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그시는 파티 홀에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한 찰리에게 조금 놀라는 중이었다. 몇 번이고 입었는데도 여직 수트가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저와 달리 찰리는 제 옷을 꺼내 입은 듯 전혀 불편해보이지 않았다. 그는 능숙하게 안으로 들어서선 제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형식적이어도 부드러운 미소를 건네 보였다. 조금 전 에그시의 옆에 달라붙어 일이 끝나고 나면 우리 집에 가자며 끈질기게 굴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에그시와 록시는 찰리에게서 한 발 물러선 채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평소엔 느끼지 못했지만 찰리 헤스켓이 부잣집 도련님이 맞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순간이었다.
“멀린이 왜 찰리를 보내야겠다고 했는지 알겠어.”
“재수 없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네.”
록시면 모를까, 적어도 자신보다는 훨씬 괜찮다고 생각하는 에그시였다. 일단 에그시는 소위 귀족들이 쓰는 억양이나 말투에 쉬이 익숙해지질 못했고 그들과 대화하며 자연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도 어려워했다. 귀족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말을 섞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자신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자꾸 생겼고, 그럴 때마다 에그시는 툭 튀어나오려는 거친 말을 목 안으로 삼키느라 바빴다. 그들에게 정보를 살만큼 호감을 얻는 일은 아마 평생 무리일거라고 에그시는 생각했다. 그런 에그시와 달리 지금 찰리는 흠 하나 없이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샴페인이나 마시고 있으면 되나?”
“배가 아프다고 하지는 말아줘, 에그시.”
록시의 가벼운 농담에 에그시가 작게 웃었다. 둘의 잔이 허공에서 가볍게 부딪혔다. 찰리는 제법 성실하게 사람들 무리에 섞여 타겟에게 접근해가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될 것만 같아 에그시는 벌써부터 심심해졌다. 찰리가 신호를 주기 전까지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에그시는 샴페인을 다시 목 뒤로 넘기며 찰리의 잘빠진 뒤태를 감상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던 에그시였지만 찰리를 처음 본 순간 에그시는 그 머나먼 이야기를 뼛속 깊이 실감할 수 있었다. 저보다 한 뼘은 더 큰 키와 다부진 어깨, 그리고 남을 비웃는 듯 입가에 걸린 여유로운 미소에서 그가 알파라는 것이 너무도 명확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기억은 나지 않아도 자신의 아버지부터가 알파였고, 해리는 에그시가 생각하기에 가장 완벽한 알파이자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찰리를 처음 본 그 순간만큼은 누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찰리가 크게만 느껴졌다. 후에 에그시가 록시에게 슬쩍 물었을 때 그녀는 짓궂은 얼굴로 에그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머, 에그시. 나한테는 그런 말 안했던 것 같은데?”
그녀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 하는 것은 에그시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에그시는 한껏 당황해선 손을 저었다. 놀라서 뻘뻘거리는 에그시의 얼굴에 푸흐 웃음을 터뜨린 록시가 장난이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에그시는 정말 록시가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까 걱정했다. 본의 아니게 알파끼리 비교한 것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록시는 화를 내는 대신 시원하게 웃으며 에그시의 어깨를 두드렸다. 농담이니 얼굴 좀 펴라면서. 에그시는 다시 한 번 록시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것은 그런 록시를 볼 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찰리를 볼 때면 퐁퐁 샘솟았다는 점이었다. 에그시는 제 안에서 간질거리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알았지만 그것을 고스란히 찰리에게 전달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그 때만 해도 찰리는 에그시의 얼굴만 보면 비죽 웃으며 시비를 걸기 바빴기에 감정을 털어놔 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어렴풋이 이 철없는 도련님이 나한테 관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구나,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좋은 결과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처럼 구는 찰리가 긍정적인 답을 보낼 가능성보단 차라리 도망을 칠 확률이 훨씬 높았다.
그런 에그시의 예상과 달리 찰리는 어느 날 불쑥 에그시를 찾아와서는 덜컥 제 마음을 고백했다. 자기감정을 인정하기는 할까? 그동안 에그시가 우려했던 것처럼 아무래도 찰리는 그 과정을 굉장히 오래 겪은 듯 보였다.
“내가 아주 오랜 고민 끝에 깨달은 게 하나 있는데.”
“뭔데? 네가 많이 모자란다는 사실?”
“그런 거 아니고! 어쨌든 들으면 너도 대답해야해.”
“뭐 길래 그래. 너 못난 건 나도 다 알고 있는데?”
에그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되물었다. 찰리의 좁아진 미간이나 딱딱한 목소리에 서투른 진심이 잔뜩 묻어나왔다. 그래서 에그시는 설마, 설마 하고 더 개구지게 받아쳤다. 좋아하노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그려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에그시 자신이지 찰리가 아니었다. 그 예상과 달리 찰리는 타들어가기 시작한 입술을 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나 너 좋아해.”
매번 틱틱거리고 시비만 걸더니 이게 무슨 직구래. 에그시는 예상 못한 상황에 헛웃음만 터뜨렸다. 그 도련님이 자기감정을 완전히 인정한 것도 모자라 먼저 말을 꺼냈다는 것이 퍽 놀라웠다. 타이밍을 재고 있던 에그시도 당황해서 눈만 깜빡여야 할 정도였다. 금방이라도 농담이었다며 귓가를 붉힐 것 같던 찰리는 예상 외로 진지한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에그시의 손을 꽉 잡아 왔다.
“에그시, 넌 어때?”
어떠냐고 물어도… 아마도 내가 먼저 좋아했을 걸? 그러나 에그시는 솔직하게 답하는 대신 으음, 말꼬리를 늘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을 택했다. 색다른 찰리의 모습이 재미있던 것도 있었고 저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그 저돌적인 눈빛으로 보아 이런다고 그만둘 것 같지도 않아서였다. 머뭇거리느라 아무 말 안하고 있던 저와 달리 그 찰리가 먼저 확 치고 들어 왔다는 게 살짝 억울하기도 했고 말이다. 에그시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찰리가 다급하게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너도 나 좋아서 계속 알짱거린 거 아니야?”
“야, 내가 언제 알짱거렸어? 가만히 있으면 찾아와서 시비를 건 게 누군데.”
“아닌데? 에기, 네가 자꾸 내 눈에 거슬리게 해서 그런 거였어.”
“너무 좋아서 자꾸 눈에 들어왔나 보지 그럼.”
탁구공을 주고받듯이 태연하게 말을 던지고 나서야 에그시는 제가 한 말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깨달았다. 뒤늦게 뒷목이 훅 달아올랐다. 흘끔 곁눈질을 하자 찰리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처음 보는 멍청한 얼굴에 에그시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잊고 푸흐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찰리, 그 멍청이 같은 표정은 뭐냐?”
에그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계속 멍하니 서있던 찰리가 에그시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래서 대답이 뭐야.”
“어떤 답을 원하는데.”
“내가 바라는 대로 해줄 거야?”
찰리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에그시는 흐응, 콧소리를 내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럼 어쩔 건데?”
말이 끝나자 순식간에 찰리의 얼굴이 앞으로 가득 들어찼다. 그대로 양 뺨을 구겨 잡은 찰리가 거칠게 입술을 부딪혀왔다. 당황한 에그시의 발끝이 절로 들렸다. 놀란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혀는 그 틈으로 느껴지는 숨결만큼이나 뜨거웠다. 얼굴은 커다란 손에 단단히 붙잡히고, 높이도 맞지 않아 까치발까지 들고 선 우스꽝스러운 꼴을 하고도 에그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혀끝이 저릿할 정도로 기분이 들떴다. 에그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에그시와 찰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손을 잡고 포옹을 하는 사이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 록시가 찾아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에그시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그 축하를 받아들였다.
“드디어 사귀게 됐구나. 축하해, 에그시.”
“드디어라니?”
그렇게 빤히 눈에 보였었나?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에 에그시가 멋쩍게 웃었다. 록시는 씨익 웃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찰리가 얼마나 외치고 다녔는지 몰라. 같이 있으면 솔직히 조금 거슬릴 정도로.”
“뭐? 나한테 말하기도 전에 소문내고 다녔어?”
“아, 말로 그랬다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너한테 다가가면 경계하듯이 싸한 향을 뿌렸거든. 너랑 얘기할 때는 완전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졌지만.”
오. 에그시는 처음 안 사실이 마냥 신기하고 재밌었다. 에그시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자 록시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아마 네가 알파나 오메가였더라면 바로 그 날 찰리와 사귀게 됐을지도 몰라. 너무 노골적이라 내가 낯 뜨거울 정도였다니까.”
에그시가 생각하기에도 얼굴로는 아닌 척 하면서 그렇게 직접적인 향을 내뿜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우스운 것을 넘어 옆에서 지켜보기 부끄러울 것만 같았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라 에그시는 시원스레 웃어보였다. 록시가 새침하게 웃었다.
“물론 에그시, 네 의견이 그와 동일했다는 가정 하에.”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얼굴을 구긴 에그시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봐도 부정의 제스처였다. 록시는 덩달아 크게 웃고 말았다. 에그시는 제 의견이 찰리와 같은 것을 넘어 아예 제가 먼저였을 것이라 확신했지만 혼자만의 비밀로 남겨두기로 했다. 자신이 오메가였다면 어쩔 수 없는 본능의 이끌림이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 체향이니 뭐니 하는 것을 조금도 느낄 수 없는 몸으론 첫 눈에 사랑에 빠졌다고 홍보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리 그것이 사실이라고는 해도 에그시는 순순히 찰리에게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펄쩍 뛰며 기뻐할 것이 눈에 선했으나 그래서 더 그랬다.
“아무래도 찰리가 잘 꾀어낸 모양이야.”
잠시 옛날 생각을 하던 에그시가 고개를 들었다. 제게 보여주던 미소와 비슷한 얼굴을 한 찰리가 능숙하게 다른 여인의 허리에 팔을 두른 것이 보였다. 임무라는 것을 모르지도 않았고, 에그시는 딱히 그 부분에 대해 질투를 느끼거나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와중에도 에그시가 신경 쓰이는지 굳이 이쪽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는 찰리의 노골적인 윙크에는 조금 화가 났다.
“저 멍청이가 들키면 어쩌려고 저래?”
에그시의 탄식에 록시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랑에 빠진 알파는 가끔 바보 같아진다니까, 에그시. 록시의 위로 아닌 위로에 에그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건 그냥 찰리 헤스켓이 바보라서 그런 거야.”
그 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했는지 록시도 이번에는 말을 잇지 않았다. 어쨌거나 찰리가 그녀를 데리고 갔으니 진짜 임무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에그시와 록시는 찰리가 신호를 보낼 때까지 밑에서 대기 하고 있다가 신호가 오면 같이 움직이는 역할을 맡았다. 호화로운 파티라고는 해도 한 꺼풀 벗겨보면 사람을 죽이는데 이골이 난 실력파들이 득실거릴 것이 뻔해서 에그시나 록시 이외에도 다른 요원들까지 투입된 상태였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킹스맨 후보였던 이들의 얼굴도 드문드문 보였다. 에그시는 그들에게 반가운 인사라도 건넬까 하다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에그시는 디저트 따위를 몇 개 집어먹으며 록시와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상해 보이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에그시가 다시 새로운 샴페인 잔을 집어 들었을 때 록시가 조금 불안한지 눈썹을 치켜떴다.
“예상했던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시간 지났어?”
“약간. 혹시 모르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그래도 신호가 없으면 올라가보자.”
에그시가 시계를 보자 정말 찰리가 신호를 보내기로 한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몇 분 정도 늦는 것이야 사정상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더 이상 늦으면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겼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저 맛있는 음식이나 먹으며 별 생각하지 않고 있던 에그시의 몸에 바짝 긴장이 들어섰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찰리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할 인물은 아니었지만 무엇 하나 안심할 수 없는 직업이 바로 킹스맨이었다. 에그시가 애꿎은 주먹만 폈다 말았다 하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록시가 조심히 말을 건넸다.
“에그시, 내가 올라가볼까?”
“아냐. 내가 가볼게.”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던 에그시가 5분이 지나자 바로 몸을 틀었다. 이 멍청이가 같잖은 실수로 일을 늦춘 것이라면 그 등짝을 매섭게 두드리며 욕을 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면 아프다고 우는 소리를 내면서 미안하다는 듯 안겨들 터였다. 덩치를 고려했을 때 사실 안기는 쪽은 찰리가 아니라 에그시 쪽이긴 했지만 말이다. 귀찮다 싶을 정도로 제 목덜미를 향해 입술을 찍는 찰리의 얼굴을 냉정히 밀어내며 얼른 움직여야 한다고 다그쳐야겠다고 생각하며 에그시는 걸음을 빨리 했다. 에그시는 발끝에 차이는 불안을 모르는 체하며 다른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도착했고, 에그시는 주변을 살피며 조심히 예약해둔 방으로 향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손바닥에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야, 찰리. 너 안에 있지?”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에그시가 문에 뺨을 찰싹 붙이고선 크게 물었다. 노크까지 해보았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진짜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안 좋은 예감이 스쳐지나갔다. 에그시가 서둘러 문고리를 잡은 순간, 안쪽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끙끙거리는 낮은 소리는 분명 찰리의 것이 맞았다. 더 볼 것도 없이 에그시가 거칠게 문을 열어 젖혔다.
“찰리!”
혹 피라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있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방 안은 깨끗했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기만 한 방에서 보이는 거라곤 커다란 침대 위에 웅크려 있는 찰리뿐이었다. 그 커다란 몸을 둥그렇게 말고서 시트를 꽉 부여잡은 찰리가 힘겨운 숨을 토해냈다. 재빨리 문을 닫은 에그시가 그리로 달려가 찰리의 팔을 잡았다. 손바닥 너머로도 뜨끈한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야, 무슨 일이야? 너 독이라도 마셨어?”
에그시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찰리는 대답 대신 침대 시트 위로 이마를 부볐다.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땀으로 푹 젖은 데다 눈도 이미 반쯤은 풀려 있었다. 얼굴이며 몸이며 할 것 없이 모두 불에 덴 것 마냥 뜨거웠다. 에그시는 어찌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손으로 뺨을 찰싹 두드리며 연신 이름을 불렀지만 찰리는 지금 눈앞의 에그시가 보이지도 않는 눈치였다.
식은땀을 흘리는 찰리의 상태는 척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에그시는 이미 잔뜩 흐트러진 찰리의 웃옷을 아예 벗겨버렸다. 하얀 셔츠마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에그시는 열이 나는 몸을 식히기 위해 노력하며 계속 찰리를 불렀다.
“씨발, 왜 그런지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야. 찰리 헤스켓!”
아파서 제정신도 아닌 찰리를 조금 아프도록 내리치며 에그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달뜬 숨만 내뱉는 찰리를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뒤늦게 에그시는 록시에게 호출을 넣었다. 록시! 에그시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상황이 틀어졌음을 눈치 챈 록시가 서둘러 조치를 취했다.
에그시의 연락에 놀란 만큼 록시는 아주 빨리 둘을 찾아 왔다. 뛰어올라온 록시의 숨은 거칠었으나 찰리만큼은 아니었다. 방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록시는 공격적일 정도로 날이 서 있는 찰리의 체취에 절로 몸을 움츠려야 했다. 피부 속을 파고들듯이 찌르르 울리는 향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찰리! 설마 약을 먹지 않았던 거야?”
저를 짓누르기까지 하는 찰리의 체취를 겨우 버텨낸 록시가 웅크린 찰리의 몸을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문을 열 때부터 짐작한대로 찰리의 상태는 러트를 맞은 알파와 아주 흡사했다. 숨을 헐떡이는 찰리의 호흡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내밀자 고개도 들지 못하고 끙끙거리던 찰리가 덥석 그 손을 잡아챘다. 손목이 아릴 정도로 잔뜩 힘을 준 찰리가 눈을 치켜떴다. 놀란 에그시와 달리 록시의 얼굴이 더욱 담담히 가라앉았다. 알파인 제가 다가오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 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확실한 증거였다.
“약이라니, 무슨 약? 록시, 얘가 왜 이러는지 알아?”
“당연하지. 알파라면 모를 수가 없을 걸.”
문제는 대체 왜, 하필 지금 러트가 찾아왔느냐 하는 점이었다. 찰리가 데리고 갔던 그 여자의 짓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러나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우선은 찰리를 안정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찰리, 일단 심호흡하고 조금만 더 참아 봐.”
저를 향한 날선 눈빛을 거두지 않는 찰리의 등을 토닥이며 록시는 제 향을 최대한으로 가라앉혔다. 에그시는 그저 옆에서 둘의 모습을 멀뚱히 보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록시는 찰리가 저를 경계하는 것이 번거로운 듯 했지만 에그시는 차라리 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제가 수도 없이 이름을 부르고 몸을 흔들었지만 찰리는 반응도 하지 않았다. 열에 들뜬 눈으로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기는 했어도 에그시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마치 이 공간에 에그시 언윈이라는 존재가 없는 것처럼. 에그시는 무언가 안쪽에서부터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에그시?”
“…….”
“에그시!”
분명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밖으로 떠밀리는 것 같은 느낌. 입어본 적 없는 수트를 입고, 만나본 적 없는 거물들과 같은 자리에 있을 때보다도 더 이질적인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아래로 침전하는 에그시를 겨우 위로 끄집어 올린 록시가 강하게 외쳤다. 에그시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에그시, 일단 아멜리아 좀 불러와 줄래?”
“아멜리아?”
“밑에 있을 거야. 우리들 중에선 유일한 오메가니까….”
록시가 말을 흐렸다. 찰리의 숨은 갈수록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베개를 아예 쥐어뜯을 정도였다. 축 처진 에그시의 눈치를 보며 록시가 조심히 덧붙였다.
“그리고 에그시, 넌 밑에서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신경 써서 해주는 말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으나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다. 정말로 쫒겨나는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곳에 계속 남아있는 것 또한 탐탁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록시의 반응으로 에그시는 찰리가 어떤 상태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정말로 러트 사이클이 찾아온 것이 맞다면, 그래서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열을 해소하지 못해 저렇게 앓는 것이 맞다면… 에그시는 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히 에그시는 겪어본 적도 없었고 러트가 온 알파를 본 적도 없었다. 다만 상식적인 수준에서 극도로 흥분한 상태의 알파가 본능적으로 오메가를 찾는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에그시는 그것이 그저 문장 하나로 설명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점을 이제야 실감했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해소시킬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실상 그것은 제 열기를 받아줄 ‘오메가’를 찾는 행위에 가까웠다. 그러니 에그시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에그시가 아무리 찰리의 손을 제 바지춤에 넣고 아래를 자극해도 그 열기를 흩뜨릴 수는 없는 일일 테니까.
에그시는 어떤 정신으로 밑으로 내려갔는지,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아멜리아에게 말을 걸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아멜리아가 무척이나 미안한 눈길로 저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어렴풋이 기억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여전히 머리가 멍했고 손의 떨림은 멎지 않았다. 에그시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몸을 옮겼다. 에그시가 혼자가 되자 마침 멀린이 말을 걸어 왔다.
[에그시. 아무래도 찰리가 마신 액체에 호르몬을 교란 시키는 약이 들어있었던 것 같다. 인체에 해가 되는 종류는 아닐 거야.]
“……그래서 지금 다행이라고 기뻐해야 하는 건가요?”
신경질적인 어투에 멀린은 다시 조용해지고 말았다. 멀린의 탓도 아니고, 실수를 하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이 찰리의 탓도 아니란 것을 똑똑히 알고 있으면서도 화가 났다. 치솟는 열을 주체하지 못하고 헐떡이는 애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존재라니. 에그시는 난생 처음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딘이 날리는 주먹을 고스란히 맞을 때에도, 엉엉 우는 데이지를 끌어안고 겨우겨우 달랠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에그시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에그시의 의지는 그에게 필요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그시가 아니었다.
사귀고 나서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살갑게 굴던 찰리였다. 여전히 유치하게 굴기는 했어도 마무리는 꼭 이마며 뺨에 잘게 입을 맞추어댔고 에그시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정성껏 등허리며 엉덩이 따위를 문지르기도 했다. 남자와의 결합은 처음이었으나 찰리가 공들여 배려를 해준 덕에 아프기는커녕 지금껏 살아오며 느꼈던 쾌락보다 더한 것을 맛보기까지 했었다. 이렇게 붙어올 때마다 부드러운 미소를 걸치곤 귓가에 조근조근 속삭여주던 그 달콤한 목소리가 에그시는 내심 좋았다. 좋아해, 라고 나지막이 속삭이는 음절마다 뚝뚝 떨어져 나오는 감정이 에그시를 가득 적셔주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사랑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던 사람은 지금 이곳에 없었다. 명백히 흥분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한 주제에 그 눈동자에 자신을 담지는 않았다. 평소엔 먼저 달려들어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좋아한다고 수도 없이 속삭여놓고선. 에그시는 왈칵 차오르는 감정을 토해내지도 못하고 꾹꾹 억눌렀다. 정작 몸을 섞을 누군가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지금 이 순간에는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는다는 점이 가장 서글펐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둘째 문제였다. 그의 인생에서 완벽한 이방인이 된 기분은 생각 이상으로 아리고 아파서 눈물이 뚝뚝 흐를 정도였다.
같은 부분을 찾아보기 힘든 사이이기는 했다. 태생부터가 판이하게 달랐으며 살아온 환경은 극과 극이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어느 것 하나 맞지 않아 마찰을 빚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귓가에 간질거리는 말을 속삭였고 벗어나지 못하게 단단히 깍지를 낀 채 거리를 걷던 둘이었다. 부드러이 호선을 그린 입술을 제 손등 위로 가볍게 올리는 찰리의 따뜻한 눈빛에 에그시가 웃음을 터뜨리기도 여러 차례였다. 어긋나는 점도 많았고, 싸운 횟수는 셀 레야 셀 수도 없을 정도였지만 입을 맞추고 몸을 겹친 날도 꼭 그만큼 있었다. 그래서 오늘처럼 거리감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에그시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이건 절대로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였다. 사이를 투명한 벽이 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씨발, 개 같아….”
땀을 줄줄 흘리며 괴로워하던 찰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시트를 꾹 부여잡은 손끝이 하얗게 질리기까지 했다. 찰리!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간헐적으로 뜨거운 숨만 뱉던 모습이 선명했다. 극도로 차오르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부르르 떨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을 옆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제 모습이 덩달아 눈앞에 펼쳐졌다. 에그시는 엉망으로 젖은 뺨을 닦지도 못하고 숨만 들이켰다. 생각해 보면 계속 이름을 부르고 걱정을 한 저와 달리 찰리는 에그시의 이름을 부르지 조차 않았다.
문득 에그시는 자신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어째서 아버지와 결혼을 했느냐고. 미셸은 푸흐흐 웃으며 에그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운명적으로 서로를 원하게 되어 있단다.”
에그시는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구나. 덧붙인 마지막 말이 귓가에 바스라졌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꿈과 같이 신기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정말로 이 세상은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본능과도 같은 이끌림, 가장 절실할 때 서로를 찾는 원초적 욕구. 이들의 결합이야말로 세상이 빚어낸 가장 번듯한 그림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에그시는 그 자격조차 얻지 못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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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제가 오메가버스에서 베타라는 존재가 무척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기에..
본능적으로 서로를 원하게 되어 있는 세계에서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된다는 점이 무척 좋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