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몸정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고 했던가. 에그시는 그 말을 절실히 느끼는 중이었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서로 멱살 잡으며 싸우고 시비를 걸고 이죽거리던 사이인데. 물론 몸을 섞었다고 해서 찰리의 태도가 180도 변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찰리는 유치한 장난을 걸고 재수 없게 굴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딘가 누그러져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찰리는 아예 습관이 되어버렸는지 에그시에게 말을 걸 때는 늘 시비조였으나 예전과는 그 결과가 사뭇 달랐다. 마주친 눈에서 불꽃이 튄다고 느낄 땐 이미 서로 하체를 비비고 있었다. 전에는 성욕을 풀려고 서로를 만났다면 지금은 만나면 성욕이 샘솟는 느낌이었다. 에그시는 익숙하게 찰리의 품에 안기면서도 종종 그런 제 모습에 웃음이 나곤 했다.
마땅히 관계를 가질만한 장소도 없었으나 둘은 그 먼지가 뒹구는 창고 구석에서도 마다 않고 서로에게 달라붙었다. 점프 수트에 덕지덕지 먼지가 엉겨 붙어도 좋았다. 에그시는 찰리와 하나가 되는 순간이 갈수록 좋아진다고 생각했다. 내 아래가 얘 모양에 맞춰가는 게 아닐까? 그런 실없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서 작게 웃을 때면 찰리의 폭풍 같은 입맞춤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그런 행위를 이어가면서도 둘 모두 직접적으로 서로에게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둘은 여전히 같은 킹스맨 후보인 에그시와 찰리일 뿐이었다. 관계를 맺으며 분위기에 취해 내뱉는 말이 아니라, 제 감정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낯간지러운 말을 다른 누구도 아닌 서로에게 한다고 생각하면 절로 말문이 막혔다. 인정은 하겠지만 막상 얼굴을 보고 꺼내려 하면 쉽게 나오지 않는 말이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바라보는 눈빛이나 닿아오는 손길은 때로 그 이상으로 다정하고 상냥하여 둘은 사실 말 따윈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서로의 성욕을 풀어주겠다는 목적이 뚜렷했고, 그 다음에는 우선 부딪히고 보자는 다급한 마음이 우선이었다. 위든 아래든 맞물리는 것은 부드럽다기보다 거칠었고 그만큼 난폭했다. 그러나 하나씩 차근차근 맞추어가는 것처럼 에그시는 이제 찰리의 작은 손길 하나에도 크게 반응했고 찰리는 소중한 이를 대하는 것처럼 상냥히 에그시의 피부를 매만졌다.
이제는 에그시도 찰리의 뒷목을 주무르거나 근육이 탄탄하게 자리 잡은 등을 쓸어내리곤 했다. 끈적한 손길에 찰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제 아래를 에그시 쪽으로 더욱 바짝 붙여 왔다. 에그시가 찰리의 양 뺨을 잡고 이마나 눈가 따위에 곱게 입을 맞출 때면 찰리는 에그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에그시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야, 너 눈에서 레이저 나오는 것 같아.”
찰리는 웃음기 섞인 에그시의 목소리를 제 혀로 감아 올렸다. 에그시는 몸을 꿈틀거리며 찰리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질척하게 섞이는 혀가 기분 좋았다. 에그시는 진작 찰리와 키스를 나누지 않은 것을 후회할 정도였다.
찰리는 에그시의 몸 곳곳에 입 맞추는 것을 좋아했다. 제법 다정하게 키스를 해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입술 뿐 아니라 얼굴 여기저기, 그리고 몸 구석구석 모든 곳에 정성스레 입술을 찍었다. 간지러우면서도 소름이 오소소 듣는 그 묘한 감각에 에그시는 몸을 비틀며 투덜거렸다. 찰리, 간지럽다니까.
하지 말라는 말에도 아랑곳 않고 찰리는 에그시의 온몸을 제 입술 위로 그려내었다. 종국엔 에그시에게 간지러우니 그만 하라고 아프지 않게 얻어맞기도 했다. 어깨며 팔뚝 따위를 내리치긴 했지만 사실 에그시도 결코 싫은 것은 아니었다. 말로는 하지 않아도 그럴 때면 사랑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찰리 역시 제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주먹을 휘두르는 에그시를 마주할 때면 저도 모르게 번지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가끔 찰리는 에그시를 꼭 끌어안고서 입술만 벙긋거릴 때도 있었다.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못했지만 에그시는 찰리가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그시는 그를 재촉하거나 제가 먼저 말을 꺼내는 대신 찰리의 등을 도닥이기만 했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오래 갈 사이도 아니잖아. 에그시는 어쩐지 서글픈 마음이 드는 제가 우습다고 생각하며 찰리의 어깨에 살짝 입술을 문질렀다.
*
해리는 살아 온 날이 길었고 그만큼 노련했다. 제가 살아 온 시간의 반도 채 살지 못한 에그시의 감정 따윈 눈에 보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해리는 여전히 바빴고 에그시를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날 때면 종종 에그시를 만났다. 그래서 해리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짐작이었던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확신이 되었다. 해리는 틈만 나면 으르렁거리고 부딪히던 찰리와 에그시의 관계가 상당히 물렁물렁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딱히 그것이 나쁘거나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팍팍한 삶을 살아 왔던 에그시는 제대로 된 연애를 한 적이 없을 테고, 계속 이곳에 갇혀 제 나이 또래인 찰리하고만 마주하다 보면 둘이 눈이 맞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자주 티격태격한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리는 사실상 에그시의 보호자였고 실제 마음도 그러했다. 에그시가 해리를 그렇게 느끼듯 해리 역시 자신이 에그시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고 여겼다. 그런 시선으로 봤을 때 에그시에게 찰리는 그리 맞는 상대가 아니었다. 성격이야 해리가 어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관여할 부분도 아니니 넘어간다 하더라도 그 외의 것들이 문제였다. 해리가 바라는 것은 그저 에그시가 앞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러기에 찰리는 너무나도 부적합한 인물이었다.
찰리 헤스켓은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아서가 추천한 인물이니만큼 그 재력과 권위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에그시는 귀족도 아닌 평민이었고 더군다나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며 겨우 살아가던 소년이었다. 여기서 킹스맨이 된다 하더라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가 될 테니 헤스켓 집안에서는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 확실했다. 물론, 그들은 킹스맨이라는 직업에 대해 모를 테지만 그저 양복점에 취직한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에그시 언윈. 거기다 에그시는 예쁘장한 아가씨도 아니었고 어른들, 특히 귀족들에게 살가운 편도 아니었다. 심지어 찰리와도 싸움이 잦고 종종 충돌했으며 제 의견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고분고분하고 온순한 부잣집 아가씨를 원하는 집안에서 선호할 리 없는 구석을 다 모아 놓은 것이 에그시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설사 찰리가 부모님을 간곡히 설득해 교제를 허락받는다 하더라도 결혼까지는 무리일 터였다. 그 이상까지는 해리가 고려할 문제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둘이 안 좋은 방식으로 헤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질척질척한 감정으로 온갖 곳을 쑤시고 다니다 결국엔 헤어지겠지. 에그시는 상처 받을 것이다. 해리는 에그시가 상처 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감정이 깊어지고 나면 그 상처의 크기 또한 커질 것이다. 그럴 바에 해리는 차라리 일찍부터 그 싹을 잘라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이구나, 에그시.”
“해리! 대체 언제 돌아온 거예요? 놀랐잖아요!”
JB의 털을 가지런히 정리해주고 있던 에그시는 갑작스런 해리의 등장에 놀라 펄쩍 몸을 일으켰다. 연락도 힘들 정도로 바빴던 해리의 얼굴은 에그시가 보기에도 꽤 수척해져 있었다. 에그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해리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잠은 제대로 잔거예요?”
“걱정할 필요 없단다. 그보다 수면이 충분하지 못한 건 네 쪽 같구나.”
해리는 에그시의 퀭한 얼굴을 향해 눈짓했다. 에그시는 어정쩡한 웃음을 걸며 제 뺨을 문질렀다. 어제, 정확히는 오늘 새벽까지 찰리가 끈질기게 붙어 오는 통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에그시였다. 해리는 그에 관해 말을 꺼내는 대신 에그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뜻을 파악하지 못한 에그시가 눈을 굴려 해리를 보았다.
“오랜만이니 같이 식사라도 하는 게 어떻겠니.”
눈을 깜빡이던 에그시가 이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해리! 거절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에그시는 자연스럽게 해리의 손 위로 제 손을 올렸다. 맞닿는 따뜻한 체온에 해리의 입술이 절로 호선을 그렸다. 해리는 제 옆에서 경쾌한 목소리로 재잘거리기 시작한 에그시의 동글동글한 머리를 내려다보며 재차 다짐했다. 이 아이의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해주기로.
해리가 에그시를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근처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찰리와 이미 온 적이 있는 에그시는 아주 살짝 표정을 굳혔다 이내 본래의 얼굴로 돌아갔다. 물론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해리는 에그시를 몰래 주시하며 그를 살폈다. 이런 고급 레스토랑은 처음일 것이 뻔한데도 에그시는 퍽 능숙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것도 모자라 메뉴까지 거침없이 골랐다. 해리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으나 내색하진 않고 다정히 물었다.
“에그시, 요즘 생활은 어떠니?”
“맨날 똑같죠, 뭐. 달라진 거라곤 JB의 무게 정도?”
에그시는 양상추를 입에 넣으며 작게 웃었다. JB가 갈수록 더 살이 찌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해리는 에그시를 한번 죽 훑어보더니 가볍게 웃음을 머금었다.
“주인을 닮아간다고 하지.”
“오, 해리. 저도 살이 쪘다는 얘기예요? 설마.”
“딱 보기 좋을 정도란다.”
해리가 막 에그시를 데려 왔을 때, 에그시는 그야말로 삐쩍 말라 있었다. 보기 나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해리의 눈에는 그것이 영 거슬렸다. 평탄하지 못한 에그시의 삶을 말해주듯 마르고 성한 곳 없는 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해리는 적당히 살이 붙은 지금이 훨씬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아닌 척 하면서 찰리가 이것저것 챙겨주었기 때문이라는 점은 제쳐두고라도 말이다.
해리의 예상대로 에그시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에그시는 찰리와 온 적 있는 레스토랑 내부를 둘러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 찰리 새끼랑 군것질을 너무 많이 했나? 그래도 밤에 칼로리 다 소모한다고 생각했는데. 그제야 에그시는 찰리가 챙겨주는 초콜릿이나 젤리 따위를 무작정 받아먹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했다. 요즘 들어서 내 배랑 팔뚝에 자꾸 집착하던데 이것 때문인가? 찰리가 제 몸의 어느 한 곳도 빼먹지 않고 자주 만지작거리고 쓸어내린다는 사실도 잊고 헛생각이나 하면서.
에그시가 저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해리의 눈에는 다 보였다. 작게 혀를 차는 것까지 놓치지 않고 눈에 담은 해리가 제 몫의 음식까지 에그시 쪽으로 살짝 밀어주었다. 에그시가 의아한 듯 눈을 굴리자 해리는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더 먹어야 키가 크지 않겠니.”
“와우, 해리… 지금 절 놀리는 거죠? 아직도 클 리가 없잖아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에그시는 사양하지 않고 해리가 건네준 고기를 포크로 쿡 찔러 입에 넣었다. 찰리가 주는 군것질거리는 거절한다 치더라도 해리가 주는 것까지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뭐, 맛있는 음식이라서 그런 것도 있고. 에그시는 걱정을 다시 저 뒤로 던지며 고기를 맛있게 우물거렸다.
에그시가 식사를 하는 동안 해리는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에그시가 좋아할만한 것을 은근 슬쩍 그쪽으로 밀어 주며 해리는 조심히 이것저것 캐물었다. 경계심 따윈 하나도 없는 에그시는 해리가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 놓았다. 덕분에 해리는 에그시의 현재 생활이나 상태에 대해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록시는 요즘 좀 바빠 보여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군.”
“물론이죠. 록시는 제가 아는 귀족 중에 제일 멋지고 상냥한 사람이에요. 아, 물론 해리는 제외하구요.”
“그거 고맙구나.”
해리의 양 볼이 우묵하게 패인 것을 넋 놓고 바라보던 에그시가 베싯 웃었다. 해리는 이 틈에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을 슬쩍 화두로 올렸다. 그럼, 헤스켓 군과는 사이가 어떠니?
“찰리요?”
“그래.”
“음….”
에그시는 단박에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해리가 찰리에 관한 것을 물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해서였다. 에그시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하나 상당히 고민했다. 사이가 좋지 않다거나 아직도 조금씩 다툰다고 말하면 해리는 실망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아주 사이가 좋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분명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관계였고 갈수록 더 괜찮게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걸 그대로 해리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대답을 갈무리하던 에그시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여전히 재수 없지만 뭐, 요즘은 그렇게 나쁘진 않아요. 그냥 재수가 없을 뿐이지.”
결국 에그시는 적당히 답을 하며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해리의 눈에는 에그시의 양 뺨이 알게 모르게 발그스름해진 것이 다 보였다. 해리는 착잡해지는 심정을 억누르며 입술을 축였다. 더 감정이 깊어지면 곤란한데. 하지만 해리가 보기에 에그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까지 온 것 같았다.
물론 에그시 스스로는 제 감정이 제법 커졌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찰리가 좋냐 싫으냐를 물으면 좋다에 가까웠지만 그 깊이나 정도는 아직 가볍다고 여겼다. 에그시는 그저 찰리의 어깨에 고개를 묻는 것이 편하고, 손등을 톡톡 두드리다 깍지를 끼는 것이 따뜻하고, 입술에 간질간질한 키스를 하는 것이 좋을 뿐이었다. 기실 이 감정이야말로 사랑의 시작과도 같았으나 에그시는 처음 느껴보는 것이기에 제가 갈수록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물론 찰리와의 감정을 굳이 정의 내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이유도 컸다.
휴우. 실례인 걸 알면서도 해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눈앞의 어린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웃기만 했다. 다시 떠들기 시작한 에그시의 밝은 목소리를 들으며 해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만 해도 에그시는 꽤 능숙하게 테이블 매너를 구사하고 있었고 해리는 그걸 알려준 이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해리는 결국 대화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다 먹었으면 그만 일어나자꾸나, 에그시.”
“좋아요.”
해리는 이제 에그시가 아니라 아예 찰리를 직접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해리가 본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멀린이 해리를 불러냈다. 사실 해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멀린이나 다음 임무 때문이 아니라 찰리를 보는 것이었지만 어차피 그는 하루 종일 이 건물에 있을 게 뻔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선 허락되지 않으니까. 해리는 여유롭게 일정을 틀어 멀린부터 만나기로 했다.
“제가 분명 어제 오라고 말했을 텐데요.”
“중요한 볼 일이 있었네.”
“에그시와 저녁 식사를 하는 것 말인가요?”
해리의 눈썹이 꿈틀거리자 멀린은 더 말을 잇는 대신 미리 준비해둔 파일을 해리에게 건넸다. 파일은 제법 두툼했고 그 안을 살짝 살펴 본 해리는 얼굴을 잔뜩 구겼다. 척 보아도 빨리 끝내기엔 무리인 과제였다. 자료를 다시 정리해 제 옆구리에 끼고도 해리는 곧장 나가는 대신 그 자리에 박힌 듯 서 있었다.
“갤러해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찰리 헤스켓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군.”
“오, 찰리를요?”
멀린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가 이내 평온한 원래 표정으로 돌아 왔다. 해리가 직접 찰리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멀린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해리는 흐트러진 소매를 깔끔히 정리하며 방을 나섰다.
멀린에게서 연락을 받았는지 후보생들이 늘 머무는 방 앞 복도엔 이미 찰리가 서 있었다. 꼿꼿이 자세를 잡고 서 있는 찰리는 영문을 알 수 없단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지 해리가 바로 근처에까지 다가왔다는 사실도 모르는 눈치였다.
실제로 찰리는 그 갤러해드가 대체 어떤 이유로 저를 불렀는지 감도 잡지 못했다. 왜 나를? 에그시가 아니라? 찰리는 해리와 말을 섞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에그시를 추천한 것이 갤러해드, 즉 해리 하트라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굳이 캐내지 않아도 에그시가 시간이 날 때마다 그를 만나곤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찰리는 둘이 단순히 추천인 이상의 관계라고 생각했다. 저와 아서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만나는 경우가 없었으니까.
찰리의 앞까지 우아하게 걸어 온 해리는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찰리를 보았다. 에그시와 크게 다르지도 않는 점프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찰리에게선 자연스럽게 귀족의 태가 흘렀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하네, 헤스켓 군.”
해리의 매끄러운 말투에 멍하니 굳어 있던 찰리가 뒤늦게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해리는 가벼이 웃으며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헤스켓 가문과는 나도 꽤 연이 있다고 할 수 있지. 같이 파티에 참가한 적도 있으니 말이야.”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본론을 꺼낼 수는 없었다. 해리는 아직도 저를 경계하고 있는 뻣뻣한 귀족 도련님이 알만한 이야기를 몇 개 늘어놓으며 적당히 대화의 가닥을 잡았다. 의외로 찰리는 해리의 대화에 그럭저럭 잘 따라갔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갤러해드와 대화하는 것이 불편한지 어딘가 살짝 긴장한 투였지만 몸가짐이나 말투, 그리고 표정까지 어느 부분도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해리는 새삼 찰리가 잘 교육 받은 귀족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에그시에게 있어 좋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해리는 찰리 몰래 표정을 굳히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킹스맨에 지원한 이유가 뭐지?”
“갤러해드, 제가 그런 것까지 당신에게 말해야 합니까?”
“물론 그럴 필요는 없지. 나는 다만 궁금했을 뿐이란다.”
“스파이로 활동하는 멋진 비밀 요원, 남자라면 한번쯤은 꿈꿔보는 직업이겠죠. 어느 정도는 귀족의 의무이기도 하고요.”
찰리에게선 그 나이 또래 특유의 패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면서도 눈빛만큼은 기죽지 않고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에 해리는 작게 웃고 말았다. 해리는 눈앞의 그가 에그시와 알게 모르게 닮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번지르르한 겉모습과 허세가 깃든 말투와는 달리 제법 생각을 갖춘 사내라는 점 역시 비슷했다.
헤스켓 가문을 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해리는 실제로 가주를 만난 적이 있었다. 많은 말을 나눠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시도 때도 없이 제게 시비를 거는 찰리를 욕하던 에그시의 불만 섞인 투정까지 매번 들었던 터라, 솔직히 말해 해리는 찰리에 대해 별로 기대하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은… 해리는 빙그레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에그시와는 잘 지내고 있니?”
물 흐르듯 대답하던 찰리가 그 질문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해리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찰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나한테 이런 걸 묻는 거지? 그러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해서 그 속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찰리는 툭 내던지듯 답했다.
“아주 잘 지내고 있죠. 당신 생각보다도 더.”
풋풋한 질투가 섞인 말투였다. 하마터면 해리는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그래도 잘 포장된 말투와 표정으로 막힘없이 대화를 잇던 조금 전과는 달리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해리는 여기서 서둘러 대화를 끝내기로 했다. 찰리의 얼굴만 봐도 갤러해드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별로 유쾌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보였다.
대답 고마웠네. 앞으로 힘내게. 해리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선 몸을 틀었다. 찰리는 말이 없었다. 해리는 그대로 걸어가려 했다.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찰리의 중얼거림이 발목을 잡지만 않았어도 금세 이 복도를 빠져나갔을 터였다.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아. 아주 잠깐 걸음을 멈췄던 해리가 이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해리는 바로 어제 에그시와 대화를 하며 느꼈던 것을 찰리에게서도 똑같이 느끼고 말았다. 찰리는 생각보다도 더 많이 에그시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해리는 찰리의 안에 소용돌이치던 온갖 나쁜 종류의 감정이 이제는 에그시를 보듬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변하고 있는 것까지 모조리 다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찰리가 보이지 않게 코너를 돌고 나서야 해리는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이대로 가면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 둘의 감정이 어떻든 찰리의 집에서는 반대를 할 테고 결국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해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해리는 찰리에게 에그시를 좋아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사람의 감정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나 그것이 매너가 아니라는 점을 떠나서, 해리는 그럴 수가 없었다. 둘은 이미 서로를 좋아함으로서 지금 충분한 행복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해리는 에그시의 상기된 뺨과 찰리의 이글거리던 눈동자를 떠올렸다.
해리는 에그시의 행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해리는 에그시가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랐다. 미래의 에그시가 아닌, 현재의 에그시가 행복하기를. 해리는 결국 준비했던 모든 것을 제 안으로 눌러 삼키고 말았다. 해리는 아직도 등 뒤에 뜨거운 시선이 박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다시 발을 옮겼다.
*
과보호 아버지 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