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주의하라고 해놓고서 해리는 어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멀린, 요즘 해리 바빠요? 에그시가 조심스레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다소 생뚱맞은 것이었다.
“그는 지금 미국에 있어.”
웬 미국? 거긴 해리가 맡은 지역도 아니잖아요? 에그시의 반문에 멀린은 성가신 얼굴을 하고선 고개를 저었다. 더 묻지 말라는 뜻이 역력해서 에그시도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그만큼 일손이 바쁜가보다 싶을 뿐이었다. 아니면 해리가 필요할 정도로 크고 다급한 일이라거나. 어쨌거나 에그시로선 해리를 걱정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고 그보단 자신이 정말로 란슬롯이라는 이름을 받을 수 있을지가 더 큰 고민거리였으므로 에그시는 해리에 대한 생각을 접기로 했다. 귀국하면 곧 호출하겠지, 뭐.
그래도 멀린이 여러모로 신경 쓸 거리가 많은 건 사실인지 에그시를 비롯해 록시와 찰리를 따로 부를 시간도 없어 보였다. 셋은 본의 아닌 자유를 즐겼다. 에그시는 지난 번 해리가 말한 이후 JB의 다이어트에 심혈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에그시의 말을 듣지 않고 틈만 나면 바닥에 눌러 앉아선 뒹굴 거리려 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오늘도 에그시는 늘어져라 침대 위에 엎어져 있는 JB의 옆구리를 간질이느라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답답했는지 점프 수트의 윗부분을 아예 풀어 헤친 채 뉴스를 보고 있던 찰리가 그쪽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사실 에그시는 제 뒤쪽으로 드리우는 그림자를 모두 느끼고 있었으나 모르는 척 하며 JB의 통통한 배를 찌르는 것에 집중했다. 조용히 다가온 찰리가 제 뒷목에 촉촉 입을 맞출 때까지.
“에기, 머리 많이 자랐네.”
“간지러우니까 거기다 하지 마.”
“그럼 어디다 해?”
뭘 어디다 해? 이제는 뻔뻔하기까지 한 찰리의 반응에 에그시는 황당한 얼굴을 했다. 에그시의 손이 멈춘 틈을 노려 JB는 순식간에 베개 옆으로 몸을 옮겼다. 에그시는 JB를 더 괴롭히는 대신 아예 등을 돌려 찰리를 마주보고 섰다.
“혹시 목이 성감대야?”
“미친! 그런 거 아니거든?”
“근데 왜 그렇게 거부하는 거야?”
“존나 간지럽다니까!”
아닌 게 아니라 찰리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손가락 끝까지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이걸 성감대라고 하나? 어쨌거나 그 간지러우면서도 오묘한 기분이 에그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절로 발가락이 굽었고 입술을 깨물게 됐다. 시도 때도 없이 입술을 부딪쳐 오는 만큼 시도 때도 없이 흥분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에그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넌 이러면 안 간지럽냐?”
그래도 찰리가 영 알아듣지 못할 것 같기에 에그시는 직접 시범을 보였다. 찰리의 턱 근처로 얼굴을 훅 들이밀더니 턱선을 따라 목덜미를 주욱 핥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한 찰리가 에그시의 양 어깨를 붙들었다. 에그시는 킥킥거리고 웃으며 일부러 뜨거운 숨결을 하아하아 불어 넣었다. 목덜미가 간질간질해서 찰리가 절로 고개를 흔들었다.
거 봐, 존나 간지럽지? 에그시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발까지 들어 찰리의 목에 더욱 입을 묻었다. 평소 찰리가 사용하는 향수의 향이 났다. 그동안은 여기까지 와서 뭐 이런 걸 쓰냐고 비웃던 향이었다. 에그시는 코끝을 스치는 향을 더욱 깊게 들이마셨다. 지금에야 인정하는 거지만 의외로 향이 괜찮았다.
[에그시, 그만 하고 밖으로 나오도록. 찰리, 너도.]
아예 상체를 찰싹 붙이고선 킁킁거리던 에그시의 몸이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다름 아닌 멀린의 목소리였다. 마치 타박하는 듯한 어투에 민망함이 피어올랐다. 에그시는 볼을 긁적이며 찰리를 훔쳐보았다. 찰리 역시 민망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에그시가 장난을 쳐서 그런 것인지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에그시는 보란 듯이 찰리의 목덜미를 손끝으로 쿡 찌르고선 먼저 방을 나섰다.
“어디로 가야 하는데요? 훈련?”
[아니. 아서에게 가도록 해.]
“…아서요?”
에그시가 단박에 인상을 찡그렸다. 아서라니. 한낱 후보생에 불과한 에그시는 몇 번 본 적도 없는 아서였다. 딱히 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그만큼 어려운 상대이기도 했다. 에그시는 목이 타는 것을 느끼며 아서가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평소와 달리 노크까지 한 에그시가 조심히 몸을 밀어 넣었다.
“무슨 일이예요, 아서?”
에그시는 답지 않게 바짝 긴장한 채였다. 아서가 에그시를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딱딱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오만한 분위기에서 에그시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자신보다 낮은 사람들과 어울려 본 적이 거의 없는 이 귀족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아서는 킹스맨의 수장이기도 했고 가장 나이가 많은 인물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에그시와는 맞지 않는 타입이었다. 자신을 꺼려하고 있다면 더더욱. 에그시는 어색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아서의 맞은편에 앉았다.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대어 앉은 아서는 여유로우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에그시를 보았다. 그의 시선이 곧 에그시의 발치에 자리 잡은 JB에게로 향했다.
“우려와 달리 잘 자라고 있는 것 같구나.”
“예전에 비하면 많이 컸죠.”
에그시는 얌전히 앉아 저를 올려다보는 퍼그의 초롱초롱한 눈을 맞추며 작게 웃었다. 아서가 칭하는 것이 비단 JB만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대꾸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서는 그다지 궁금한 것 같지도 않은 말투로 물었다.
“이름이 뭐지?”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낯설고 동시에 단호하여 에그시는 하마터면 제 소개를 할 뻔 했다.
“JB요.”
“오, 제임스 본드?”
그거 아니고요, 라고 받아치려던 에그시는 아서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서린 감정을 눈치 채고선 가볍게 눈을 찡긋해보였다.
“네, 그리고 제가 그 주인이죠.”
한동안 아서는 말없이 에그시를 바라보기만 했다. 에그시는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초조한 마음이 비죽 솟아 안을 맴돌았으나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잘못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참 뒤에야 아서는 총 한 자루를 꺼내 에그시에게 주었다. 얼결에 받아 들인 에그시가 눈을 굴렸다. 척 보아도 장전이 된 상태였다. 에그시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별 거 아닌 일이지.”
“….”
“그 총으로 개를 쏴.”
에그시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직감적으로 이것이 마지막 관문임을 알 수 있었다. 시시할 정도로 맥이 빠지는 테스트였다. 고작 몇 달을 함께 했던 강아지를 죽이라는 허탈한 미션. 에그시는 망설임 없이 JB에게로 총을 겨누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JB의 까만 눈동자가 에그시에게로 콕 박혔다.
이건 고민하는 편이 이상해. 그냥 방아쇠만 당기면 끝날 일이라고. 마음과는 달리 검지 손가락 대신 손 전체가 미약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에그시는 손에 힘을 꽉 주고서 미간을 구겼다. 이 상황에서도 제게 충성스런 눈빛을 보내는 JB를 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가만히 앉은 작은 몸뚱이 뒤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짧은 꼬리는 에그시의 어깨를 더욱 짓눌렀다. 에그시의 눈은 그 손만큼이나 애처로이 떨렸다.
고작 한 방이면 돼. 검지를 조금만 당기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었고 에그시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허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은 아서와 저의 삶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다. JB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스르륵 기울였고 에그시는 저를 조이던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결국 에그시는 그대로 총을 내리고 말았다. 입술까지 꽉 깨물고서 고개를 젓는 것에 아서의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예상한 대로 에그시 언윈은 자신이 애지중지 길러 온 강아지를 쏘지 못했다. 너머에서 느껴지는 명백한 비웃음에 에그시가 총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JB가 아닌 아서 쪽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아서는 놀란 눈치도 아니었다. 에그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피부를 찌를 듯 날카롭던 공기가 펑 하고 터진 것은 건너편에서 들린 시끄러운 파열음 덕이었다. 탕!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는 총소리가 틀림없었다. 총을 쥔 에그시의 손에서 힘이 사라졌다. 아서의 입꼬리가 비틀어 올라가는 것을 본 에그시가 얌전히 아서에게로 총을 넘겨주었다. 온몸이 축 처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겨웠다.
“자네는 탈락이야.”
일어나자마자 제 뒤를 쪼르르 따라오는 JB를 보며 에그시는 입술을 짓이겼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퍼그를 어떻게 내 손으로 죽이란 말이야? 에그시는 아서를 다시 한 번 노려 본 뒤, 방을 빠져 나왔다. 낑낑거리는 JB를 들어 제 옆구리에 품은 에그시가 향한 곳은 입구였다.
뒤늦게 해리의 얼굴이 떠올랐고 미약한 후회가 몰려왔으나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어떻게 JB를 내 손으로 죽일 수 있을까? 에그시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에그시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 뻔했다. 그래도 록시는 성공해서 다행이야. 에그시는 그 총소리가 록시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았을 때, 그제야 에그시는 찰리에게 생각이 미쳤다. 총 소리는 분명 한 발이었는데?
의아한 상태로 문을 연 에그시는 픽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문 앞 계단에는 이미 누군가 앉아 있었다. 곱슬 거리는 머리칼과 떡 벌어진 등판만 보아도 찰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답지 않게 계단에 쪼그리고 앉은 찰리의 옆에는 윈이 주인의 허벅지에 제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슬쩍 보인 옆모습이 무척 우울해 보였음에도 찰리는 제게 애교를 부리는 윈의 머리를 부드럽고 상냥하게 연신 쓸어내리고 있었다.
나 참. 에그시는 코웃음을 치며 찰리의 옆으로 가 앉았다. 다행히 계단은 성인 남자 두 명과 강아지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했다.
“우리 정말 바보 같다.”
“…꺼져.”
찰리의 목소리에는 어느 정도 자책이 섞여 있어 에그시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까칠하게 굴더니만 이 도련님도 결국 제 손으론 강아지 하나 죽이지 못하는 바보였다는 점이 우습고 동시에 귀여웠다.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제게 드문드문 보여줬던 모습에서 에그시는 찰리가 의외로 속이 여리고 정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어울리지도 않지. 에그시는 짓궂게 웃으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개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놈인 줄은 몰랐는데?”
“너도 마찬가지잖아, 에기.”
“록시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이건 쏘는 쪽이 이상한거야.”
아, 이래서 멀린이 정을 붙이지 말라고 했던 건가? 그래봤자 잔인한 건 매한가지였다. 에그시는 툴툴거리며 제 다리 위에 자리 잡은 JB의 코끝에 얼굴을 부볐다. 찰리는 입을 꾹 다물고서 말이 없었다. 온갖 감정이 안을 메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에그시 역시 마음이 무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제 해리 얼굴을 어떻게 보나. 착잡한 심정이 미련이 되어 에그시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껏 우울해하거나 불만을 토로하기도 어려웠다. 이런 모습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인물이 바로 옆에서 우울해하고 있었으니까. 에그시는 곁눈질로 찰리를 훔쳐보았다. 하나가 되고 싶은 티를 내면서 아래를 비벼올 때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을 때에도, 일부러 입술만 빼놓고 다른 곳에 키스를 퍼부을 때에도, 에그시와 록시보다 못한 성적을 받아 씩씩거렸을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찰리는 그만큼 침울한 얼굴이었고 표정 또한 울적했다. 아마도 이번이 정말 끝이기 때문이겠지. 풀릴 줄 모르는 찰리의 얼굴을 빤히 보던 에그시가 조심히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머리로 생각하고 거르기 전에 충동적으로 행한 것이었다.
“…에그시?”
에그시는 깜짝 놀라 저를 보는 찰리를 향해 개구지게 웃어 보였다. 뭐 어때? 저도 그런 스스로가 어이없긴 했지만 지금은 눈앞의 잘난 도련님이 입 맞추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찰리는 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가 이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에그시는 허락이라도 하듯 찰리의 허벅지 위로 손을 올렸다. 찰리는 곧장 에그시의 입술에 진하게 키스했다. 에그시는 기다렸던 것 마냥 혀를 내주었다.
키스는 잔뜩 흥분해서 몸을 겹쳐올 때보다도 더욱 뜨거웠다. 찰리는 그야말로 마지막 기회라도 되는 것처럼 에그시의 안을 휘젓고 그만큼 절실히 혀를 얽혀왔다. 에그시 역시 감정의 부스러기를 잠시라도 내려놓을 요량으로 찰리와의 입맞춤에 집중했다. 사실 찰리와 입술을 맞댈 때에는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좋긴 했다.
“이제 가야겠네.”
숨까지 몰아쉬며 겨우 입술을 떼어 낸 후 둘은 다시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어느 정도 위로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탈락은 기정사실이었고 둘은 이곳을 떠나야 했다. 에그시는 미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앞으론 어떻게 하지? 해리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생각해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찰리 역시 마찬가지인지 온갖 얼굴 근육을 다 써가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어쩐지 그 얼굴에 에그시는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같이 산책이나 할래?”
“너랑?”
“JB랑 윈이랑.”
말이 튀어나온 것은 또 순식간이었다. 에그시의 제안을 알아들었는지 JB가 작은 꼬리를 살랑거렸고 윈 또한 기쁜 듯이 헉헉거렸다. 에그시는 마치 제 강아지라도 되는 것처럼 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찰리 외의 사람에게는 무뚝뚝하게 굴던 윈도 이제는 에그시가 익숙해졌는지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아내었다.
산책이라고 해봤자 이 근처를 한 바퀴 도는 것이 전부였고 그러고 나면 정말로 끝이었다. 미련이 철철 넘치는 행위로 보일지는 몰라도 마지막으로 이곳을 머리에 새겨둘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되기도 할 터였다. 찰리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리에 대상엔 킹스맨이나 란슬롯 같은 것들 뿐 아니라 에그시 역시 포함된다는 것을 둘 모두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같이 걷자고는 했지만 막상 말을 붙일 거리는 없어 둘은 모두 침묵했다. JB와 윈만이 기쁜 듯이 주위를 신나게 뛰어다니다 다시 제 주인 곁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침묵을 깨뜨린 것은 경쾌한 전화 벨 소리였다.
“야. 전화 온 거 아니야?”
에그시는 따로 휴대 전화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기에 지금 울리는 소리는 분명 찰리의 것이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찰리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알고 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지 몰라도 하필이면 부모님에게서 온 전화였다. 찰리는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이내 윈을 에그시에게 맡겼다.
“빨리 안 오면 내가 윈까지 다 데려갈 거야.”
“그거 나쁘지 않네.”
“뭐가?”
“그럼 너만 데려가면 되니까.”
감정을 아직 갈무리하기도 전에 툭 튀어나온 말이 에그시의 귓가를 스쳤다. 찰리는 쏜살같이 내뱉고선 에그시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몸을 피했다. 뜬금없이 내뱉은 말이 민망하기도 했고, 부모님이 어떤 말을 할 지 몰랐으나 대화 내용을 에그시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아서이기도 했다. 에그시는 멀어지는 찰리의 등을 보며 멋쩍은 듯 뒷목만 매만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찰리의 부모님은 그저 찰리가 얼마간의 교육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라 여겼다. 아서가 그를 데려갈 때 부모님께 좋은 말로 이 과정을 소개했던 덕이었다. 찰리는 이대로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했다. 물론 더 이상 킹스맨 후보로 남을 수는 없었으나 집으로 돌아가고 만다면 다시는 에그시를 보지 못할 지도 몰랐다. 찰리가 먼저 에그시를 찾아가지 않는 이상. 그런다고 얌전히 만나줄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찰리는 휴대 전화를 손에 꽉 쥐고서 다시 에그시에게로 몸을 돌렸다.
“에기?”
찰리는 에그시가 있던 곳으로 서둘러 달려왔으나 그곳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어딜 간 거야? 화장실이라도 갔나 싶어 찰리가 근처를 서성였다. 당연하게도 근처에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고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을 가르고 뛰어다녀야 할 윈과 JB 역시 잠잠했다.
“에그시!”
막연한 불안감이 마치 뱀처럼 찰리의 몸을 휘감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찰리는 무작정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거진 나무와 풀 너머로 미약하지만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눈치 챘다. 망설일 것도 없이 찰리가 성큼성큼 그리로 다가갔다.
“…윈?”
마침내 그 소리의 근원지에 도착했을 때 찰리는 망연한 얼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 에그시는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바닥에 쓰러져 죽어 가는 JB와 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