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 2.5D NOTICE GUEST

 13 화우 웹진

 *



 “아오미네, 다 먹었으면 좀 치우던가!”

 “내가 왜.”


 쇼파에 아예 드러누운 아오미네가 농구 잡지를 뒤적이며 건성으로 답했다. 말해봤자 듣지 않을거 뻔히 알면서도 카가미는 꼬박꼬박 잔소리를 하곤 했다.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아오미네를 잠시 노려보던 카가미가 이내 한숨을 쉬며 빈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식탁을 정리하고 있자니 내가 왜 아오미네랑 이러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언제부터 아오미네가 집에 드나들게 된거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그저 최근의 모든 기억들 사이에는 늘 까무잡잡한 피부에 푸른 머리칼을 지닌 아오미네가 껴 있었다. 흐음? 카가미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릇들을 마저 다 집어넣었다.


 “다 했냐?”

 “어, 응. 지금 나가자고?”

 “싫냐?”

 “아니, 좋지! 좀만 기다려. 거기 있는 공 가지고 가.”


 카가미가 부엌에서 덜그럭거리는 것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던 아오미네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찌뿌둥한 목을 간단히 돌리고서 잡지를 테이블 위로 던진 아오미네가 슬금슬금 현관으로 향했다. 대충 운동화를 구겨신으며 말을 걸었더니 카가미가 의도를 정확히 알아채고 방으로 후다닥 들어 갔다. 식탁 의자 위에 벗어놓은 앞치마를 바라보며 아오미네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머리는 나쁘고, 덩치는 커다랗고, 근육까지 있는 바보 주제에 앞치마까지 꼬박꼬박 챙겨 입고서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는게 얼마나 웃긴지 본인은 모를 터였다. 그리고 그런 카가미를 보는 아오미네의 입꼬리가 늘 씰룩인다는 것도 누군가 알려주기 전엔 평생 모를 터였다.


 아오미네가 신발장 위에 올려놓은 농구공을 집어 들자 마침 카가미가 방에서 뛰쳐나왔다. 교복을 벗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카가미가 씩 웃으며 아오미네에게 다가 왔다. 빨리 가자. 저를 잡아 끄는 카가미를 보며 아오미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가미는, 아오미네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전혀 모를 터였다.



 *



 화창한 주말이었다. 나른한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던 카가미의 시선이 쇼파에 앉아 있는 아오미네에게 꽂혔다. 평소라면 제 집마냥 늘어져서 잠을 자거나 TV에 얼굴을 박고 있어야 하는 아오미네가 각까지 잡고서 앉아 있는 것이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카가미가 쳐다보자마자 아오미네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가미 쪽으로 다가 왔다. 아오미네가 할 말이야 밥 먹자, 외엔 농구 하자 뿐이여서 카가미는 자연스럽게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 근데 지금쯤 코트에 사람 많을텐데. 카가미의 중얼거림을 들은 아오미네가 표정 변화 없이 툭 내뱉었다.


 “노래방 가자.”

 “엉? 지금?”


 뜬금없는 아오미네의 권유에 카가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노래에 그다지 자신이 있는 편이 아니라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노래방이라고 해봤자 세이린 멤버들과 다 같이 갔던 것 외에는 가본 적도 없었다. 고민하는 카가미를 잠자코 보고 있던 아오미네가 이내 카가미의 손목을 덥썩 낚아챘다. 어, 어? 카가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아오미네가 잡은 손을 질질 끌기 시작했다.


 “아오미네, 나 노래 잘 못하는데.”

 “알아.”

 “…니가 어떻게 아는데.”

 “그럼 니가 노래를 잘 하겠냐? 안 봐도 뻔하지.”


 한 번도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한 적 없었지만 그래도 남 입에서, 그것도 아오미네 입에서 무시하는 듯한 말을 들으니 슬그머니 화가 치솟았다. 키세면 모를까 아오미네도 딱히 노래를 잘할 것 같진 않아서 카가미가 팔을 홱 뿌리치고 걸음을 멈추었다.


 “너도 별로 잘 할거 같지 않거든?”

 “야. 난 노래신이야. 내 노래 들으면 너 뻑가.”

 “…하여간 허풍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카가미를 보고 아오미네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까지도 카가미는 아오미네가 원하는대로 움직인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대놓고 비웃으니 기분이 나빴다. 지나가던 아이가 보면 와앙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아오미네가 몸을 기울였다. 그래서 안갈거냐고. 솔직히 가기 싫은 마음이 더 컸으나 동행해주지 않으면 아오미네가 억지로라도 끌고 갈게 뻔해서, 그리고 가면서 계속 투덜거릴게 뻔해서 카가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아오미네가 표정을 풀고서 걸음을 빨리 했다.


 뭐가 그리 급한지 먼저 성큼성큼 걷는 아오미네의 뒤를 따라가면서 카가미도 생각에 잠겼다. 내가 언제부터 이 녀석하고 이렇게 친한 사이가 된거지? 사실 친하다고 표현하기도 애매했으나 일주일에 다섯번은 만나는 사이였으니 서먹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학교도 다르고, 연습을 매일 빠지는 아오미네와 달리 부 활동에 꼬박꼬박 참여하는 카가미는 하교 시간마저 늦었으나 아오미네는 굴하지 않고 카가미를 보러 왔다. 카가미가 혼자 사는 집은 이젠 아오미네의 또 다른 숙박소나 다름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번호까지 입력하고 들어온 아오미네는 아무렇지도 않게 쇼파에 드러눕고 냉장고를 뒤지는 등 제 집 마냥 굴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를 않아서 카가미도 결국 포기한 상태였다. 그리고 뭐, 혼자 있으면 적적한 집에 사람 온기가 느껴지는게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고.


 사실 만나봤자 하는 건 둘 중의 하나였다. 같이 농구를 하거나, 집에서 밥을 먹거나. 시덥잖은 얘기도 주고받긴 했으나 내용은 늘 거기서 거기였다. 서로에 대한 비난이거나, 농구에 관한 이야기거나. 시도 때도 없이 투닥거리면서도 같이 있으면 은근히 시간이 잘 가는 걸로 보아 생각처럼 안 맞는 사이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카가미는 아오미네와 함께 코트를 뛰며 농구공을 튕기는 것이 좋았다. 몇 시간을 같이 뛰어다녀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그건 아오미네도 마찬가지여서 귀찮다는 얼굴을 해도 카가미의 손에 순순히 이끌려 코트를 밟곤 했다. 농구공 하나와 골대 하나만 있으면 정말 둘 만의 세계라도 된 것 마냥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둘 모두 그 시간들을 꽤 좋아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던 카가미는 어느새 아오미네의 뒤를 따라 건물로 들어섰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자니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카가미는 알지 못했다. 아닌 척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 엄청 긴장하고 있는 아오미네는 일부러 틱틱거리며 카가미를 건드렸다. 사내 새끼랑 노래방이라니, 간지러워 죽을 것 같다. 그 간지럽고 유치한 짓을 자기가 한다는 생각에 아오미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론 그걸 알 리 없는 카가미는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냈을 뿐이었다.


 “너 먼저 불러.”

 “아, 나 노래 못하는데. 그냥 너 먼저 불러.”


 카가미가 민망한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저었지만 아오미네는 듣지 않고 번호를 꾹꾹 눌렀다. 카가미가 그저 콧노래로 몇 번 흥얼거린 적이 있던 노래였다. 익숙한 전주에 눈을 크게 뜨는 카가미를 억지로 일으켜세운 아오미네가 그 손에 마이크를 쥐어주었다. 야, 빨리 해. 시간 아까워. 아오미네의 억지에 의해 카가미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떼야 했다. 사람이 없어서 덜 쪽팔린 것 같다가도, 이 공간에 같이 있는게 아오미네라는 사실에 한층 더 부끄럽기도 했다. 머뭇거리면서 1절을 거진 다 흘려보내고 있는 카가미를 한심하게 바라본 아오미네가 카가미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악! 왜 때려!”

 “노래방에 왔으면 노래를 하라고! 시간 가는거 안보이냐?”

 “그러게 너부터 하라고 했잖아!”


 빽빽 소리를 지르는 카가미를 짜증 섞인 눈길로 바라보던 아오미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곱게 놓여있던 마이크를 집어 든 아오미네가 노래를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사실 아오미네는 잘 모르는 노래라 그냥 화면에 뜨는 가사를 웅얼웅얼 읽는 수준에 불과했다. 얼마나 잘하나 듣고 있던 카가미가 참지 못하고 푸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너 노래 진짜 못한다.”

 “병신아, 모르는 노래라 그렇거든?”


 바로 받아치는 아오미네를 향해 작게 웃어보인 카가미가 이내 능숙하게 노래를 이어갔다. 이제야 제대로 노래를 하는 카가미를 흘깃 바라보던 아오미네가 슬며시 마이크를 내려 놓았다. 쟤가 노래 부를 동안 난 선곡이나 해야지. 정신없이 책을 뒤지는 아오미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카가미도 중간부터 아오미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한 번 부르기 시작하니까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 것에 상관없이 힘껏 열창했다. 좁은 공간에 울려퍼지는 카가미의 약간 흥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아오미네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곧바로 얼굴을 구기면서 안 웃은 척 했지만.


 그 뒤로 약 30분 내내 카가미는 쉬지도 않고 노래를 불러제꼈다. 아오미네가 중간 중간 같이 마이크를 들기도 했으나 카가미는 내려놓지를 않았다. 처음에는 너 혼자 하라며 아오미네에게 마이크를 넘겨주더니만 어느 순간 흥이 올랐는지 어깨까지 들썩였다. 어정쩡하게 웃고 있던 얼굴에도 이젠 상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카가미가 예상 외로 내빼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오미네에게 있어 즐거운 일이긴 했다. 평소엔 볼 수 없던 모습이기도 하고, 좋다고 웃는 애를 별로 막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카가미가 의외로 노래를 잘 부른다는 점에 있었다. 나름대로 준비를 해온 아오미네의 마음이 초조하게 타들어갔다.


 “아, 힘들어!”

 “……그렇게 존나 불러대니 안 힘들리가.”


 모르는 노래가 나오자 그제야 의자 깊숙히 몸을 기대는 카가미를 보며 아오미네가 쓰게 웃었다. 어찌나 열심히 불렀는지 카가미의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그게 다 보여서 아오미네가 괜시리 큼큼, 헛기침을 했다. 어찌 됐든 지금 나오는 노래는 아오미네가 부르려고 준비해둔 바로 그 곡이었다. 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옷매무새를 정리한 아오미네가 마이크를 쥐고 멋지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내내 이 노래만 들으면서 가사를 외운 덕에 화면은 볼 필요도 없었다. 화면에 떠오른 연애시대, 네 글자에서 시선을 뗀 아오미네는 대신 낯간지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카가미에게 눈을 맞췄다.


 “언제나 거침없던 내가 조금씩 눈치를 보고 있어

 겉으론 관심없는 척 차가운 도시의 남자인 척.”


 하도 불러대서 입이 습관처럼 가사를 읊고는 있었지만 지금 아오미네의 머릿 속엔 아 존나 멋있게 불러야 하는데! 하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자꾸 신경 쓰다보니 음도 이상하게 덜덜 떠는 것 같은데 그래도 아오미네는 굴하지 않고 끝까지 노래를 이어갔다. 두 눈을 끔뻑이며 아오미네를 올려다보는 카가미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우리 연애할까 나 오랫동안 솔로…여서 연애가 서툴지 모르지만

 네 전 남…자친구…보다 네가 만난 모든 남자보다 가장 널 사… 큼큼, 할게 우리 연애할까, 흠, 흠!”


 아무리 준비를 했어도 입 밖으로 내뱉기엔 아무래도 쪽팔려서 간지러운 단어가 나올때마다 아오미네가 괜히 고개를 돌리며 웅얼거렸다. 괜히 노래 하다가 중간에 기침을 하기도 하고, 어색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기도 했지만 노래를 끝까지 마친 아오미네는 굉장히 뿌듯한 상태였다. 아, 내가 생각해도 노래 존나 잘한 거 같아. 모모이도 반할 정돈데? 그렇게 자아도취에 빠져서 슬쩍 카가미의 눈치를 보는데 아오미네가 노래를 시작한 이후로 끝날 때까지 카가미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질 않았다. 멀뚱히 굳어 있는 카가미를 보며 아오미네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야, 입 닫아라. 그렇게 감동했냐?”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카가미를 보고 아오미네가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멍하니 있는 카가미의 머리를 두어번 툭툭 치자 카가미가 그제서야 고개를 붕붕 저었다. 헝클어진 제 머리를 정리하면서 카가미가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못한다.”

 “엉?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아니, 아무것도.”


 아무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지만 단 둘 뿐인 이 좁은 공간에서 카가미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아오미네가 단박에 얼굴을 찌푸리며 카가미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너 방금 뭐라 그랬냐? 제대로 대답 안하면 주먹이라도 날릴 것 같은 기세로 물어오는 아오미네를 빤히 바라보던 카가미가 이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아니, 아무것도. 카가미의 대답에도 아오미네는 어깨를 흔들어대며 솔직하게 말하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결국 카가미가 아오미네의 손을 쳐내며 속마음을 털어놨다.


 “진짜 말해도 되냐?”

 “뭘 부끄러워하냐? 그냥 반했다고 해.”

 “야,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고. 솔직히 말하라니까 하는건데…… 너 노래… 진짜 못한다. 이런 노래 부르려면 연습 좀 더 해야겠다. 그러고도 노래 신이냐?”

 “…씨발, 너 지금 나 깠냐?”


 안하던 짓을 하려니 자꾸 몸에 열이 올라서 귀까지 새빨개진 것을 겨우겨우 감추면서 열창을 했거늘, 돌아오는 반응이 고작 저런거라 아오미네의 눈이 매서워졌다. 이번에는 쪽팔려서가 아니라 분통이 터져서 온 몸이 뜨끈해져왔다. 그런 아오미네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카가미가 흐흐 웃음까지 흘려가며 말을 이었다.


 “으흐흐. 야, 다시 생각해도 웃긴다. 그 노래는 또 어디서 배웠냐?”

 “……너 이 노래 몰라?”

 “처음 듣는데?”


 두 눈을 깜빡이며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얼굴로 저를 보는 카가미를 보며 아오미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이 멍청이한테 뭘 바란게 잘못이지. 머리가 지끈거리는게 골이 아파올 지경이었다. 아오미네가 이마를 짚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서, 들은 감상이 어떤데?”

 “응? 아까 말했잖아.”

 “아까 뭐.”

 “너 노래… 못한다고.”

 “아 씹…….”


 자기도 모르게 옆에 있던 테이블을 발로 찬 아오미네가 분에 못 이겨 어깨를 들썩였다. 씩씩거리는 아오미네를 보고 카가미는 여전히 벙찐 얼굴이었다. 혹시 싸우는 줄 알고 누가 말리러 오면 어쩌지,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카가미를 보며 아오미네가 꽥꽥 소리를 질렀다.


 “야, 넌 뇌가 없냐? 너 진짜 병신이야? 어?”

 “나 병신 아니거든? 갑자기 왜 짜증을 내?”


 그럼 내가 지금 짜증을 안내게 생겼냐? 아직도 상황 파악 못한 카가미를 보는 아오미네의 두 눈에 깊은 고뇌가 깃들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병신이 알아처먹을 수 있는거야? 넌 농구공을 보고 꼭 농구공이라 그래야 알아 듣냐? 축구공도 아니고 야구공도 아니면 그게 농구공이지 씨발! 아오미네가 속으로 자신을 얼마나 까대는지 참새 눈물만큼도 알 리 없는 카가미는 그저 평온한 눈으로 아오미네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그 말간 시선을 받아내며 아오미네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존나 눈치도 없는 새끼!



 *



 벽에 기대어 선 아오미네가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이러고 서있는지도 벌써 20분이 다 되어 가는데 여전히 기다리는 얼굴은 보이지가 않았다. 모모이가 혹시 구라깐게 아닐까. 그럴 일은 절대 없었지만 괜히 애꿎은 모모이를 탓하며 아오미네가 발을 굴렀다. 쪽팔리게 계속 기다렸던 거 들키고 싶지 않아서 교복에 묻은 먼지들을 툭툭 털어내는 손길이 조급했다. 낯선 교복을 입고서, 쳐다볼 수 밖에 없는 험악한 인상을 한 아오미네를 보고 교문을 빠져나가던 학생들이 다들 흠칫 놀랐지만 아오미네는 오히려 그들에게 뭘 봐? 하고 매서운 시선만을 던졌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서 도망치듯이 사라지는 세이린 교복의 학생 무리를 보며 아오미네가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이 새끼는 대체 언제 나오는거야.


 그 짜증 섞인 투정을 듣기라도 했는지 마침 저만치서 걸어오는 붉은 머리가 보이자 아오미네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었다. 삐딱하니 서서 카가미를 응시하고 있자 저 쪽도 알아차렸는지 걸음을 멈추고서 멀뚱멀뚱 아오미네를 쳐다봤다. 세이린 교문 앞에서 당당하게 토오 교복을 입고 있는 아오미네를 보고 놀란 카가미가 제 옆에 있는 쿠로코를 응시했다. 쿠로코는 저도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어? 아오미네 너 왜 여깄어?”

 “그러게 말입니다. 이건 마치 오늘 세이린 농구부 연습이 없는 걸 알고 미리 와서 기다린 주제에 아닌 척 하는 사람의 태도같은데요.”

 “어이, 테츠. 쓸데 없이 자세하다, 너.”


 사실 쿠로코의 말은 무엇 하나 틀린 부분이 없었기에 아오미네는 카가미가 혹시 눈치라도 챘을까 하고 슬쩍 카가미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바보같이 해맑은 웃음을 그리고 있던 카가미는 아오미네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아, 혹시 쿠로코한테 볼 일 있냐?”


 ……그래,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입을 여는 순간 아오미네는 물론이고 옆에 서 있던 쿠로코까지 작게 탄식했다는 것을 본인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제는 귀여움을 넘어서서 오히려 짜증만을 유발하는 카가미의 멍청한 표정을 보고 있던 아오미네가 카가미의 손을 잡아 끌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카가미가 어, 으어, 하는 소리를 내며 아오미네에게 질질 끌려 갔다. 카가미의 반대편 손을 냉큼 잡아채려는 쿠로코를 보고 아오미네가 눈을 치켜 떴다. 따라오면 죽는다, 테츠. 쿠로코가 대답하기도 전에 카가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야, 어디가? 나 쿠로코랑 마지버거 먹기로 했는데.”

 “……테츠 볼 일 있으니까 버려.”

 “진짜? 조금 전엔 없다고 했는데. 쿠로코, 무슨 일 있어?”

 “…방금 생긴 것 같네요.”


 아오미네의 시선 따위 전혀 두렵지 않았으나 며칠 전부터 계속 저렇게 삽질만 하는게 불쌍해서 쿠로코는 이번만큼은 빠져주기로 했다. 자기 멋대로 스케줄을 만들어낸 아오미네를 잠시 노려본 쿠로코가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카가미의 손등을 두드렸다. 내일 봐요, 카가미군. 간단히 인사를 하고 등을 돌리는 쿠로코를 멍하니 바라보며 카가미도 어, 응 하고 겨우 대답을 꺼냈다. 점점 작아지는 쿠로코의 뒷모습을 빤히 주시하던 카가미가 고개를 돌려 여전히 삐딱하게 서있는 아오미네의 등을 툭 쳤다.


 “근데 쿠로코가 약속 있는걸 너가 어떻게 알아?”

 “몰라.”


 응? 아오미네의 대답에 카가미가 고개를 갸웃했으나 아오미네는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대화의 주제가 농구가 아니라면 카가미와 길게 얘기를 해봤자 결국 마지막에 화가 나는건 자신이었기 때문에. 아오미네는 대신 묵묵히 카가미를 잡아 끌었다. 어쩐지 아오미네에게 끌려가게 된 카가미가 이 손 좀 놓으라고 툴툴거렸으나 그럴수록 아오미네는 오히려 잡은 손에 꽉 힘을 줄 뿐이었다. 언뜻 전투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지는 아오미네의 탄탄한 등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히는 카가미의 얼굴 가득 의아함이 떠올랐다.


 마지버거에 도착하자마자 카가미는 금세 모든걸 잊고 두 눈을 반짝였다. 아오미네는 산더미같은 햄버거를 주문하러 가는 카가미를 말리는 대신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사실 별로 배가 고픈건 아니었지만 같이 있을 구실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햄버거고 뭐고, 카가미랑 하도 오다보니 이젠 물려서 보기만 해도 속이 느글거릴 지경이었다. 질리지도 않고 저 많은 양을 해치우는 카가미가 볼수록 신기했다. 잠시 뒤에 카가미가 늘 그렇듯이, 얼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햄버거 탑을 가득 쌓고서 아오미네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넌 안먹어?”

 “너나 쳐먹어.”


 그러던지, 그럼. 카가미는 별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햄버거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맛있는지 와구와구 한 개를 후딱 해치운 카가미가 이내 두 개째를 집어 들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번째 햄버거의 봉지를 벗겼다. 여전히 경이스러울 정도로 햄버거를 우물거리는 카가미를 보는 아오미네의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미친, 존나 잘 먹네… 이런 생각이야 수십번도 더 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터질 듯이 부풀어오른 양 볼을 보고서 씨발, 귀엽네…… 따위의 생각을 하는 제 자신은 좀 쪽팔렸다. 저딴 새끼의 어디가 좋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거지.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투덜투덜거리고 있는 아오미네를 물끄럼히 바라보던 카가미가 자신의 햄버거를 하나 건네주었다. 턱을 괴고 한숨을 쉬고 있던 아오미네가 눈을 치켜 뜨자 카가미가 씩 웃어보였다.


 “이거나 먹어라.”


 난 너와 달리 햄버거를 몇 십개나 쳐먹는 그런 돼지가 아니라고. 아오미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카가미가 주는 햄버거를 얌전히 받았다. 이젠 먹어도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도 않았고 그냥 씹는 느낌밖에 나지 않았으나 아오미네는 얌전히 햄버거를 까 한 입 물었다. 내 사정이야 어떻든, 눈 앞에 있는 저 놈이 저렇게 웃으면서 건네주는데 안 먹고 베기냐고. 새삼 자신이 호구같다고 생각하며 아오미네가 억지로 햄버거를 우겨넣었다. 미간을 잔뜩 좁히고서 씹고 있는 모습이 누가 봐도 절대 맛있다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카가미는 흐뭇하게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오미네, 다 먹고 1 on 1 할래?”


 눈 앞에 있던 콜라를 쪽쪽 빨던 아오미네가 카가미의 말에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만나서 얼굴 좀 보겠다고 여기까지 찾아오고, 쿠로코까지 쫒아내면서 나름대로 분위기 잡고 있는데 카가미가 꺼내는 말은 평소와 달라진 것이 조금도 없어서 힘이 쭉 빠졌다. 컵이 으스러질정도로 손에 힘을 주며 아오미네가 눈썹을 구겼다. 비록 쪽팔려서 말은 꺼내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오미네의 머릿속에 지금 이 상황은 명백히 데이트였다. 데…, 데, 데이트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도 부끄러워서 말을 더듬긴 했지만.


 이런 아오미네의 마음을 전혀 알 리 없는 카가미가 먹고 있던 햄버거를 내려놓으며 태평하게 물어왔다. 무슨 약속 있냐? 결국 아오미네가 더 참지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야이, 씨발. 넌 눈치도 없냐? 어? 너 병신이야?”

 “야, 다짜고자 욕하지마라. 그리고 나 눈치 있거든?”

 “눈치 있는 새끼가 내가 몇날 며칠을 이러고 있는데, 어? 아는 놈이 반응이 그따구야?”


 그동안 답답해서 터질 것 같았던 마음을 죄다 쏟아내려니 감정이 앞서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손까지 파닥거리며 짜증을 내는 아오미네를 보며 카가미는 그저 고개만 살짝 기울였다. 영락없이 이 새끼가 짜증은 내는데 그 이유를 나는 모르겠소 하는 얼굴이라 아오미네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잔뜩 찌푸린 얼굴이 평소보다도 더 무섭게 보였다. 낮게 욕짓거리를 내뱉던 아오미네가 카가미의 등짝을 시원하게 갈겼다. 얼결에 한 대 맞은 카가미가 등허리를 짚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왜 때려!”

 “짜증나서 그런다! 왜!”

 “왜 때려놓고 성질이야?”


 그걸 아직도 모르냐고, 넌! 치솟는 감정을 어떻게든 분출하고 싶은데 앞에 서있는 당사자는 눈만 끔뻑일 뿐 왜 화내는지 그 이유조차 모르니 타올랐던 불꽃도 파스스 꺼져버리고 말았다. 아오, 이 답답한 새끼,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냐! 순간 아오미네의 머릿 속에 모모이가 싱긋 웃으면서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연습을 빼먹는 아오미네의 옷깃을 잡아챈 모모이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외쳤었다. 오늘까지 안나가면 진짜 큰일나. 내가 며칠 전부터 계속 눈치줬는데 다이쨩은 어쩜 달라진게 없어! 조잘조잘 잔소리를 쏟아내던 모모이가 크게 한숨을 내뱉더니 허리에 두 손을 착 올렸다. 역시 다이쨩같이 머리가 나쁜 사람들에게는 직구를 날려줘야 한다니까!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아오미네가 느끼기에 카가미는 자기보다도 더한 심각한 바보였으므로 자신과 똑같이 취급하는게 껄끄럽긴 했지만 모모이의 말은 틀린게 아니었다. 머리가 나쁜 놈한테는 에둘러 말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그것도 눈치라곤 개미 눈꼽만큼도 없는 카가미 타이가에겐 더더욱. 아오미네는 괜히 분위기 잡겠다며 들떠 있던 과거의 자신을 때려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카가미를 잡아 끌었다.


 “야, 됐으니 하러 가자.”

 “뭘? 농구?”

 “그럼 너랑 뭘 하겠냐? 뭐 다른거 하고 싶어?”

 “아니! 근데 나 아직 햄버거 다 안먹었는데… 이것 좀 가지고 가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눈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빌어먹을 놈아. 아오미네가 어금니를 씹으며 나즈막이 중얼거렸으나 카가미의 귀에 닿을 린 없었다. 주섬주섬 햄버거를 가방 안으로 다 집어 넣은 카가미가 조금 전에 소리를 질렀던 것도 까맣게 잊고선 경쾌하게 발을 옮겼다. 마지버거를 빠져 나가는 카가미를 향해 아오미네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야. 대신 이번엔 내기 해.”

 “무슨 내기? 음료수?”

 “아니, 그딴거 말고.”

 “그럼 뭐?”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잠시 머뭇거리던 아오미네가 꺼낸 말에 카가미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스레 웃기까지 한 카가미가 아오미네의 어깨를 툭 쳤다. 대체 뭔데 그러냐? 그런 안 어울리는 내기까지 하고. 카가미의 말에도 아오미네는 뚱하게 답했다. 알아서 뭐하게. 어차피 이따 알게 될텐데. 야, 내가 이길거거든? 너나 준비해놔라. 아오미네의 심드렁한 말에 카가미가 펄쩍 뛰며 고개를 흔들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꼭 이기겠다고 의지를 불태우는 카가미를 흘깃 바라본 아오미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생기가 감도는 아오미네의 두 눈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평소에도 져 줄 마음이라곤 조금도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 했다. 이겨서 저 눈치도 없고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자기 감정도 모르는 바보에게 모든걸 쏟아내야 했다. 고민이라곤 하지 않는 아오미네가 다크 서클이 턱까지 내려올 정도로 며칠 내내 밤을 새며 앓아야 했고, 퐁퐁 샘솟기 시작한 감정을 없애보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해보고, 어떻게 해도 안되니까 차라리 부딪혀보자는 생각으로 무작정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한 그 모든 일의 원흉. 모른 체 하기에는 이미 가슴께에 깊숙히 박혀서 얼굴만 봐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감정.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조금이라도 닿게 하고, 쪽팔린걸 참아 가며 선물을 툭 던져주게 하는 원동력. 입 밖으로 내뱉기엔 살짝 부끄럽고, 답답하고, 간지럽지만, 달큰한 세 글자.


 그러니까, 아오미네 다이키가 카가미 타이가를 좋아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