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는 의외로 ‘감’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믿고 믿지 않고를 떠나서 제임스의 감 자체는 상당히 예리했고 또한 정확했다. 어쩌면 그렇기에 믿고 싶지 않은 것 일수도 있었다. 제임스는 불현듯 스치는 기분 나쁜 감각에 사로 잡혀 한끝 차이로 목숨을 부지한 경우도 있었고, 별다른 이유 없이 자리를 박차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장소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 멀린마저도 고개를 저으며 낮게 읊조렸다.
“란슬롯, 정말 대단하군.”
어떠한 경이로움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 제임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제 자신도 신기하리만큼 잘 들어맞는 이 감이 고맙기는 했지만 어쩔 때는 원망스럽기도 했다.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미리 짐작하게 해주니까. 그러나 완전히 무시하기엔 한켠이 찝찝한 것도 사실이었다. 제임스는 감의 여신이 저를 향해 미소 짓고 있다는 사실을 고마워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받아들이기는 해야 했다. 어찌 되었건 신이라는 존재는 늘 그렇듯 인간의 의사와 상관없이 멋대로 축복을 내리곤 하므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번 일은 그다지 고마워하고 싶지 않은데. 제임스는 자기 전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익숙하면서도 코끝이 아린 감각이 무엇인지 아침에 눈을 뜨고야 알았다. 감각이 모든 것보다 앞서 간 적이 한두 번도 아니라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불을 정리할 틈도 없이 제임스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을 말았다 펴며 오랜만에 보는 그리운 얼굴을 곱씹어야 했다.
제임스는 정말 오랜만에 리의 꿈을 꾸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이었다. 굳이 꿈에서 그를 찾지 않아도 제임스는 늘 그를 떠올리곤 했으므로 지금까지는 꿈을 꿀 필요조차 없었다. 그래도 간밤 제임스의 머리를 뒤흔들었던 그 꿈은 확실히 제임스의 기억보다 더욱 선명하고 또렷하게 리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밤톨같이 짧은 머리를 하고선 개구지게 웃는 얼굴이 제임스의 눈동자 가득 들어찼다.
“제임스!”
경쾌한 목소리의 끝자락엔 어쩐지 달큰한 부드러움마저 느껴지는 듯 했다. 두 눈을 깜빡이며 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제임스가 이내 뺨을 씰룩이며 웃어 보였다. 그야말로 17년 만에 불러 보는 이름이었다.
“리.”
화답하듯 리는 제임스의 앞으로 총총 달려 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두 팔을 벌려 제임스를 꽉 끌어안았다. 굳어 있는 제임스의 귓가로 리의 밝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는 제임스의 목덜미며 어깨에 얼굴을 부비듯 고개를 젓다가 곧 떨어져 나갔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리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제임스의 이름을 부른 뒤로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그려낸 듯한 미소를 방긋방긋 짓고 있는 리의 뺨 위로 제임스의 손이 닿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결이 순식간에 식어 손바닥을 차갑게 얼렸다. 리? 제임스의 제 목소리가 부끄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제임스는 리가 그리운 복장을 하고 있는 것에 뒤늦게 눈이 갔다. 사실 작다면 작을 그 건물 안에서만 알고 지냈던지라 다른 복장의 리는 본 적도 없었다. 연한 체크 무늬의 점프 수트 위로 손이 스치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리는 눈꺼풀이 나풀거리는 것이 보일 정도로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이 벙긋거렸다. 아니, 입을 벙긋거리고 있던 것은 제임스 쪽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느 쪽에서도 소리는 나오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바스러졌다. 갑작스레 찾아 왔던 꿈은 마지막 또한 예고 없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일어난 제임스는 의미 없이 주먹만 쥐었다 피기를 반복하다 겨우 침대에서 벗어났다.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는 점만 빼면 꿈속의 리는 제가 알고 있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고작 그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제임스, 하는 이름 세 글자 뿐 이었으나 뜨거운 감정이 울컥 솟을 정도로 감격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제임스는 아직도 아릿하게 저려 오는 가슴께를 살살 문지르며 부엌으로 향했다.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따뜻한 차나 마실 생각이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받아 낸 휴가의 첫 날이기도 했다. 그리 길지는 않았으나 휴식을 취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제임스는 최대한 이 시간을 알차게 써먹을 예정이었다. 첫 날부터 발목 아래로 물이 찰랑거리는 것 마냥 기분 나쁜 감각이 집안을 메운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 말이다. 제임스는 목구멍 아래로 넘어가는 따뜻한 기운에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사교성이 좋은 제임스였으나 불행히도 다른 킹스맨 요원들은 그렇지 못했다. 제임스는 그들에게 란슬롯이라는 호칭 외의 것으로 불려 본 기억도 없었다. 그런 만큼 멀린은 물론이고 이 근처에 있다는 퍼시벌도 제임스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 뻔했기에 제임스는 멀리 떠나지 않고도 홀로 완벽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럴 생각이었다. 잔을 내려놓기도 전에 머뭇거리는 노크 소리가 안을 울리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를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지나가던 이웃의 갑작스러운 방문일까? 그렇다기엔 짐작 가는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노크를 하는 상대를 무시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므로 제임스는 조심히 문을 열었다. 그 곳에 서있는 것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어, 저기… 안녕하세요, 란슬롯.”
세상에, 어린 갤러해드가 직접 찾아올 줄이야. 어색한 웃음을 걸친 에그시를 빤히 보던 제임스가 한 박자 늦게 그를 집 안으로 들였다. 에그시 역시 낯설기는 마찬가지인지 뒤통수를 긁적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에그시를 거실로 안내한 제임스는 머뭇거리는 그를 대신해 먼저 대화의 문을 열어주었다.
“여긴 어쩐 일이지?”
“그냥… 대화라도 하고 싶어서요.”
답지 않게 에그시는 말을 흐리며 제임스 아래의 바닥으로 시선을 던졌다. 물론 에그시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어린 갤러해드는 킹스맨 요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자자했다. 그 인기라는 것이 놀려먹기 좋다는 의미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제임스도 종종 그들의 장난에 동참하곤 했으나 그래도 마지막에는 에그시의 투덜거림을 받아주는 역할이라 에그시에겐 가장 인상이 좋은 상대이기도 했다. 제임스 역시 이럴 때가 아니면 늘 딱딱하게 구는 다른 요원들보다 훨씬 어리고 생각도 자유분방한 에그시를 좋아했다.
당연히, 순전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란 것을 제임스 스스로도 잘 알았다. 제임스는 에그시에게 어쩔 수 없는 호감과 관심을 느꼈다. 닮았다. 첫 날 에그시를 보자마자 제임스는 리를 떠올렸다. 외모뿐이 아니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제임스는 에그시가 리와 생각 이상으로 닮았음을 깨달았다. 기껏 해야 5살 이전에 만났던 것이 고작일 텐데, 서있을 때에는 발을 가만두지 못하고 옆으로 들어 올리는 습관마저 닮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제임스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에그시에게 앉으라고 권했고, 에그시는 조심히 엉덩이를 붙였다. 날렵하게 올라간 눈썹 아래로 언뜻 초조한 기색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정말 단순한 대화를 위해 일부러 집까지 찾아오진 않았을 터였다. 제임스가 운을 뗐다.
“잘났지만 평범한 귀족이었던 제임스가 어떻게 란슬롯이 됐는지 궁금하겠지?”
순간 에그시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겠지. 제임스는 속으로 웃어보였다. 어린 갤러해드는 아마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것이 궁금하여 제임스를 찾아왔을 것이다. 차마 해리에게는 묻지 못했겠지. 그는 아직까지도 리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꼈고 어린 연인은 그의 무거운 짐을 굳이 건드리고 싶지 않았을 게 뻔했다. 허나 이제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를 정도로 어른이지도 못했다. 에그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이 집 문을 두드린 것이 틀림없었다.
“말해줄 수 있어요?”
“물론이지. 하루 이틀로 끝날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말이야.”
내내 불편해보이던 에그시의 얼굴이 그제야 활짝 폈고 제임스는 입꼬리를 둥글게 말며 웃었다. 오늘 새벽 저를 찾아 왔던 리는 이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제임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며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지 가늠해보았다.
*
제임스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오늘은 네 번째였다. 제임스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리가 꿈에 나오는 것도 벌써 4번이니, 에그시가 제임스의 집을 방문한 것도 총 4번이 될 터였다. 오늘도 제임스는 리에게 한 마디 말도 벙긋하지 못했고 리는 늘 그래왔듯 은은한 미소를 그려 보일 따름이었다. 제임스는 그 예민한 감으로도 리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지 못했다. 그저 리가 찾아오는 날이면 에그시도 같이 찾아온다는 점만이 제임스가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예상과 달리 정오가 다 지나도 에그시는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제임스는 그가 얼마 전 임무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갔던 것을 떠올렸다. 그의 실력을 얕잡아 볼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실전 경험이 부족한 에그시를 고려했을 때 오늘 돌아오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었다. 임무를 마치자마자 이 집으로 곧장 달려와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 오늘 리가 꿈에 나온 이유는 뭐지? 제임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정말로 이대로 에그시가 오지 않고 하루가 끝나가는 가 싶던 저녁 즈음 익숙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막 저녁 식사를 마친 제임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시간에 찾아오는 것도 놀라웠으나 이런 늦은 시간에 에그시가 홀로 제 집을 찾아오게 내버려둔 해리에 더 놀랐다.
“안녕하세요, 란슬롯.”
“오늘은 늦었구나.”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척 봐도 입술이 댓발 튀어나온 에그시는 불만이 가득해보였다. 툴툴거리며 안으로 들어 온 에그시가 평소 습관대로 소파에 널부러지듯 철푸덕 앉았다가, 뒤늦게 제임스를 향해 사과했다. 죄송해요. 예의 없었죠. 제임스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코드 네임으로 부르지 않으니 각 잡고 앉을 필요도 없지, 에그시.”
“…역시. 고마워요, 제임스.”
같으면서도 다른 목소리로 울리는 제 이름에 절로 가슴이 뛰는 것만큼은 아무리 제임스라 하더라도 제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임스는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아서는 어디 있지?”
다행히 에그시는 그 티가 나는 제임스의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신 그는 불퉁한 얼굴로 눈을 흘겼다.
“아서요? 여자랑 시시덕거리고 있겠죠.”
오. 지금까지 에그시가 했던 말 중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타겟 때문일 것이 뻔하긴 했지만 눈앞의 청년이 너무도 기분 나쁜 티를 내고 있었기에 제임스는 웃음을 꾹 참고 대화를 이어갔다.
“좀 까다롭고 제멋대로긴 해도 아서가 그럴 사람은 아닌데.”
“제가 두 눈으로 직접 봤다고요!”
“타겟에게 친절한 건 당연한 태도 아닐까?”
“아니에요. 원래 내 타겟이었는데… 해리가 갑자기 끼어들어선 가로챈 거란 말예요. 분명히 다른 속셈이 있는 게 틀림없어요.”
망할 영감 같으니! 술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에그시는 마치 취한 것 같은 억양으로 외쳤다. 씩씩거리며 얼굴까지 붉힌 것이 정말 술에 취한 것 같기도 했다. 에그시의 말만 들어도 제임스는 해리가 왜 그랬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지만, 이 대화가 충분히 재밌었으므로 모르는 척 더 들어보기로 했다.
“타겟의 약혼자도 그 자리에 있어서 제가 얼마나 조심했는지 해리는 모를걸요? 아가씨랑 적당한 거리 유지하면서 위험하지는 않게 붙어 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거리 조절에 능숙치 못해서 아서가 대신 해준 건 아니고?”
“고작 그런 이유로요? 날 얼마나 무시했으면! 그리고 그건 절대 아녜요. 아가씨의 약혼자가 제가 있어 안심이 된다면서 막 말도 걸고 그랬거든요.”
그게 문제 아닐까? 하지만 제임스는 이 어린 애인 때문에 해리가 곤란해 하는 모습을 앞으로도 오래 지켜보고 싶었기에 굳이 조언을 꺼내진 않았다. 에그시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파 팔걸이 부분을 주먹으로 쿵 내리쳤다.
“그 약혼자가 중요한 단서를 찾아낸 것 같다면서 몰래 알려주려고까지 했는데! 완전 신임 얻은 상태였다고요. 근데 갑자기 해리가 들이닥쳐서는….”
말 그대로 갑자기 나타나서는 물 흐르듯 매끄럽게 말을 쏟아내는 해리에 에그시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서 보고 있었는지, 그보다 여긴 왜 왔는지 해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그시의 옆으로 다가와서는 타겟인 아가씨의 손을 조심히 쥐고 부드럽게 그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중후하면서도 온화한 미소에 아가씨는 약혼자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슬그머니 볼을 붉힐 정도였다.
벙찐 얼굴로 해리가 하는 것을 멍하니 보던 에그시는 뒤늦게 울분을 터뜨렸다. 몰래 해리를 붙들고 구석으로 가더니 목덜미까지 붉히며 외쳤다. 해리! 대체 여긴 왜 온 거예요? 에그시의 말에 해리는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네가 갤러해드란 이름에 먹칠을 하기 전에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지.”
해리의 억양을 따라하듯 얼굴까지 구기며 이야기하던 에그시가 진심으로 짜증이 났는지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얼굴을 봤어야 해요. 얼마나 재수가 없었는지….”
연신 화를 토해내는 에그시와 달리 제임스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주먹까지 쥐어야 할 판이었다. 어떤 도발에도 지지 않고 더 강하게 맞불을 일으키던 그 해리 하트가, 임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던 그 갤러해드가! 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남자와 귓속말을 나누었다는 이유만으로 유치하게 질투를 하고 나섰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제임스는 휴가를 반납하고 당장 달려가 이제는 아서가 된 해리 앞에서 그를 골려대고 싶었다. 아서, 아무리 어린 애인을 뒀다지만 나잇값은 하셔야죠? 그 대가로 엄청나게 고달픈 장기 임무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제임스는 아서를 놀릴 수 있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임스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에그시는 그 뒤로도 계속 속에 있던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에그시는 아예 그 임무에서 빠지다시피 돌아와야 했다. 가기 전 해리가 나지막이 에그시를 불렀으나 에그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곧장 제임스의 집으로 달려온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제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 놓고 싶어서. 전 갤러해드와 현 갤러해드가 사랑을 나누는 사이란 점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나 에그시는 나름대로 비밀 연애 중이라 생각했기에 털어 놓을 상대는 제임스가 유일했다. 제임스는 웃음을 참느라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아예 허벅지 위로 올리며 잔뜩 힘을 주었다. 볼을 부풀리던 에그시가 한참 숨을 고르더니 툭 내뱉었다.
“혹시라도….”
“응?”
“설마, 마음에 들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갑자기 차분해진 에그시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 길길이 날뛰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여전히 둘의 이야기는 그 어떤 코미디보다 더 제임스의 뱃속을 간질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앞서 나가면 잡아주어야 했다. 제임스는 웃는 얼굴로, 그렇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아서가 그럴 린 없지. 더군다나 약혼자까지 있는 여성이라면서.”
“하지만 같이 있는 모습이 정말… 잘 어울렸단 말이에요.”
에그시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꺼졌다. 들썩이던 어깨 또한 비스듬히 내려갔다. 이거로군. 제임스는 에그시가 줄곧 화를 내고 침울해하던 원인이 해리가 아니라 에그시 본인에게 있다는 것을 빠르게 눈치 챘다. 쿵쾅거리며 쏟아내던 것이 실은 모두 거꾸로 돌아 에그시에게 향하고 있던 것이었다.
“해리는 저보다 나이도 많고, 저완 많이 다르기도 하고, 또… 가정도 꾸려야 하잖아요.”
에그시는 언젠가 해리가 데이지를 보고선 귀엽다면서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칭했던 것을 떠올렸다. 앞을 보지 않고 뛰어다니다 에그시의 다리에 부딪혀 철푸덕 넘어지고 만 어린 여자아이를 일으켜주던 모습 역시 다정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은 그보다 더욱 따뜻해서 에그시의 가슴이 간질간질해질 정도였다.
“여자와 만나서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고 그렇게…. 하지만 저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아이도 낳아줄 수 없고, 해리와 결혼을 할 수도 없죠.”
결혼이야 억지로 한다면 할 수도 있겠지만 둘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성별부터 시작해 나이 차이, 집안 배경까지 무엇 하나 어울리는 구석이 없었다. 그의 곁에 있으면 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으나 이렇게 한 발짝 멀어질 때면 시선이 객관적으로 변했다. 가슴 한켠에 언제나 담아두고 있던 말이었지만 결코 해리 앞에서는 꺼낼 수 없던 고민이 한숨과 함께 섞여 나왔다.
“과연 제가 해리에게 어울리는 사람일까요?”
일그러진 얼굴로 제 발치만 바라보는 에그시는 평소보다도 더욱 작아보였다. 사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제임스가 아니라 연인인 해리 본인이 해주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제임스는 목까지 차올랐던 것들을 안으로 다시 욱여넣었다.
제임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이미 에그시가 말을 꺼냈을 때부터 제임스는 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똑 닮은 얼굴로 이런 말을 하다니. 에그시가 오는 날마다 늘 꿈에 찾아오던 리가 하고픈 말이 혹 이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임스는 고개를 숙여 에그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 이유로 사랑하는 상대를 놓아준다면 나중에 필히 후회하고 말거다, 에그시.”
바로 나처럼 말이지. 제임스는 제 후회의 흔적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너를 예로 들어
남을 위로할때가 올까봐
나도 그런적이 있다고
담담하게 말하게 될까봐
/원태연, 두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