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그시는 여전히 잠이 든 채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멀린은 해리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에그시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멀린의 표정이 얼마나 구겨져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그가 쓰러질 정도로 피곤해 보인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모를 리 없으면서도 해리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갤러해드, 당신도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발렌타인의 짓이겠지.”
“그렇죠. 아무래도.”
멀린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 있었다. 혹시 몰라 약물의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었으나 눈에 보이는 반응은 없었다.
“교회에서 벌였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더 정교하죠. 그 때는 정말 이성이라곤 한 톨도 남지 않았으니까.”
“아놀드 교수나 아서의 경우와도 다소 차이가 있지.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해리는 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듣기 거북할 정도의 연설이 쏟아지던 교회는 발렌타인이 미리 준비한 유심 칩 덕에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끔찍한 비명 소리와 살육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해리는 겨우 살아 돌아왔다. 약간의 운도 있었으나 그의 노련한 대응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발렌타인은 뒤늦게 그 갤러해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분통을 터뜨렸었다.
자신의 위치를 잊고 상대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있었지만 에그시는 그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다. 해리의 이름을 불렀고,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에그시를 끌고 오면서 해리는 당장 그의 귓덜미를 살펴보았으나 그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귀 밑에 심어 놓은 칩이 없다는 건 에그시의 머리가 폭발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니 기뻐해야 하는 건가. 멀린은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혀를 찼다.
어떤 방식인지는 몰라도 대충 비슷한 것을 이용하여 에그시를 이런 식으로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칩이든, 아니면 다른 형태든 우선은 그것을 찾아 없애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에그시를 여기까지 데려왔음에도 둘은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애당초 그 원인이 되는 것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으니까.
“멀린!”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기 위해 멀린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 거칠게 문이 열리곤 찰리가 헐레벌떡 달려들었다. 록시 역시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약간 긁힌 상처가 있기는 해도 크게 다친 곳 없이 누워 있는 에그시를 보는 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멀린, 에그시는….”
조심히 다가 온 록시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멀린은 걱정하지 말라는 뜻에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와 달리 찰리에게는 냉정히 말을 던졌다.
“찰리, 이건 정말 킹스맨의 일이야. 이제 그만 돌아가.”
“못 가요.”
킹스맨 요원이 아닌 찰리는 이곳에 있어서도, 더한 정보를 알아서도 안 되었지만 찰리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더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의가 엿보였다. 멀린은 제발 더 이상 골치 아픈 일을 만들지 말라고 소리 치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참아 냈다. 늘 그렇듯 참고 인내하는 것이 멀린의 역할이었다. 애당초 주위에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있었던 적도 없었다. 멀린은 깊게 신음하며 찰리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갤러해드, 란슬롯. 할 말이 있으니 이리 와 주시죠.”
“멀린!”
“찰리, 넌 여기 있어라. 집에 가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 대신 에그시나 좀 보고 있어. 이상한 짓은 하지 말고.”
이상한 짓이라는 말에 찰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해리는 눈을 감고 있는 에그시의 옆모습과 어정쩡하게 서 있는 찰리를 번갈아 쳐다보다 멀린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말하라고 당부한 록시까지 사라지고 나서야 찰리는 홀로 남게 되었다. 자신만 쏙 빼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조금 분한 마음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킹스맨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찰리에게는 그런 것보다 에그시의 곁에 있는 것이 더 중요했다.
언제 눈을 뜰지 모르는 에그시를 지켜보는 것은 순전히 찰리의 몫이 되었다. 물론 곳곳에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을 테니 따지자면 결코 혼자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찰리는 누워 있는 에그시의 옆에 앉아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불과 몇 시간 전 갑자기 나타나 저를 노려보던 것과 달리 잠들어 있는 얼굴은 순해 보이기까지 했다. 갤러해드의 신경을 긁으며 비죽 웃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갤러해드가 그렇게까지 했을 리 없지만 혹시나 싶어 찰리는 에그시의 코끝에 손을 가져다보았다. 손가락을 간질이는 따뜻한 숨결에 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에그시가 이렇게 곤히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차분히 내리 깐 속눈썹과 그 아래 움푹 파인 부분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찰리는 쓴 웃음을 지었다.
오늘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되감기 되었다. 준비라고 했었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한 거냐고 찰리가 다그쳤을 때, 에그시는 분명 그렇게 답했었다. 그 외에 에그시에게서 얻은 정보라곤 처음 봤을 때보다도 더욱 경멸을 담은 눈으로 저를 봤다는 것과 다른 누구도 아닌 록시를 향해 총을 쐈다는 것 정도가 다였다. 물론 찰리는 그 두 개 모두를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고 눈앞의 에그시가 벌인 일이 맞았다.
멀린이나 해리가 짐작하고 있는 가능성을 찰리가 전부 다 알지는 못했다. 그래도 찰리 역시 지난 번 멀린이 경고한 대로 발렌타인의 유심 칩에 어떠한 부작용이 있으리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고, 에그시의 일 역시 그와 관계되어 있다고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발렌타인이 에그시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찰리는 우득 어금니를 씹으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아마 발렌타인을 처리하는 것은 킹스맨의 몫이겠지. 에그시를 원래대로 돌리는 방법은 멀린이 찾을 터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역할은? 그저 얌전히 앉아 에그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인가? 찰리는 자신의 무력함에 화가 났다.
에그시가 말도 없이 사라졌을 때에도 그랬지만, 이렇게 예상 못한 모습으로 돌아온 지금은 더욱 그랬다. 에그시를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말싸움이야 질리도록 했고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도 잦았으나 지금의 에그시는 그에 비할 것이 못 되었다. 제 손이 닿았던 어깨를 마치 끔찍한 것이 묻은 것 마냥 털어내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대하는 것처럼 구는 에그시를 보는 일이 힘들었다. 그렇게 의미 없는 존재는 아니었을 텐데. 자신에게 에그시가 그렇듯, 에그시 역시 그러리라 생각한 찰리였다. 실제로도 그랬음이 틀림없었다. 찰리는 에그시가 제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서 연신 입을 맞춰오던 그 어느 날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침묵 속에서 찰리는 과거의 에그시와 현재의 에그시를 교차 시키며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머리가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그와 입을 맞추고 몸을 섞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임에도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다시는 찾아오지 못할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찰리가 입술 거스러미를 물어뜯던 그 때, 턱을 괴고 있던 찰리의 시선 끝에 에그시의 손가락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에그시가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하자마자 찰리가 벌떡 일어났다.
“에그시!”
찰리는 무작정 에그시에게 달려갔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헤집어 놓던 질문을 던질 요량이었다. 에그시가 순순히 대답해주리라 여기지도 않았지만, 에그시는 찰리가 다가오자 칫 혀를 차며 아예 그에게서 몸을 돌리고 말았다. 한 바퀴 몸을 굴려 침대에서 일어난 에그시는 해리와 싸웠을 때보다도 더욱 날이 서 있었다. 당황한 찰리가 멍청히 서있는 사이 에그시가 그의 복부를 발로 차버렸다. 윽, 찰리가 고통 섞인 신음을 뱉으며 무너지려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했다. 에그시는 제가 누워 있던 이동식 침대마저 발로 차 찰리에게 날려버렸다. 이것만큼은 피할 수 없던 찰리가 그대로 뒤로 고꾸라졌다.
찰리가 넘어지면서 품에 있던 나이프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가져온 것이기는 했으나 에그시에게 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에그시의 시선이 그 차가운 날붙이로 향한 것을 눈치 챈 찰리가 먼저 발을 뻗어 나이프를 저 멀리 치워버렸다. 에그시는 아랑곳 않고 찰리를 향해 덤벼들었다. 순식간에 몸이 얽히고 주먹이 오갔다.
에그시와 다투는 것은 오랜만이었으나 어쩌면 처음이기도 했다. 정말로 죽일 듯이 덤벼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에그시는 조금 전 해리와 싸웠던 것처럼 찰리에게도 똑같이 굴었다. 비록 무기는 없었으나 훈련 때문에 단련된 몸만으로도 충분했다. 에그시는 찰리의 품을 파고들고선 제 눈에 들어오는 급소를 놓치지 않고 가격했다. 찰리가 으르렁거리며 에그시를 떼어 놓기 위해 양 팔에 힘을 주었다.
바닥 위를 뒹굴며 찰리는 제법 수줍게, 크게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저를 건드리던 그 손길이 얼마나 배려 넘치는 것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제가 몰래 옆구리를 만지작거리거나 목덜미에 숨을 불어 넣을 때마다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 따위를 내리치던 에그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낯간지럽지만 그런 모습이 퍽 사랑스럽다 여겼던 것이 겨우 얼마 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찰리는 제 어깨를 잡아 챈 에그시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손에 힘을 주었다. 완력의 차이에 버둥거리는 에그시를 제 아래로 깔아뭉개며 찰리가 그 얼굴을 똑바로 마주 했다.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애 쓰는 에그시의 눈에 더 이상 저는 담겨 있지 않았다. 찰리는 눈앞의 에그시에게 찰리 헤스켓, 자신이 의미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다. 이미 터진 입술을 깨물며 찰리가 쓰게 웃었다. 머리보다 먼저 가슴이 찌르르 울리고 아파왔다. 순수하게, 찰리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슬펐다. 에그시의 안에서 제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아팠다. 부끄러워 볼을 붉히기는 했어도 서로에게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던 때가 분명 있었다. 지금은 그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눈동자가 저를 아프게 찔러 왔다.
찰리는 에그시에게 마지막 한 방을 날려 그의 뺨을 터뜨리는 대신 멱살을 세게 틀어쥐고선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러곤 에그시의 당황한 얼굴 위로 무작정 입술을 부딪쳤다. 너무 놀라 반응하지 못하는 입술 너머로 혀를 밀어 넣고선 간절히 그 안을 헤집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키스가 될 수도 있었다. 찰리는 온 마음을 담아 에그시의 안을 휘저었다. 평소보다도 더욱 꼼꼼하게 입술을 훑고, 고른 치열을 혀끝으로 하나하나 문지를 동안 에그시는 뻣뻣하게 굳어 있기만 했다. 찰리는 푸흐 웃으며 저와 달리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에그시의 혀 아래까지 간질였다. 그리고 그 순간, 에그시의 몸이 퍼득 튀어 올랐다.
“읏!”
에그시의 격한 반응에 찰리도 놀라선 얼굴을 떼어 냈다. 뭐라도 잘못 됐나 싶어 불쑥 걱정이 솟은 찰리의 눈에 늘 마주치던 에그시의 눈동자가 들어찼다. 제가 알고 있던 옅은 올리브색이 눈앞에 가득했다.
“…찰리?”
떨리는 목소리는 분명 에그시의 것이었다.
“에그시!”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찰리가 와락 에그시를 끌어안았다. 이미 수백 번 입에 담았지만 오늘만큼 감격에 젖어 에그시를 부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에그시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찰리의 어깨를 잡고 강하게 밀쳐버렸다. 순식간에 찰리의 등이 바닥에 닿았다. 뒤통수까지 부딪히고 만 찰리가 아픔에 찌푸린 눈을 뜨기도 전에 재빨리 몸을 일으킨 에그시가 먼저 찰리의 가슴을 발로 짓눌렀다.
쿨럭, 찰리가 몸을 웅크리며 기침을 토해냈다. 콜록거리는 찰리의 위로 익숙하지만 낯선 에그시의 욕설이 무수히 쏟아져 내렸다. 씨발! 온갖 욕설을 내뱉는 에그시의 두 눈이 조금 전과 달리 형형하게 빛났다. 찰리는 눈물이 찔끔 맺힌 눈을 겨우 떠 에그시를 올려다보았다. 표피가 쓸릴 정도로 입술을 벅벅 문지르고 있는 에그시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에기.”
다시 한 번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에그시가 입술을 문지르다 말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는 찰리의 뒤편으로 떨어진 나이프가 보였다. 에그시가 날렵하게 달려가 그것을 주워들었다. 나이프를 단단히 쥐자 손잡이 부근에 땀이 스며들었다. 이상하게 손이 덜덜 떨려왔지만 에그시는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모든 감정을 무시하고 찰리의 복부를 향해 나이프를 찔러 넣었다.
“크헉!”
찰리가 비명과 함께 왈칵 피를 토해냈다. 온몸을 관통하는 고통이 찰리를 삽시간에 휘감았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을 움직이는 것도, 더 이상 신음을 뱉는 것도 불가능했다. 피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복부가 화끈거리고 아파왔다. 찰리는 나이프가 꽂힌 제 배를 움켜쥐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경련하듯이 바르작거리고 떠는 찰리를 내려다보며 에그시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반항하는 것도, 무기를 들고 있던 것도 아닌 찰리를 찌르는 것은 정말 손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상기된 얼굴로 헉헉 숨을 뱉는 에그시의 이마엔 땀까지 맺혀 있었다. 찰리는 어떻게든 에그시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 것은 고통에 찬 숨소리와 새빨간 피 뿐이었다.
에그시는 제 발치에 웅크려 바들거리는 애처로운 찰리를 그저 보고만 있었다. 에그시는 저 멀리서 날아온 탄환이 제 옆을 스치고 나서야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뺀 에그시가 경계 자세를 취했다. 재빠르게 달려 온 록시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에그시, 물러 서. 당장!”
록시는 바로 옆에 쓰러져서 피를 철철 흘리는 찰리에게 시선을 잠깐 두었다가 경악에 찬 탄성을 뱉었다. 오, 찰리! 록시는 안경을 통해 서둘러 멀린을 불렀다. 응급조치가 필요하다고 록시가 외치기도 전에 멀린이 먼저 움직였다. 여전히 에그시에게 총을 겨눈 채로 록시가 거리를 점점 더 좁혀왔다. 이런 이런. 에그시는 항복하는 척 여유롭게 두 손을 들고선 어깨를 으쓱였다.
에그시의 시선이 거의 기절하기 직전인 찰리에게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찰리의 눈은 이미 반쯤 감겨 있었다. 흐려진 시야로도 찰리는 에그시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찰리는 저를 향한 에그시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망설임 없이 제 복부를 쑤신 얼굴이라 보기에는 곳곳에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서려 있었다. 에그시…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그 이름을 속으로만 수없이 되 뇌이며 찰리는 곧 정신을 잃고 말았다.
고인 핏물이 점점 더 바닥을 적셔 가자 록시가 다급하게 멀린을 재촉했다. 록시의 불안한 눈빛이 찰리의 붉어진 셔츠 위로 떨어졌을 때, 에그시가 재빨리 움직여 록시의 손목을 쳐냈다. 총을 쥐고 있던 손에 순간 힘이 사라지자 에그시가 기다렸다는 듯 그 총을 낚아챘다. 당황한 록시의 어깨를 아프도록 짓누른 에그시가 터져 나온 비명을 무시한 채 열린 문 사이로 달려 나갔다. 혹 추적이 될까 싶어 에그시는 록시에게 뺏은 총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에그시는 손쉽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건물 구석구석까지 모조리 다 꿰고 있는 에그시에게 탈출이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멀린이 달려왔을 땐 이미 일이 종료 된 뒤였다.
*
찰리는 다행히 며칠 후 눈을 떴으나 부상이 심각했다. 깨어나서 통증을 느낀 것이 아니라 배에서부터 올라오는 고통이 너무 커서 억지로 눈을 뜬 것이나 다름없었다. 찰리는 상체를 들어올리기는커녕 한 마디 말을 할 때마다 죽죽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한동안 움직이기가 힘들 거다, 찰리.”
멀린은 제법 담담하게 말했으나 찰리는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이곳에 더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다. 찰리는 치유가 시급한 상태였고 도움이 되기는 고사하고 그들의 발목이나 붙잡는 짐이 될 것이다.
찰리는 돌아가겠다고 힘겹게 말했다. 멀린은 기다렸다는 듯 부상이 악화되지 않도록 안전히 옮겨줄 것이라 답했다. 찰리는 그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는 대신 방을 나서려는 멀린을 불러 세웠다. 눈을 뜬 순간부터, 아니 에그시에게 찔려 기절 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고민했지만 아마 제 답이 맞을 터였다.
“멀린, 에그시는….”
“아직 찾지 못한 상태지만 짐작이 가는 곳은 있지.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거다.”
“그게 아니라,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마… 에그시 몸 속에 있는 것 같아요.”
“무슨 뜻이지?”
멀린은 자세한 설명 없이도 찰리가 말하는 것이 자신이 그토록 찾던 에그시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리던 찰리가 이내 토해내듯 말했다.
“혀를 건드렸을 때 잠깐이나마 원래대로 돌아왔었거든요.”
찰리는 다시 한 번 그 동그란 눈동자를 떠올렸다. 날카롭게 저를 노려보던 눈빛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눈은 제가 가볍게 엉덩이를 쥐었다 놓거나 갑자기 입술을 파고들었을 때 종종 보이던 반응과 비슷했다. 찰리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제가 알고 있던 에그시 언윈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가라앉은 침묵 사이로 터져 나온 것은 멀린의 깊은 한숨이었다. 그는 굳이 그 상황에 키스까지 했냐고 핀잔을 주는 대신,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게 더 이상 입을 여는 건 삼가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