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 2.5D NOTICE GUEST

 해리에그시 + 에그시에그시

 어제도 아팠고 오늘도 아팠으니 내일도 아플 상처 위에

 *



1.


 해리는 내게 ‘잘 자라주었다’고 말해주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건 내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다.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히 해리는 내 과거에 대해 알고 있을 테지만 단순히 데이터 상으로 보는 것과 실제 겪는 것엔 큰 차이가 있었다. 아마 내 삶이 진정으로 어땠는지, 그 쓰레기 같은 삶 속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사실 알려주고 싶지도 않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우니까.


 그래도 대부분은 내가 참고 견딜 수 있을만한 정도였고 아직까지도 내 발목을 붙잡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 하나만 제외하고는. 솔직히 나는 그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고, 속이 뒤집혔으며,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해리를 만나기 전에는 쓰러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나마 그가 옆에 있어주었기에 아직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이었다.


 “아….”


 아주 가끔은 해리가 옆에 있음에도 그 끔찍한 악몽이 밤이 깊었다 싶으면 나를 찾아 와 속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무언가가 손발을 옥죄듯이 서서히 움직일 수 없어지면 어김없이 그 날의 기억이 바로 오늘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리플레이 됐다. 그 거칠고 역겨운 숨결이 바로 코앞에서 느껴질 정도로, 빌어먹을 기억은 잊혀 지지도 않고 매우 선명했다. 울부짖으며 싫다고 반항하는 나와 그 위에 올라타 제 더러운 살덩이를 들이미는 딘의 역겨운 꼴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아주 또렷이 내 시야를 메웠다.


 해리가 재빠르게 내 이상을 눈치 채고 억지로라도 날 깨우지 않는다면 난 아침까지 고스란히 그 끔찍한 기억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아야 했다. 실제로 해리를 만나기 전에는 그런 일이 부지기수였다. 끝나지 않는 악몽을 더는 버티지 못해 결국 뜬 눈으로 밤을 세기로 결정한 것도 모두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해리가 조심히 나를 깨우고, 왈칵 눈물을 터뜨리는 나를 끌어안고, 수도 없이 괜찮다고 속삭이며 나를 달래고 나서야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끝도 없는 죄책감과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해리는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푸근히 웃으며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괜찮단다, 에그시.”


 오직 그 다정한 목소리만이 나를 살리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나는 해리 하트를 만난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고 그가 내가 당신을 보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것에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했다. 정말로 같은 마음이 맞느냐고 재차 물었을 때 해리는 귀찮아하지 않고 손등으로 내 뺨을 부드러이 쓸어주었다. 내가 또다시 눈물을 쏟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해리의 끝없이 자상한 목소리도, 상냥한 손길도 내 죄책감을 완전히 덜어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해리가 그랬기 때문에 가슴 한구석의 어두운 부분은 더욱 심해지고 깊어졌다. 그 더럽고 추악한 기억 때문에 내 본능이 해리를 거부하는 것을 내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이마에 키스를 하는 것. 여기까지 오는데 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누군가 내게 접촉하려고 할 때마다 예민하게 날을 세웠고 격렬하게 그것들을 거부했다. 내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일 역시 내가 ‘좋아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으니까.


 나라고 해리와 자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해리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그가 내 손을 잡아줄 때면 그 따스한 체온에 눈물이 고인 적도 여러 번이었다. 자기 전 이마에 내려오는 아주 가벼운 입맞춤과 내 가슴을 도닥여주는 부드러운 손길, 언제고 변함없이 귓가에 사랑을 속삭이는 그 모든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나도 해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와 온전한 사랑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턱 끝까지 차올라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와 더 깊은 것을 나눌 수가 없었다. 그 빌어먹을 개새끼가 내게 심어 놓은 더러운 기억 때문이었다. 씨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욕을 지껄이는 나를 어르고 달래는 해리에게 미안해 죽을 것만 같았다.


 가끔은 먼저 용기를 내어 해리를 끌어안고 그에게 입 맞추고 싶었으나 막상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몸이 생각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수도 없이 그렸던 그림이었는데 그 잠깐의 입맞춤이 뭐 그리 어렵다고 이 바보 같은 몸뚱이가 굳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면 새하얗게 질린 머릿속 틈바구니 사이로 겨우 억눌렀던 끔찍한 악몽이 스물스물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내 위로 쏟아지던 무수한 욕설, 가리지 않고 날아오던 무거운 주먹, 그리고 내 아래를 우악스럽게 잡아먹던 딘의 뜨겁고, 더럽고, 잔인한…… 거기까지 생각이 진행되면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두 귀를 틀어막은 채 비명을 내질렀다.


 “흐윽, 윽, 해, 해리….”

 “오, 이런. 에그시, 괜찮아. 무리할 것 없어. 천천히 숨을 쉬어보렴. 에그시, 착하지….”


 이런 나를 이해해주는 해리 하트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나는 바보같이 그에게 매달려 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뾰족하고 어두운 것이 자꾸만 내 안을 찌르고 갉아먹는 느낌이 들었다. 질척한 것이 내 숨통을 조여 왔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해리에게서 그를 떠올린다는 것이 정말 끔찍했고 미안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날 이후 온갖 성인 남자에게서 딘의 역겨운 얼굴을 보았고 그 더러운 행위를 떠올렸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내 안을 파고들고선 자리를 잡은 채 사라지지 않는 악몽의 덩어리였다. 반사적으로 눈물이 줄줄 흘렀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손발이 떨려 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있을 수조차 없었다.


 “에그시, 아주 많이 좋아한단다.”


 그런 나를 버티게 만드는 해리의 달콤한 속삭임이 없었더라면 나는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2.


 “타임머신이라니, 그게 말이 돼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타임머신이라니! 지금이 30세기인 것도 아니고, 지금 이게 SF 영화인 것도 아닌데? 록시와 멀린도 내 말에 동의 하는지 대꾸가 없었다. 나는 사람 하나가 들어가면 꼭 맞을 것 같은 크기의 기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타임머신이라는 허황된 사실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생기기는 했다. 난생 처음 보는 형태의 기계였고 다른 곳으로 이동 시킬 수 없을 정도로 무겁기까지 한 그 기계는 정말 낯설기 그지없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에그시. 하지만 조사를 해 볼 가치는 있어.”

 “당신이 그렇게 말할 줄은 미처 몰랐네요. 수학적인 것만 믿는 줄 알았는데.”


 내 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멀린의 입매가 씰룩거렸다. 나는 어깨를 흔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 척 하지만 멀린은 제법 놀리기 좋은 상대였다. 물론 정말 화가 났을 때 보여주는 표정은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무섭지만. 해리 역시 그 모습을 아는지 조심히 내게 멀린을 너무 놀리지 말라고 충고할 정도였다.


 “정말 작동은 되는 거예요?”

 “이론상으로는. 다만 10년 이상의 시간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모양이야.”

 “10년….”


 그러면 내가 아직 10대였을 땐가. 그리고 아마 그 때쯤이면…….


 “멀린. 내가 실험해보고 싶어요.”

 “에그시?”

 “직접 사용해봐야 알 수 있을 거 아녜요? 내가 하겠다고요. 어차피 사람 필요했잖아요.”


 순식간에 확 변한 내 태도에 놀랐는지 멀린의 얼굴에 약간의 당혹이 서렸다. 나는 씨익 웃으며 가볍게 윙크를 해보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멀린. 죽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조금 전 이 기계를 믿을 수 없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갑자기 타임머신이라는 허무맹랑한 기계에 대한 신뢰가 증폭했다. 실은 그냥 믿고 싶어졌다. 이 차갑고 두꺼운 기계가 내 과거를 바꿔줄 수 있다고.


 10년이라면, 바로 그 때였다. 내게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기억을 심어준 날이 바로 그곳에 존재했다. 내가 다시는 남자와 깊은 접촉을 할 수 없게 만든 역겨운 계기.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을 맞추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었던 끔찍한 기억의 날. 내 안의 모든 것을 갈기갈기 부수어놓고 그 조각을 짜 맞출 수도 없게 만든 잔혹한 기억.


 “허락해줘요, 멀린.”


 나는 그 모든 것을 바로잡고 싶었다.




3.


 말은 그렇게 해놓고 실은 무서워서 전날 잠도 제대로 자질 못했다. 만약 고장 난 기계라면? 타임머신이라는 말은 다 뻥이고 알고 보니 들어간 사람을 조각조각 내는 살인기계면 어떡해? 터무니없는 생각이 어지러이 머리를 잠식했지만 그래도 결심을 돌리지는 않았다.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내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그것도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처음이 아니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내 끔찍했던 첫 기억이 삶을 이렇게 만들어버렸으니까.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킹스맨 활동을 할 때 늘 입는 수트를 차려입고선 내게 꼭 맞는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멀린이 뭐라고 하는 것이 보였으나 그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다 됐다는 뜻으로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자 멀린의 얼굴이 금세 심각해졌다. 머릿속으로 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지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팼다.


 그리고 그 너머로 달려오는 해리가 보였다. 아,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해리 하트. 해리에게 말했다가는 안 된다고 반대할 것이 뻔해서 나는 그가 알기 전에 무작정 기계에 오른 거였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저 손에 잡혀서 끌어 내려질 뻔 했겠네. 걱정과 약간의 화가 뒤섞인 해리의 얼굴이 두꺼운 창 너머로도 뚜렷이 보였다. 와중에 나는 생각했다. 저 얼굴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꼭 돌아와야겠다고. 죽지 않고 내 어두운 과거를 삭제한 다음에 다시 돌아와 해리 하트를 봐야했다. 그리고 그 품에 안겨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고선 잔소리를 내뱉으려는 그 입을 내 입술로 막고 싶었다. 정말 그때가 찾아온다면, 지금처럼 생각하는 것만으로 손끝이 하얗게 질리지는 않겠지. 나는 옅게 웃었다.


 그리고 곧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둔탁한 것이 머리를 내리치는 기분이 들었고 순식간에 몸이 훅 뒤집혔다. 실제로 내 몸이 돌아갔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속이 울렁거렸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메슥거리는 감각에 배를 움켜쥐고 눈을 꾹 감았다. 한참을 어지럽게 핑글핑글 돌던 느낌은 어느 순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파스스 흩어졌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통신이 안 되는 게 안타깝네요, 멀린.”


 내가 서있는 곳은 자주 가던 펍, 블랙 프린스 옆 골목이었다. 익숙하지만 결코 그립지 않은 풍경에 나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히 멀린과 해리는 보이지 않았다. 돌아왔다. 정말로 나는, 10년 전의 내가 있던 곳으로 날아간 것이었다.




4.


 “내가 한 거 아니라니까요!”

 “거짓말 하지 마. 너 아니면 누구겠어?”

 “아저씨가 지갑간수 제대로 못해놓고 왜 생사람을 잡아요?”


 흠. 내 기억이 맞다면 내가 소매치기로 오인 받았던 그 날인 것 같았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감상하는 중이었다. 아직 키도 작았고 얼굴엔 앳된 티가 남아 있었다. 내가 보는 내 얼굴은 이런 느낌이구나. 나는 해리가 내 뺨을 감싸 쥐며 사랑스럽다고 속삭이는 것에 의문을 느껴야 했다. 저렇게 어둡고 그늘이 진 얼굴의 어디가? 틱틱 말을 쏘아붙이는 얼굴은 세상을 다 산 사람마냥 어두웠다. 나는 해리가 객관적이지 못한 시선으로 나를 아껴주고 사랑하는 것에 감사해야 할지 아니면 걱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실랑이는 생각보다도 더 길어졌다. 지금의 나보다도 덩치가 큰 남자 둘이 어린 나를 둘러싸고 있어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건너편에 있는 내 귀에까지 들릴 정도로 내가 버럭버럭 화를 내고 있다는 것과 그 태도에 남자들이 제법 당황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사실 남자들은 내가 훔쳤다는 증거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심증으로 의심했던거지. 그 증거로,


 “그럼 또 뒤져보던가! 아무것도 안 나왔잖아요?”


 남자들이 내 몸을 수색했지만 지갑은 나오지 않았더랬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끗흘끗 쳐다보는 것이 꽤 민망했는지 남자들이 주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이곳에 살면서 온갖 꼴을 다 봐왔던 나와 달리 남자들은 척 보기에도 우연히 이 거리를 지나가던 잘 사는 행인이었다. 곧 큼큼, 헛기침을 한 남자들이 어물쩍 결론을 내리고선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나는 슬슬 어린 내게로 걸음을 옮겼다.


 내 기억대로 남자들은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가버렸다. 누가 봐도 소매치기로 오인 받을만한 소년이니 손가락질 당해도 마땅하다는 생각이었겠지. 웃음이 다 나왔지만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제가 마지막이었던 거 아니었나?”


 어린 내가 씩 웃으며 몰래 꺼낸 저것은 분명, 저 남자들의 지갑이 맞을 테니까. 빙글빙글 웃고 있던 내가 고개를 돌려 휙 나를 보았다.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이런 느낌이군. 생각보다도 더 오묘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린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차림새를 슥 훑더니 팍 인상을 구겼다. 이렇게 고급 수트를 차려 입고 아는 척 할 만 한 사람을 알지 못해서 일거다. 그리고 신기하기도 하겠고.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그야 바로 어젯밤 친구가 소매치기로 잡혀가는 꼴을 봤기 때문이겠지. 안 그래도 마음에 걸리던 이런 일은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결심했을 거다. 그래도 오늘 당장 배를 채울 돈은 없고, 지나가는 샌님들은 누가 봐도 돈이 많아 보였으니 마지막이라고 되 뇌이며 슬쩍했겠지. 나는 씩 웃으며 어린 내 손에 들려 있던 지갑을 훅 낚아 채갔다.


 “글쎄. 우선은 이걸로 저기서 술이나 한 잔 해도 될까?”


 내가 고개 짓으로 블랙 프린스를 가리키자 내가 눈썹을 올리며 불퉁하게 대꾸했다.


 “내가 왜요?”

 “지갑을 돌려받고 싶을 테니까.”


 어린 나는 내 손에서 지갑을 다시 채가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아직 내 턱 끝 밖에 미치지 않는 키로는 무리였다. 결국 어린 나는 씩씩거리며 나를 따라 펍 안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해리가 나를 만나러 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나는 기네스를 주문했다. 어린 나는 미성년이었기에 물 한 컵을 쥐어주었다. 사실 저 나이에도 나는 이미 술을 마셨고, 이 펍 역시 우리를 딱히 제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술을 시켜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계속 뚱한 얼굴이었다. 애써 훔친 지갑을 뺏긴데다 훈계까지 들을 판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나를 훈계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나는 이 시절 내가 가장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그것은 내가 들고 있는 두툼한 지갑 따위가 아니었다.


 “아직도 자기 전에 키스하니?”

 “뭐요? 갑자기 그게 무슨….”

 “그 메달에 말이야.”


 어린 나의 목에 걸린 메달을 가리키자 경계심에 움츠러들었던 눈이 번쩍 뜨였다. 대체 어떻게 알았냐는 얼굴이었다. 잊을 리가 없지. 해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늘 하던 일이었다. 매일 밤 메달 위로 조심히 입을 맞추며 제발 내일 하루는 평온하기를 바랐던 날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만약 전화를 받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고작 그 6자리의 숫자를 누르지 못했던 멍청한 내 자신을 난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 메달은 일종의 희망이었고 내가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었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 앞으로는 괜찮으리란 생각을 갖게 만들어주었으니까. 마침내 그 메달의 주인이 찾아왔을 때 내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온 감격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아마 해리는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그… 사람이에요?”


 물어보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약간의 기대와 일말의 걱정이 섞여 있는 눈빛이 나를 스쳤다. 기억 속에서 메달을 건네주던 이는 해리였을 테니 시간이 흘렀음에도 더 젊어진 모습인 것이 이상할 만도 했다. 난 대답을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거지.”


 애매한 답이었으나 어린 나는 딱히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어쨌거나 나에게 중요한 것은 메달을 알고 있는 이가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나를 보러 온 거예요?”


 애써 강인한 척 하는 그 목소리가 물기에 푹 젖어 있다는 것을 모를 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까스로 동아줄을 붙잡은 심정으로 앉아 있겠지. 테이블 위로 올린 작은 주먹이 애처로이 떨리는 것을 보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주먹을 부드럽게 내 손으로 덮고 말았다.


 “물론이지.”


 반짝이는 두 눈동자가 아주 많은 것을 담고서 나를 보고 있었다. 온갖 감정이 다 녹아 있었지만 사실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나를 구원해주세요.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해리 하트가 지금의 나를 구한 것처럼, 그런 일이 나타나기를.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는 이미 내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어린 나는 감격에 젖어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딘에게 맞는 일이야 일상에 가까우니 넘어간다 하더라도 그 대상이 어머니로 옮겨간다면 일은 더 커질 터였다. 그녀는 아직 어린 나보다도 더 여리고 약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품안에 있던 것을 꺼내 어린 내게 주었다. 어린 내가 지갑을 훔쳤네 마네 하는 일로 실랑이를 하던 사이 근처 약국에서 재빨리 사온 약이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나를 향해 나는 작게 웃어보였다.


 “어머니는 괜찮을 거야.”

 “그걸… 대체 어떻게…?”


 어제부터 고열로 헛소리를 하던 어머니가 오늘 아침에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던 사실을 내가 너만큼이나 알고 있기 때문이지. 그녀에게 줄 약과 음식을 위해 소매치기를 했다는 것까지도. 나는 설명하는 대신 푸석푸석한 어린 나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볼 수 있으면 내일 만나자.”


 한 박자 느리게 답이 돌아왔다.


 “볼 수 있어요.”


 나는 그저 웃을 따름이었다.




5.


 우리가 만나는 횟수는 점점 많아졌다. 오늘이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타임머신의 한계는 꼭 8일까지였다. 내가 이곳에 왔던 그 시간 전에는 기계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니 나는 내일 정오까지 모든 일을 마쳐야했다.


 오늘 어린 나는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서 나를 만나러왔다. 모자를 푹 눌러써도 보이는 상처에 절로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시퍼렇게 멍이 든 눈두덩이며 터진 입술을 보고 있으니 괜히 내가 다 아픈 기분이었다. 실제로 내가 아픈 게 맞기도 했다. 나는 이런 몰골을 하고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죽도록 싫어했다. 그래서 일부러 오늘은 블랙 프린스가 아니라 내가 머물고 있는 근처 숙박업소로 나를 불러냈다. 어린 나는 약간 주저하다 결국엔 내 방으로 몸을 밀어 넣고 말았다.


 내가 그 모자를 조심히 벗겨냈을 때 드러난 얼굴은 생각보다도 더 엉망이었다. 이렇게까지 심했던가? 부어오른 한쪽 눈은 뜨고 있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보다 더 눈에 들어온 것은 내가 시뻘게진 눈을 하고도 입을 꾹 다문 채 눈물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에그시.”


 내가 나를 부르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진 차였다. 나는 천천히 어린 나의 어깨를 잡아당기고, 그를 내 품안으로 단단히 끌어안았다. 내 생각보다도 훨씬 작고 여윈 체구가 품안에 가득 담겼다. 말랐다. 지금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내가 넉넉히 안을 수 있을 정도였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눈물이 전염된 것만 같았다.


 이윽고 이마를 내 어깨 위로 묻은 어린 나의 몸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어깨가 조금씩 젖어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내 입에서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낼 수 있었다. 새벽부터 어머니를 괴롭히던 딘의 역겨우리만치 당당한 얼굴과 곧 내게 날아오던 커다란 손. 그는 술에 취해 있었고 때문에 평소보다도 더 힘을 조절하지 못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맞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닿는 곳마다 멍이 들었고 피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나는 무너져 내렸다. 내 몸 어느 한구석 멀쩡한 부분이 없었다. 나는 정말로 엉망이었다.


 어린 내게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몸뚱이 하나 뿐 이었는데 그마저도 거의 망가진 상태였다. 누구라도 붙잡고 도와달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게 손을 내밀어줄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는 나와 내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버티고 살아야 했다. 그 생각으로 겨우 견디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러기가 힘들었다. 끝도 없는 바다 깊숙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내 손을 잡고, 나를 품에 안아주고, 그리고 귓가에 애정을 속삭여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 쓸쓸한 날이었다.


 “에그시.”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오늘은 내가 있었다. 적어도 어린 그를 끌어안고 달래줄 수 있는 나 자신이. 내 입에서 나온 내 목소리 역시 민망할 정도로 축축했다. 어린 나의 부스스한 머릿결 위로 몇 번이고 입술을 찍으며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넌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그 언젠가 해리가 내게 해주었던 말을, 이번에는 내가 어린 나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훌쩍이던 소리가 멎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올린 어린 나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널 좋아하게 될 거야.”


 이렇게 살아온 나를 좋아해줄 누군가가 정말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아닌 척 굴었지만 이 당시 나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내 존재의 가치라곤 찾아볼 수 없다고. 하지만 지금 내 곁에는 해리가 있었고, 록시도 있고 멀린도 있었다. 어머니는 아주 건강했고 귀여운 여동생마저 있었다. 나는 그들을 매우 사랑했고 그들 역시 내게 사랑을 주었다.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씨발, 난 지금 필요해요….”


 웅얼거리는 소리가 울음과 함께 먹혀들었다. 또 울음을 토해내며 어린 내가 어깨를 들썩였다. 나는 그 작고 동그란 어깨를 감싸 쥐고 가만가만 문질러주었다. 그러곤 드러난 이마에 조심히 입을 맞추었다. 지금도 해리가 밤마다 내게 해주는 입맞춤이었다. 해리를 만나기 전 내가 메달에 꼬박꼬박 키스를 했듯이.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그 위로도 입술을 찍었다. 훌쩍이던 내가 얌전히 품으로 안겨들었다. 다른 쪽 눈가는 엉망이라 입술로도 건드리기가 힘들어보였다. 대신 나는 부러지지는 않은 콧잔등 위에 입을 맞추고, 눈물 자국이 선연한 뺨 위에 가볍게 키스했다. 이 모든 것이 해리가 내게 해주는 사랑의 표식이었다. 그 다음 남은 자리는 언제나 늘 실패하곤 했던 그 마지막 하나였다.


 아주 천천히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어린 나는 잠시 움찔했을 뿐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아주 다행히 나 역시 끔찍하거나 두려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다만 잔뜩 부르트고 거칠어진 입술을 포개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울컥 눈물이 터져 나왔다. 꼴사납게도 이제는 내가 눈물을 흘렸다. 나는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아주 느리게 다친 입술을 혀로 살살 훑어내는 것에 집중했다. 마치 내가 치료라도 해주는 것처럼.


 “오늘은 가지 마, 에그시.”


 한참이나 내 숨결을 불어넣고 나서야 얼굴을 떼어낼 수 있었다. 그저 나이 차이만 있을 뿐인 두 얼굴이 똑같이 엉망이었다. 나는 손으로 더러워진 어린 나의 얼굴을 대충 닦아주었다. 오늘은 돌려보낼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벌어질 상황은 나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갔던 그 날의 반복일 터였다. 나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겪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버둥거리는 나를 폭력과 욕설로 제압하고선 오로지 힘으로 나를 짓뭉개고, 파고들고, 상처가 나고 피가 흐를 정도로 헤집었던 그 끔찍한 잔상은 여직 나를 괴롭히는 중이었다. 지금 이렇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불규칙해질 정도로.


 “괜찮아요?”

 “응. 그러니까… 가지마.”


 이번에는 어린 내가 나를 달랬다. 나는 헉헉거리며 그 작은 팔을 붙잡았다. 단호한 내 얼굴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후으, 후, 하아. 나는 해리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떠올리며 진정하려 노력했다. 괜찮단다, 에그시. 무엇 하나 걱정할 것이 없지. 눈이 시릴 정도로 따스한 그 품이 문득 그리워졌다. 대신 나는 그런 식으로 따뜻한 품을 필요로 하는 어린 나를 끌어안았다.




6.


 울다가 지친 나는 금방 잠이 들었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내가 몇 번 달래주자 금세 눈을 감았다. 혹 나쁜 꿈이라도 꾸지 않을까 옆에서 지켜보았다. 다행히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인상을 찌푸리는 일 없이 나는 곤히 수면을 취했다. 별반 크기 차이도 나지 않는 내 손을 꼭 잡은 어린 나의 손등 위로 부드럽게 입술을 찍었다.


 나는 당장 내일이면 돌아갈 터였다. 그러면 어린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유약한 어머니와 여전히 폭력적인 딘이 있는 그 집으로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자신을 안아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내가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말테니까. 오늘은 피했지만 언젠가는 또 딘이 내 몸을 탐하는 날이 올지 몰랐다. 아니, 거의 확실했다. 그 새끼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단순히 이 끔찍한 기억을 뒤로 미루고 싶어 온 것이 아니었다. 그림자처럼 쫒아 다니며 평생토록 나를 괴롭힐 기억은 필요치 않았다. 어떤 계기를 만들어야 했다. 변화할 수 있는 무언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나의 처음을 그런 개새끼가 아니라, 나를 아주 아껴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었다. 이를 테면 지금 나처럼. 적어도 지금의 나는 나 자신을 아주 좋아하니까.


 밤이 깊어지자 내가 눈을 떴다. 어둑해진 창 밖에 조금 놀란 눈치였으나 벗어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오늘 괜찮을 거라 말해주자 이리저리 구르던 눈동자가 멎었다.


 “…에그시.”


 나는 제 이름이 어색한 사람처럼 굴었다. 맨날 머그시니 하는 식으로 부르는 인간만 주위에 가득할 테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내 옆으로 몸을 바투 붙였다. 잠에서 깬지 얼마 되지 않아 체온이 따끈했다. 조금은 멍한 눈으로 나를 보는 어린 나의 이마에 내 얼굴을 맞대었다. 가까스로 기댈 곳을 찾아낸 나의 작은 희망을 부수고 싶지 않았다. 서로의 코를 비비적거리며 입술에 키스했다. 나는 거부하지 않고 내 어깨를 잡아 왔다.


 나의 경험은 끽해야 떠올리기도 싫은 그 폭력이 전부였지만 어린 나를 쓰다듬는 손길은 그 누구보다도 조심스러웠다. 내 경험은 경험으로 치부하기도 힘든 것이었다. 그건 폭력 그 이상의 것이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신중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내 몸을 쓸고 곳곳에 입을 맞추었다. 상처투성이로 엉망이 된 내 몸을 치유하는 것처럼 굴었다. 이런 일이 다시는 없을 거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새벽의 길고 긴 시간은 오롯이 내가 어린 나의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조심히 매만지는 데에 쓰였다. 나는 몸을 뒤척이기도 했고 얼굴을 가리기도 했으나 가끔 흐느끼는 듯도 하고 흥분한 것도 같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럴 때면 그 입술에 사랑을 가득 담아 키스했다. 해리가 내게 바랐던 것, 그리고 내가 바랐던 것 모두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내가 곧 나의 은밀한 곳까지 손을 뻗었을 때 작은 몸이 바르작거리고 떨렸다. 조금은 겁먹은 눈이 나를 보았다. 나는 잘 떠지지도 않는 그 눈가에 키스하며 그 근처를 몇 번이고 조심히 어루만졌다. 내가 전달하고 싶은 것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나는 허벅지며 등허리 사이에도 자리 잡은 멍울과 상처를 위로했다. 마침내 어린 나는 나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나는 작은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한참의 시간 후 우리가 하나가 되었을 때, 나는 이미 울고 있었다. 그건 나를 부둥켜안고 있는 어린 나도 마찬가지였다. 온몸 가득 느껴지는 것은 서로의 뜨끈한 체온이었다. 이 행위는 실은 내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내가 어린 나의 몸에 있던 상처를 하나하나 만지는 순간 내 머릿속에, 그리고 가슴속에 파편처럼 자리 잡았던 어둡고 끔찍하고 우울한 것들이 하나 둘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떠올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을 잘게 부수어버렸다. 더 이상 나를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도망치지 못하게 내 양팔을 붙잡았던 것과 달리 나는 내 손가락 하나하나 빠짐없이 입을 맞추었다. 숨을 쉬기 힘을 정도로 나를 짓눌렀던 무게는 느낄 수도 없게 아주 조심히 움직였다. 오로지 자신의 욕구를 풀기에 급급했던 거칠고 빨랐던 그것과 달리 나는 느리고 부드럽게 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진정으로 ‘처음’을 겪을 수 있었고, 그건 어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진짜 처음이었다.


 아침이 다가오도록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서로를 부둥켜안기만 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터진 입가를 획인 하듯 손끝으로 꾹꾹 누르던 어린 내가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름이 뭐예요?”


 나는 대답 대신 아직도 어린 나의 목에 걸려 있는 메달을 잡았다. 그리고 지금껏 수십 번, 수백 번 그랬듯 그 위로 조심히 입술을 떨구었다. 성스러운 행동이라도 되는 것 같은 내 행동을 어린 나는 익숙하게 응시했다. 입술을 떼어 낸 나는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이 번호 가짜 아니야.”


 그러니까 연락해. 어린 나는 잠깐의 침묵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7.


 돌아오는 것은 올 때와 똑같았다. 준비라고 할 것이 없었다. 나는 숙박비를 모두 지불하고 먼저 나섰다. 곤히 잠들어 있는 나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편하게 잠든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이른 아침이었고, 정오까지는 할 일도 없던 터라 나는 이 근처를 슬슬 걸었다. 그리고 딘을 보았다. 우연이었다. 아니, 정말로 우연일까? 어쩌면 만나고 싶어서 이렇게 돌아다닌 건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처음이었다는 거였다. 내가 이 얼굴을 보고 반가워한 것이.


 얼굴을 최대한 가린 채 나는 아주 가볍게 그를 손봐주었다. 실은 내 피부가 닿는 것이 싫어서 직접 가격을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몇 년간 쌓여있던 무거운 덩어리가 사그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요령껏 혼을 낸 덕에 딘은 못해도 몇 주는 꼼짝 못하고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아예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 나나 어머니께 화풀이 할 것이 뻔했으므로 나는 손수 구급차를 불러주기까지 했다.


 할 일이 사라지자 더 느긋해졌다. 나는 샌드위치 따위로 어중간한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기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기계를 마주하자 또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싫거나 거부감이 느껴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이렇게 했다고 해서 나의 모든 기억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내 미래가 갑자기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멀린의 말에 의하면 그냥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내가 탄생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그 일을 겪지 않은 에그시 언윈이라니. 꿈에서나 있던 일이었는데. 내가 정말 나를 구원한 느낌이었다.


 마침 주위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주섬주섬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지금의 거리와는 약간 느낌이 다른 거리의 모습이 보였다. 불안했는지 또 손이 떨려오는 것 같아 양손으로 꾹 잡았다. 곧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나더니 어지러워졌다. 세상이 도는지 내가 도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핑글핑글 돌았고,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기억이 뚝 끊겼다.




8.


 나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것이 확실했다. 그리운 얼굴이 바로 눈앞에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한 것은 해리에게 달려가 그 품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해리!”

 “에그시.”


 그리고 여전히 다정하게 나를 불러주는 그 목소리를 내 입술로 집어삼켰다. 언제나 내게 사랑만을 주던 그 입술을 찾아든 순간, 해리는 기다렸다는 듯 내 등을 끌어안고 기꺼이 나를 받아주었다. 내 눈에서 뚝뚝 떨어진 눈물이 해리의 뺨을 적셨다. 해리는 밀어내는 대신 오히려 바짝 몸을 붙여오며 젖은 내 눈가를 엄지로 살살 쓸어주었다. 나는 겹쳐진 입술로, 눈물이 넘실거리는 눈으로 몇 번이고 그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해리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그 아이가 나처럼 따스하게 저를 안아 줄 품을 찾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