히 멀린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빌어먹을, 거기서 갑자기 왜 튀어 나와?”

 “구해준 사람한테 할 말이 고작 그거냐?”

 “내가 언제 구해 달랬냐?”


 에그시가 곧장 받아친 말에 찰리는 또 기분이 나빠졌다. 이 엿 같은 상황보다도 에그시의 저런 태도가 더 짜증났다. 찰리는 제 감정의 변화에 둔한 사람도 아니었고 다소 간지럽게 변하는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바보도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제가 의식하고 만들어 낸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 때마다 에그시의 반응은 어땠던가? 오히려 가볍게 웃으며 적당히 받아주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놓고 지금은 왜 저렇게 툴툴거리는지, 찰리는 오히려 제가 에그시를 쏘아붙이고 싶었다.


 찰리는 자신이 지금 짜증을 내고 있다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 것은 해야 했다. 찰리는 에그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구는 것이 싫었다. 그래도 조금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대로라면 달라진 게 대체 뭐야? 만약 정말로 총소리를 듣고도 무시했더라면 에그시를 처음 보았던 그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그럼 내가 뒤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를 다 무시하고 갔어야 한다는 말이야?”

 “야, 과장 하지 마. 비명 지른 적 없어.”

 “너나 말꼬리 잡아 틀지 말고 대답 해.”


 조금 전처럼 찰리는 굳은 눈으로 에그시를 보았고, 에그시는 뒷목을 매만지며 혀를 찼다.


 “씨발, 우리가 해야 하는 게 그거 맞잖아? 그렇게 말하는 게 이상하냐?”

 “에그시. 내가 정말 그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진심으로.”


 차분히 가라앉은 찰리의 목소리는 무척 낮았다. 에그시는 견딜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마구 헤집고는 발을 쾅쾅 굴렀다.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한번 쓸어 올리고, 몇 번이고 입술을 깨물던 에그시가 결국 찰리를 노려보았다.


 “어. 그래.”


 미치겠네, 진짜. 에그시는 도저히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야, 우리 원래 누구 하나 죽어도 별로 신경 안 쓰는 사이잖아? 갑자기 왜 이러는지 존나 모르겠거든, 진짜? 아니, 아니다. 사실은 알 거 같아. 빌어먹게도 내가 눈치가 좀 있잖아. 어?”

 “에그시.”

 “내가 이런 말 진짜 안하려고 했는데, 너 진짜 나 좋아하…!”


 에그시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제법 거칠게 턱을 틀어 쥔 찰리가 그대로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폭력처럼 입술이 맞물렸고, 에그시는 찰리를 뿌리칠 수 없었다. 아래를 만져주며 간혹 얼굴 여기저기 입을 맞추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혀를 잡아 뽑을 것처럼 빨아 오는 것에 에그시는 턱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찰리가 조금의 힘도 빼지 않고 턱 언저리를 억지로 잡아 챈 탓도 있었다. 에그시는 버둥거리다 결국엔 찰리의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어버렸다.


 예상이라도 했는지 찰리는 미약한 신음만 냈을 뿐 얌전히 뒤로 떨어져 나갔다. 그저 얼굴만 멀어졌을 뿐 피가 흐르는 입술을 닦는 찰리의 눈은 여전히 형형했다. 진짜 뭐야. 미치겠네. 에그시는 괜히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다. 핀트가 나간 사람처럼 득달같이 달려들면 에그시로선 막을 재간이 없었다.


 에그시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애쓰며 눈을 도로록 굴렸다. 마지막 말을 하지 말 걸 그랬어. 에그시도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고 찰리가 내심 신경 쓰고 있다는 점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에그시는 그런 낯간지러운 감정이 정말 저와 찰리를 엮어 줄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안 어울리잖아. 물론 목덜미 부근에 쏟아지던 찰리의 간지러운 웃음과 적당히 부드럽게 아래를 감싸던 손 따위는 빌어먹을 정도로 좋았지만 말이다. 그 장소가 부옇게 먼지 쌓인 창고 구석이라고 할지라도.


 어쨌거나 에그시는 아직도 입안에 남아있는 감촉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손을 들어 입술을 벅벅 문지른 에그시가 찰리를 위아래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그 중간에 멈추었다.


 “너 돌았냐?”


 찰리는 답이 없었고 에그시는 살아 온 인생 중에서 제일 빠르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어떻게 하면 회피할 수 있지? 물론 찰리는 답을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든 빙빙 돌아가려 하는 에그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찰리는 조용히 에그시의 앞으로 다가갔고, 에그시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멀어졌다. 침묵이 오히려 더 무섭다. 목이 타오르는 것에 에그시는 꿀꺽 침을 삼켰다. 오르내리는 목울대를 바라보는 찰리의 눈에 서슬 퍼런 빛이 스치는 순간,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머리가 돈 건 너희들이겠지.”

 “……멀린?”


 깜짝 놀라 문 쪽을 바라본 에그시와 찰리 둘 다 얼빠진 얼굴로 그곳에 서있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분명 멀린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어이가 없는데 조금 뒤에는 록시까지 나타났다. 록시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멀뚱히 서있는 에그시와 찰리를 훑어보았다.


 “너희 혹시 진짜로 싸웠니?”


 에그시는 아니라고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제 멱살은 찰리에게 틀어 잡혀 옷매무새가 엉망이었고 찰리는 입술이 터져 피까지 흘렸으니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싸우고 있던 것이 맞았다.


 “설마 했는데 정말 이렇게까지 멍청하게 굴다니 여러모로 놀랍다고 해야겠군.”

 “…설마 이것도 시험이었어요?”

 “아니라는 것에 감사해야 할 거야. 그랬다면 너희 둘은 당장 탈락일 테니까.”


 둘을 바라보는 멀린의 눈빛은 싸늘했다. 평소 에그시가 보아왔던 모습과 달리 완벽하게 무장까지 한 멀린은 익숙하게 총을 제자리에 끼워 넣었다. 에그시와 찰리는 아직도 머리가 멍해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있었다. 록시가 둘을 타박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니?”

 “어… 아, 아니.”

 “혹시 누군가 남아 있을 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서 나와.”


 록시는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다시 가버리는 멀린의 뒤를 따라갔다. 어정쩡하게 서있던 에그시도 뒤늦게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흘깃 쳐다보니 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직 굳어 있는 채였다. 에그시는 칫, 혀를 차더니 찰리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안 가냐?”


 그러고는 찰리가 반응을 보이기 전에 서둘러 이 밀실을 빠져나갔다. 곧이어 찰리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멍청하고 바보 같아 보일 테지만, 에그시는 차라리 멀린이 나타나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소식이 해리의 귀에 들어간다면 세상 가장 아둔한 짓이었다고 두고두고 까일 테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마 멀린이 난입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찰리와 끝까지 갔을지도 모르니까.


 에그시는 여차하면 주먹을 날리기 위해 속으로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상황에서 어떻게 세울 수 있었는지 몰라도 묵직해진 찰리의 아래를 보는 순간 반사적으로 주먹을 쥔 것이었다. 헛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미친 새끼. 그 상황에서 꼴렸어? 찰리도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는지 눈썹이 아주 살짝 꿈틀거렸던 것을 에그시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에그시는 지금처럼 멀린에게 감사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대로 뒤가 따였을 지 몰라. 아니, 거의 확실해. 능구렁이처럼 상황을 벗어나려 해도 꽉 막힌 공간에서는 그것마저 무리였을 게 뻔했다. 물론 무슨 미친 짓이냐고 버둥거리며 반항했겠지만. 하지만 찰리가 제 아래를 쥐는 순간 스스로가 무력해지고 만다는 것을 에그시는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몸이 찰리에게 익숙해져서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었고. 퍽 좋지 않은 생각을 하며 에그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한번 떠올리기 시작한 그림은 끝도 없이 이어져 결국 에그시는 머릿속으로 다 벗은 저와 찰리의 모습까지 그려내고 말았다. 찰리 새끼한테 지랄은 내가 다 했는데 왜 난 이런 걸 떠올리고 있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찰리가 제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면 같은 반응을 보일 터였다. 에그시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오늘의 거칠었던 키스와 늘 부드럽게 닿아오던 커다란 손바닥의 감촉. 에그시는 결국 찰리가 평소처럼 웃으며 가볍게 제 귓가를 간질이던 것까지 생각해내고 말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속삭이는 것도. 맞아, 에그시. 너를 좋아해.


 “진짜 좆같네.”


 조용히 따라오던 찰리가 들었을 지도 몰랐지만, 에그시는 차라리 그래주었으면 했다.



 *



 크게 다친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니라 에그시는 본부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기껏해야 떨어지면서 부딪힌 허리나 엉덩이가 쓰라린 정도였다. 하필 왜 허리랑 엉덩이야? 그야 바닥과 닿은 부분이 그쪽이니 당연한 결과이면서도 에그시는 제 맛이 간 머리통이 아니라 아픈 부위를 탓했다. 여기가 아프니까 자꾸 좆같은 생각만 하게 되잖아!


 에그시는 그 이후 찰리를 보지 못했다. 정확히는 보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찰리는 은근히 저를 피하는 에그시를 억지로 붙잡거나 하지 않았다. 그 역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그시는 이런다고 뭐 좋은 결론이 나오지 않으리란 점을 잘 알면서도 가능하면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해보기로 했다. 늘 그랬듯이.


 오늘 마침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해리가 에그시를 찾았다. 원래대로라면 좋다고 찾아가 해리를 반길 에그시였지만, 이번만큼은 해리를 보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임무를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차마 해리를 마주할 수가 없던 것이었다. 제가 생각해도 멍청이 같았다.


 그냥 바쁘다고 해볼까? 허나 그럴싸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해리라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피해 다니는 에그시를 아주 손쉽게 낚아챌 수 있을 터였다. 에그시는 그냥 해리를 만나기로 했다. 해리는 떠날 때와 같이 흐트러짐 하나 없는 완벽한 모습으로 에그시를 맞이했다.


 “잘 다녀왔어요, 해리?”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는 얼굴에 해리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다치지 않아 다행이기는 했지만 멀린에게 보고 받은 내용은 결코 칭찬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하지만 너는 잘 있지 못했던 것 같구나.”


 하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기에 에그시는 여전히 어색한 웃음소리만 내었다. 그럴 린 없겠지만 내심 해리가 이번 일에 대해 몰랐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었다. 어쩔 수 없지. 말은 그렇게 해도 해리가 제게는 아주 살짝 무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에그시는 아예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해리.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이건 처음이라 그랬던 거라고요!”

 “말은 잘 하는구나, 에그시.”

 “말마따나 전 그저 그런 양아치고 걔는 깐깐한 도련님인데 우리 둘이 팀워크가 맞을 순 없잖아요?”


 뭐, 배는 맞았을지도 모르지만. 물론 에그시는 마지막 말을 안으로 꾹 삼켰다. 그러곤 해리 몰래 제 허벅지를 쥐어뜯으며 내내 그런 생각이나 하는 제 자신을 마구 책망했다. 허나 에그시의 조금 상기된 얼굴을 빠짐없이 주시한 해리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