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히디아)
*
“아, 배고프다.”
키세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나는 배를 움켜쥐고 어두운 골목길을 걸었다. 본능 같아서는 아무거나 눈에 띄는대로 먹고 싶었다. 하지만 맛을 고려하지 않고 순전히 배만 채우는건 키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게 설령 지금과 같은 배가 매우 고픈 상황이라 할지라도. 키세는 배고프지 않다고 스스로 주문을 걸면서 걸음을 빨리 했다. 최상의 먹이는 아니더라도 제법 탐스러운 먹잇감을 찾아서 빨리 이빨을 박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늦은 시간이라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가는 인영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번잡한 번화가로 나가는건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곳에 널려 있는건 양은 풍부할지 몰라도 키세의 입맛에 도저히 맞지 않는 먹이들이었다. 운 좋게 먹이를 발견하면 좋으련만. 그런 꿈만 같은 생각을 하면서 키세는 깜빡이는 가로등 아래에 등을 기대어 섰다. 배가 고프니까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다. 하다 못해 키세는 그냥 편의점에라도 들어가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음식물로 배를 채울까 생각도 했지만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죽을때 죽더라도 내 인생은 폼생폼사임다! 아마 아오미네가 옆에 있었다면 한심하다는 얼굴로 혀를 찼겠지만 키세는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굳히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키세의 귀에, 발자욱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때였다. 보폭이 좁은 걸로 봐선 나이가 많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여성인 것 같지도 않았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니 키세가 서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 분명했다. 키세는 순간 놀라서 어디 숨을까 했으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지금 먹이가 제 발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100% 그런건 아니었지만 나이가 어릴수록 맛이 더 신선하고 좋기 마련이다. 키세는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 아래서 대충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
“…어?”
그리고 키세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은 남학생이었다. 어쩐지 존재감이 옅어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분명히 키세의 옆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고 있었다. 밤바람에 살짝 휘날리는 하늘빛의 머리칼이 무표정하고 말간 얼굴에 꽤나 어울리는 편이었다.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적당히 꼬여내 먹을 생각이었지만, 그게 이렇게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먹이였을 줄이야. 키세는 다시 배에서 꼬륵 소리가 나는 것을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저기…!”
“…뭡니까?”
키세처럼 반짝이는 외모를 지닌 사람이 서 있으면 슬쩍이라도 눈길이 가기 마련인데 너무도 평온하게 길을 지나가는 남학생에 좀 당황한 키세가 성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용건만 말하라는 듯이 무심한 눈을 한 남학생은 키세보다도 한참이나 작았고, 말랐으며, 무엇보다도 키세의 취향에 꼭 들어맞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키세 본인처럼 예쁘거나 화려한 외모도 아니고, 친구인 아오미네처럼 잘생긴 얼굴도 아니고, 미도리마처럼 단정하게 생긴 것도 아니었는데 그 작달만한 체구며, 흥미 없는 눈동자며, 결이 좋은 피부며, 적당히 운동을 하는 듯한 근육이 키세의 구미를 자극했다.
키세가 멍청하게 바라만 보고 서 있자 남학생은 살짝 짜증이 났는지 다시 한 번 키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할 말 있나요?”
“아. 저기, 그게… 아! 혹시 시간 있슴까?”
내뱉고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남학생은 살짝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수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키세가 뒤늦게 이런저런 말을 덧붙였다.
“그게, 저 이상한 사람은 아님다! 보면 알겠지만 멀쩡한 사람이고…. 아, 제가 부른 이유는 그게, 어… 그러고보니 이름이 뭔가요? 전 키세 료타라고 함다. 그냥 편하게 불러도 상관은 없는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횡설수설 하는지 키세 본인도 그 이유를 몰랐다. 말주변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말을 못하는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홀리거나 꼬여내는 일에는 단연 최고라고 자랑할 수 있는게 키세였다. 평소라면 몇 마디 건네는 것만으로도 이미 상대방의 환심을 사서 금방 처리했을 일이었다. 상대가 그렇게 강해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평소와 달리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키세는 땀을 뻘뻘 흘렸다.
“볼 일 없다면 가보겠습니다.”
“아, 잠깐…!”
잠시 말 없이 혼자 당황하고 있는 키세를 바라보던 남학생은 곧 냉정히 등을 돌렸다. 미련도 없이 훌훌 가버릴 것 같은 뒷모습에 키세가 깜짝 놀라서 남학생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힘 조절 같은건 할 겨를도 없었다. 당연히 어깨를 잡힌 남학생 쪽이 불쾌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키세의 손을 쳐냈다.
“아, 죄송함다! 일부러 그러려던건 아니고….”
“됐습니다. 자꾸 얼쩡거리면 신고하겠습니다.”
“엑, 그건 좀…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사실 용건은 간단하거든요? 아, 근데 여기서 말하기엔 장소가 좀 그런가. 제가 쏠 테니 근처 카페라도 가면 안됨까? 아니면 집이라도 상관 없…… 으악!”
“…!”
갑자기 설명도 없이 달라 붙은 주제에 늘어놓는 말들이 뻔뻔하기 그지 없다. 한밤중에 웬 남자에게 헌팅 당한 처지에 놓인 남학생, 쿠로코 테츠야는 금방이라도 덮칠 듯 구는 키세의 얼굴을 들고 있던 가방으로 가차없이 내리쳤다. 그 일격에 정신차린 키세가 물러나면 좋았을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키세가 뒤로 자빠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키세가 뒤로 넘어지면서 옆에 있던 가로등에 머리를 부딪쳤기 때문이었다. 듣기에도 아플 정도로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자빠진 키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끝난다면 다행이었겠지만 머리를 어떻게 박은건지 바닥에 드러누운 키세의 머리가 붉게 물들었다. 당황한 쿠로코가 서둘러 키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건 피가 잠깐 나고 멈췄는지 바닥을 적실 정도로 철철 흐르진 않았다는 점이지만 지금 이 상황이 좋다고 할 순 없었다. 쿠로코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키세의 두 발을 턱턱 양쪽 옆구리에 꼈다.
*
쿠로코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느낀 것은 온 몸이 욱신욱신 아프다는 감각이었다. 안그래도 어제 농구 연습이 조금 힘들긴 했다. 하지만 그 정도야 평소라면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다. 온 몸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원인은 어제의 그 남자, 키세 료타에게 있을게 뻔했다. 자신보다도 훨씬 큰 건장한 체구의 남성을 집까지 질질 끌고오느라 있는힘 없는힘까지 다 쓰며 진땀을 뺐던 새벽을 떠올리며 쿠로코는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오늘이 주말이라 학교에 가지 않아 다행이었다.
대충이라도 아침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쿠로코는 밍기적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머리가 보란듯이 뻗쳐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아침이 더 중요했다. 슬쩍 본 거실에는 어제 겨우겨우 끌고 온 금발의 남자가 엎어져 있었다. 부시시한 금발에 말라붙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것 같았지만 쿠로코는 애써 무시하며 거실에서 시선을 돌렸다. 실은 119를 불렀어야 하는게 아닐까 싶었지만 어젠 너무 당황해서 미처 떠올리질 못했다. 끙끙거리며 겨우 반쯤 끌고 왔을 때야 구급차가 떠올랐지만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아서, 그리고 생각보다 상처가 대단한 편은 아니라서 쿠로코는 결국 무작정 그를 집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프니까 그런 생각은 제쳐두고, 아침을 떼우기 위해 쿠로코는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내들었다. 친구인 카가미와 달리 요리에 능숙한 편은 아니었지만 자취를 한 이상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았다. 꽤 익숙한 손놀림으로 요리를 하던 쿠로코는 곧 거실에 엎어져있는 의문의 사내에 대한 생각 따윈 훨훨 날려버렸다.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계란프라이를 식탁에 내려 놓은 쿠로코가 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반찬이라도 꺼낼 생각으로 냉장고 문을 엶과 동시에 쿠로코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려야했다.
“와, 맛있어 보임다. 같이 먹어도 됨까?”
“…누구…!”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쿠로코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 서 있는건 멀쩡한 얼굴을 한 키세였다. 분명 머리통이 아작나서 피를 잔뜩 흘렸을텐데 마치 꿈이라도 되는 것 마냥 눈 앞의 키세의 몰골은 조금 초췌할 뿐이지 멀쩡했다. 쿠로코가 놀란 눈을 하고 있자 키세가 베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다쳤으니까 너무 걱정말아요.”
“…다치지 않았다는 점을 걱정하는 겁니다.”
“엑, 그쪽임까?”
“인간이라면 도저히 멀쩡할 수 있는 수준이 아녔는데요.”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을 정도로 약한 상처는 아니었다. 깨자마자 비명을 질러도 모자랄 판인데 멀쩡한 얼굴로 돌아다니기까지 하다니. 거기다 배까지 고픈지 같이 밥을 먹자고 권하는 태도가 도저히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어차피 전 인간이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됨다.”
“……머리 안 쪽이 많이 다친 것 같군요.”
“아뇨, 멀쩡한데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님다! 아니, 애초에 사람이 아니라구요!”
눈, 코, 입 다 붙어있는 얼굴에 팔도, 다리도 각각 두개씩. 어딜 봐도 자신과 똑같은 사람인데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꼴이 어이가 없어서 쿠로코는 저도 모르게 한심하단 얼굴을 했다. 그걸 눈치챘는지 키세가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방방 뛰었다.
“사람이면 멀쩡할 리가 없잖아요! 전 사람이 아니라 뱀파이어임다.”
“……겉모습은 멀쩡한 것 같으니 이만 집에서 나가주시죠.”
“아, 지금 믿지 않는거죠?”
쿠로코의 눈에 믿을 리가 없잖냐 하는 감정이 그대로 보여서 키세가 으으 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물론 다짜고짜 인간이 아니라 뱀파이어라고 하면 믿을 사람이 몇이냐 있겠느냐만은, 어째선지 키세는 지금 절박한 기분이었다. 의심의 눈초리를 한 눈 앞의 소년에게 자신의 존재를 마구 어필하고 싶어서 안달난 것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어떻게 하면 믿어줄까 잠시 고민하던 키세는 결국 쿠로코의 양 팔을 강하게 쥐었다.
“무슨 짓…!”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면 믿을 것 같아서요.”
쿠로코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키세가 잡은 손에 힘을 줘 쿠로코를 냉장고 쪽으로 밀쳤다. 아무리 체구 차이가 있다지만 운동을 하는지라 그렇게 약한 편이 아님에도 다가온 키세를 밀치기는 커녕 움직이는 것 조차 어려웠다. 쿠로코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키세를 발로 차려 했지만 그보다는 키세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간편한 옷을 입고 있던 쿠로코의 상의를 밑에서 잡아당긴 키세가 쿠로코의 목에 정확히 이빨을 박아넣었다.
“윽…!”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쿠로코가 키세를 밀쳐내려 했지만 당연히 밀리지 않았다. 사람의 이라고 하기엔 날카로운 이가 쿠로코의 목 깊숙히 박혔다. 쿠로코는 최대한 버둥거렸지만 빠른 속도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에 결국 손을 움직이는 것 조차 힘들어졌다.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쿠로코를 양 팔로 지탱하면서 키세는 오랜만의 식사를 정신없이 즐겼다. 배가 고팠던 탓도 있지만, 흥분을 주체 못 할 정도로 흡혈을 한 건 쿠로코의 피가 더할 나위 없이 최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잘난 듯이 아오미네에게 상대방이 살짝 어지러울 정도만 먹는 것이 예의라고 설명하던 것도 잊고 키세는 쿠로코가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피를 빨았다.
그렇게 이성을 잃고 본능에만 집중하던 키세가 정신을 차린건 쿠로코의 작은 바동거림이 아예 멈췄기 때문이었다. 쿠로코가 잠잠해지자 그제야 제 정신이 든 키세가 깜짝 놀라서 서둘러 입을 뗐다. 그 바람에 쿠로코의 목이며 키세의 입술에 피가 묻어나왔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설마 죽은건 아니겠지? 쿠로코의 피를 한 번 맛 본 이상, 도저히 오늘 한 번만 하고 넘어갈 상대가 아니었다. 키세가 당황해서 하얗게 질린 쿠로코의 뺨이며 힘이 빠진 팔을 건드리자 쿠로코가 작게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어, 어, 정신이 들… 악!”
죽은게 아니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키세는 아래에서 느껴진 격심한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아악… 아악, 저, 저기, 이건 진짜 아픈데… 어, 어?”
그리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겨우겨우 급소를 가격한 쿠로코 역시 그대로 픽 쓰러지고 말았다.
*
“괜찮슴까…?”
이번엔 진짜로 죽은게 아닐까 싶어서 숨을 제대로 고르는지 확인해보고, 심장 소리도 들어보고 별의 별 난리를 치던 키세는 쿠로코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를 소파 위로 옮겼다. 그리고 땀을 뻘뻘 흘리는 이마를 닦아주기도 하고 아직 차가운 손을 꼭 쥐기도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똥개처럼 돌아다니던 키세는 쿠로코가 눈을 떴을 때 환호성까지 질렀다. 그 뒤에 시끄럽다고 쿠로코에게 한마디 들었지만.
간신히 정신이 든 쿠로코는 아직 어질어질한 머리를 짚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도와주려는 키세의 손을 냉정하게 쳐낸 쿠로코가 소파 깊숙히 몸을 기대면서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꿈은 아니었는지 아직 물린 상처가 남아 있었다. 슬쩍 건드리니 다시 통증이 아릿하게 전해지는 것 같아 쿠로코가 키세를 조용히 노려봤다. 사실 속으로는 그렇게 잘못했나 싶기도 했지만 노려보는 쿠로코가 묘하게 무서워서 키세는 어정쩡하게 웃으며 사과를 건넸다. 그리곤 어색한 공기가 감도는 방 분위기를 환하게 하고자 입을 열었다.
“자제를 못한건 죄송함다. 진짜로… 기절 시킬 생각은 없었슴다. 그냥 믿지 않길래 보여주려고 했던 것 뿐인데, 배가 고팠던 상태라…….”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어제도 말한 것 같지만 전 키세 료타라고 함다.”
“…쿠로코 테츠야입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저 이름마저 왜 이렇게 귀여워 보이는지 키세는 만면에 웃음을 띄운 채 쿠로코에게 다가갔다. 자신은 피 빨리고 이렇게 누워있는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까 괜히 기분이 안 좋아진 쿠로코가 눈에 힘을 주었지만 키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은근슬쩍 소파 옆에 엉덩이를 올렸다.
“쿠로콧치라고 불러도 됨까?”
“…아뇨.”
“고맙슴다, 쿠로콧치!”
그럴거면 뭐하러 물어봤나 싶었지만 말해봐도 들을 것 같지 않아서 쿠로코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믿겨지진 않지만 뱀파이어라고 주장하는걸 보면 섣불리 건드려서 좋을건 없었다. 뭐가 어찌 됐든 자신의 목에 상처가 있는건 분명했고, 피를 빨리긴 했는지 아직도 어질어질하고 머리가 띵하니까. 눈 앞에서 헤벌쭉 웃고 있는걸 보면 그렇게 위험해보이진 않았지만 일단 당한게 있는지라 안심 할 수 없었다.
“일단 쉬는게 좋을 거 같슴다. 물이라도 줄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던 키세는 쿠로코의 냉정한 거절에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곤 다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쿠로코는 머릿 속으로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말을 꺼낼 겨를이 없었고, 키세는 그런 쿠로코를 바라보느라 바빴다. 무언가 말을 걸어서 좀 더 친해지고 싶었지만 평소엔 술술 나오던 작업 멘트나 입에 발린 말들이 오늘 따라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 앞에서 이렇게 초짜처럼 어색하게 구는 키세 료타라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고보니 어제부터 좀 이상했다. 평소라면 망설일 것 하나 없이 꼬시고, 먹고, 가볍게 헤어질 수 있는데 쿠로코한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처음 연애라도 하는 것 마냥 두근거리고, 설레고, 어찌할 수가 없다. 거기다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망설이던 키세가 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열었다.
“쿠로콧치, 갑작스럽지만 부탁이 있슴다.”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드는데, 뭔가요?”
“여기서 같이 살면 안됨까?”
“네. 안됩니다.”
“단칼에 거절할건 없잖아요!”
쿠로코의 예상대로 키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다짜고짜 본인이 뱀파이어라고 주장하더니 이번엔 같이 살잰다. 쿠로코의 주위에 이상한 사람이야 많고 많았지만 이 정도로 이상한 생명체는 처음이라 쿠로코는 미간을 좁혔다. 냉정하게 거절을 하자마자 너무하다며 호들갑스럽게 쿠로코의 어깨를 쥐고 훌쩍거리는 것이 같이 살면 어떻게 될 지 불보듯 뻔했다. 분명히 하루종일 들들 볶으면서 괴롭히리라. 적어도 집에서만큼은 조용히 있고 싶었기에 쿠로코는 키세의 폭풍같은 애교에도 무심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태도에 키세도 나름대로 상처받은 터였다. 어디가서 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외모에,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도 쉬운 성격이라 거절 당하는 것에 면역이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마음대로 행동했고, 딱히 제약을 받지도 않았기에 그 충격은 몇 배나 더 컸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키세는 상대방이 거절한다고 해서 포기하는 나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처럼 자신만만한 성격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온다면… 쿠로콧치가 허락할 때까지 나가지 않겠슴다!”
“그 말은 결국 이 집에 계속 있겠다는 뜻 아닌가요.”
터무니없는 고집에 쿠로코의 눈이 좀 더 싸늘해져서 키세는 속으로 땀을 삐질 흘렸지만 애써 티내지 않고 눈을 곱게 접었다. 일부러 매혹적인 웃음을 꾸며낸 키세가 조심스레 다가가 쿠로코의 뺨을 쓸었다. 허나 돌아온 것은 냉정한 뿌리침이었다.
“신고하기 전에 나가주세요.”
“엣….”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너무 안 넘어오는거 아닌가요! 키세는 속으로 꿍얼거리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쿠로코를 바라봤다. 여전히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쿠로코의 얼굴에 슬쩍 귀찮은 기색이 엿보였다.
오히려 상대방이 이렇게까지 넘어오지 않으니 좌절감을 넘어서 흥미가 생겼다. 키세는 부러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지으며, 누구보다도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쿠로코를 불렀다.
“아무것도 안할거예요. 그냥 쿠로콧치랑 같이 살고만 싶슴다.”
이번에야말로, 하고 키세가 찡긋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현관문이었다. 엑? 하고 당황한 얼굴을 한 키세를 보고 쿠로코가 그의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밀었다. 힘이 강하게 실려 있는건 아니었지만 가라는 의사는 명백히 드러나서 키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쿠로콧치, 너무함다! 저한테 이렇게 대한건 쿠로콧치가 처음임다.”
“왜 저랑 같이 살고 싶어하는 건가요?”
“그거야….”
“제 피가 목적이라면 사양합니다.”
“그런거 아님다! 물론, 그런 이유가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하여간 목적은 그게 아님다! 그건 맹세할 수 있단 말예요. 제가 쿠로콧치랑 같이 살고 싶어하는 이유는….”
답지 않게 우물쭈물하고 말을 고르는 키세를 쿠로코는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바짝 말라오는 입술을 훑으며 키세가 쭈뼛쭈뼛 눈을 굴려 쿠로코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청아한 눈동자를 본 순간, 키세는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쿠로콧치가 좋아서 그런거예요.”
무슨 얘기냐고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봐도 이상할게 없었는데 의외로 쿠로코는 어깨만 움찔 했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반응이 없는 쿠로코가 이상해서 슬쩍 쳐다본 키세는 곧 그의 얼굴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살짝 떨리고 있는 눈동자와 미세하게 붉어진 뺨이 쿠로코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작은 변화지만 키세의 눈엔 똑똑히 보였다.
“어제 처음 봤으니 이게 무슨 소리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진심임다. 첫 눈에 반한다는 거, 쿠로콧치가 알려줬슴다.”
“……오글거립니다.”
“그래도 그게 제 진심임다!”
그러고보니 저번에 미도리마가 말했던 것 같은데. 키세는 쿠로코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며 오래 전에 자신의 친우인 미도리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무 그렇게 꾸민 모습만 보인다면 진짜로 중요한 순간에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거다. 진지하게 마음을 전해야 할 때에는 진심만이 통한다는 거다. 당시에는 미도리마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던 키세였지만 지금은 미도리마의 통찰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맨날 재미없고 딱딱한 말만 하는 지루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키세는 올린 입꼬리를 내릴 생각도 안하고 눈 앞에 있는 쿠로코를 와락 껴안았다. 체구가 작은 만큼 키세의 품 안으로 쏙 들어오는 것이 또 마음에 들었다.
“쿠로콧치! 진짜 좋아함다!”
아직 기운이 없어 그런 것도 있겠지만 또 발로 찬다거나 하는 행동이 없는거 보면 미도리마의 말 대로 진심이 먹힌다는게 맞았다. 키세는 생전 처음 미도리마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쿠로코를 더욱 격하게 끌어안았다.
“숨 막힙니다, 키세군….”
쿠로코의 작은 중얼거림에서 머뭇거림이 느껴지는게 기분 좋아서 키세는 꼭 끌어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
“키세군. 진짜로 뱀파이어인가요?”
“갑자기 뭡니까? 아, 쿠로콧치가 드디어 제게 피를 줄 마음이 생긴….”
“아닙니다.”
으레 그렇듯이 키세의 말을 잘라먹은 쿠로코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어영부영 키세와 같이 살게 된 지도 벌써 며칠이나 지났지만 그 사이 이렇다 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날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도 다음날 바로 회복됐던 점만 빼면 키세는 아무리 봐도 사람과 똑같았다. 하는 행동이나 말투는 물론이고 쿠로코와 함께 밥을 먹는 것도 똑같았다. 쿠로코가 이상하게 여겨서 물어봤었지만 키세는 오직 피만이 주식은 아니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었다. 쿠로코는 속으로 그럼 인간과 다를게 뭔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근데 진짜 그건 왜 묻슴까? 아, 제가 너무 피를 안 마시는게 걱정돼서?”
“…딱히 그런건 아니지만 궁금합니다. 이대로 쭉 살아갈 수 있는 건가요?”
“에이, 그러면 뱀파이어가 아니잖아요. 일정량 섭취 못하면 죽슴다. 이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아무튼 지금은 괜찮슴다. 저번에 쿠로콧치가 줬잖아요.”
“그건 뺏어갔다고 하는 겁니다.”
쿠로코의 일침에 할 말이 없어진 키세가 머쓱하게 입술을 훑었다.
“그럼 평소엔 음식만 먹어도 되는건가요?”
“네.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그럼 굳이 같이 먹지 않아도….”
“아뇨! 쿠로콧치랑 같이 먹고 싶슴다. 앞으로도 그럴거예요. 쿠로콧치랑 같이 먹으면 맛있슴다.”
생각도 못한 의외의 말에 쿠로코가 눈을 크게 떴다. 같이 살게 된 이후로 늘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같이 식사를 했었기 때문에 놀라움은 더 컸다. 그런 쿠로코와 달리 키세는 아무렇지도 않게 활짝 웃으며 턱을 괴었다.
“쿠로콧치랑 같이 있기만 하면, 뭐든지 괜찮슴다. 다 좋아요.”
“…별로 기쁘지 않습니다. 그런 입에 발린 말.”
살짝 퉁명스러운 대답이었지만 그래도 싫어서 하는 말은 아니었기에 키세는 마냥 좋았다. 고작 며칠이지만 옆에서 지켜본 결과, 쿠로코가 늘 무심한 얼굴을 하고는 있어도 속이 따뜻하고 상냥한 성격이라는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은근히 배려해주는 쿠로코를 볼 때마다 끓어오르는 사랑스러움을 어찌할 수 없어 몸만 베베 꼬았던 키세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상관없슴다. 제가 쿠로콧치를 좋아하니까요.”
*
원래부터 굳이 딱딱하게 대한건 아니었지만 그 뒤로 쿠로코는 키세가 느끼기에도 예전보다 훨씬 유해져있었다. 그렇다고 키세가 들이대거나 하는걸 받아주거나 하는건 아니었지만.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쿠로코를 보면 오랜만이라며 껴안고, 대충 밥을 차리고 있으면 그게 또 귀엽다고 껴안고, 시도 때도 없이 옆에서 쿠로콧치 쿠로콧치 노래를 부르는 키세를 매번 무시하거나 가격하지 않는것만 해도 많이 달라진거였다.
쿠로코가 달라지면서 키세 역시 달라졌다. 달라졌다기보단, 그 전에는 몸을 꼬으면서까지 참고 있던 자제력이 풀렸다는 편이 맞았다. 지금도 소파에 앉아 있는 쿠로코의 옆에 슬쩍 다가간 키세가 책을 넘기는 쿠로코의 손을 붙잡는 중이었다.
“키세군, 저 바쁩니다.”
“책은 나중에 읽어도 되는거 아님까?”
“다음주가 시험입니다.”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쿠로코가 단호해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딱히 붙잡힌 손을 내친 것도 아니었으니까. 키세는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쿠로코의 손 끝에 쪽쪽 입술을 찍었다. 갑자기 손 끝에 닿은 부드러운 촉감에 놀란 쿠로코가 고개를 돌렸지만 키세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눈을 휘며 웃을 뿐이었다.
“쿠로콧치… 저 배고픔다.”
“굳이 피 마시지 않아도 살 수 있지 않나요.”
“피 먹지 않아도 살 수는 있죠. 그치만 맨날 밥만 먹고 살 순 없잖슴까!”
“흠….”
“쿠로콧치는 초밥도 먹지 말고, 고기도 먹지 말고, 라면도 먹지 말고, 맨날 흰쌀밥만 먹으라면 그러고 살 수 있슴까?”
알기 쉽게 음식에 비유했더니 쿠로코는 나름 알아들은 눈치였다. 본래 무표정인 편이긴 했지만, 쿠로코의 표정이 좀 더 진지해지는 것을 본 키세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은근슬쩍 쿠로코에게 다가갔다. 소파 위에 놓여있던 다른쪽 손을 꼭 쥐고서 자기 허벅지 위에 턱 올려놓기도 하고, 쿠로코의 어깨 쪽으로 얼굴을 좀 더 밀착시키면서 은근히 웃었다. 내 말이 맞잖아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유독 달콤했다.
“저도 별미 좀 맛보면서 살고 싶다구요….”
귀에 대고 소곤소곤대는 목소리가 여간 간질거리는게 아니라서 쿠로코는 휙휙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잡은 손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어깨를 감싸오는게 징하다 싶어 쿠로코는 결국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쿠로코의 미세한 끄덕임과 동시에 키세가 쿠로코의 귓볼을 앙 물었다.
“키세군, 그냥 피만….”
“에피타이저도 있어야죠.”
귓가에 또 간지럽게 속삭여주니 어깨가 흠칫 움츠러든다. 동그랗고 작은 어깨를 꼭 끌어안으며 키세의 혀가 턱선을 타고 목덜미에 안착했다. 이빨을 박을 생각은 안하고 연신 쪽쪽 거리며 핥기만 하니 몸이 노곤노곤해져와 쿠로코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 힘빠진다… 쿠로코의 몸에 긴장이 풀리는걸 느낀 키세가 실실 웃으며 쿠로코의 어깨를 강하게 눌러 눕혀버렸다.
“키세군.”
“그냥 가만히만 있어요. 편하게 해줄테니까.”
끝까지 하란 얘기는 절대 아니였는데, 하고 쿠로코가 거절의사를 표시하려던 때 키세의 손이 재빠르게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허리를 슥 훑고 바로 유두를 꾹 누르는 손놀림에 쿠로코의 입에선 짜증 대신 뜨거운 숨이 터져나왔다. 쿠로콧치도 좋으면서 뭘. 키세는 씩 웃으며 쿠로코의 쇄골에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