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는 더듬거리며 임신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하던 배너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이를 갖기는커녕 가족을 꾸리는 것조차 생각해본 적 없는 스티브에게 그 말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더군다나 아이의 아버지가 그 누구도 아닌 럼로우였으니 충격은 배가 되었다. 멍하니 굳어 있는 스티브를 보곤 배너가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혹시나 싶어 여러 번 검사를 해보았지만 임신이 확실하고, 아이가 자라기엔 충분하지 못한 상태니 앞으로는 더더욱 몸 조심 해야 한다고. 곧이어 그는 가능하면 캡틴 아메리카의 일을 쉬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바로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스티브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당황했을텐데…… 알려주어 고맙네.”
“아뇨, 놀란 건 저보단….”
스티브는 배너를 향해 어정쩡한 미소를 그려보였다. 그러고는 생각난 듯이 황급히 덧붙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주게.”
“아이 아버지에게도요?”
“…그렇네.”
배너는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스티브는 다시 한 번 고마움의 표시를 하고는 그대로 귀가했다. 집으로 돌아와 스티브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이를 지운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단 배너부터가 몸에 큰 무리가 갈테니 힘들거라고 말했고, 스티브 역시 아이를 지우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스티브에게는 처음 생기는 가족이었다. 모두가 제 곁을 떠난 지금 유일하게 스티브의 가족이 되어 줄 작고 여린 생명이었다. 스티브는 납작하기만 한 제 배를 끌어안고선 몸을 웅크렸다. 이 아이만큼은 먼저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럼로우가 어떤 사람인지 그 비밀을 몰랐더라면 스티브는 막연히 기뻐했을 터였다. 어쩌면 숨기는 대신 럼로우를 곧장 찾아가 이 사실을 털어놓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럼로우가 하이드라라는 것을 알고 있는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가 기뻐할지조차 알 수 없었고, 혹 이 아이가 실험용으로 쓰일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럼로우에 대한 사실이 밝혀진다면 쉴드 쪽에서도 그와 아이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스티브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스티브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어떻게 할 것인지. 그의 삶은 언제나 선택 투성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선택지는 매번 잔인하기 짝이 없는 것 뿐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스티브는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하고 말았다. 내내 고민해보았지만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마음에 스티브는 아침부터 표정이 좋지 못했다.
“캡.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럼로우.”
“얼굴색이 영 아닌데요. 아침이라도 잘못 드셨습니까?”
“아니, 괜찮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그렇네.”
“잠이 오지 않으면 절 부르라고 했잖아요.”
그 사이 몇 년은 늙은 것처럼 퀭해진 스티브의 얼굴을 보며 럼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걱정 어린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럼로우의 얼굴이 정말 진심인 것 같아 스티브는 마음이 또 흔들리기 시작했다.
“캡은 저 없인 아무것도 못한다니까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군.”
“웬일로 인정하고 그런답니까. 정말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스티브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깊은 얼음 속에 잠기는 꿈이 무엇인지 알기에 럼로우는 한층 더 조심히 물어 왔다. 틈만 나면 스티브를 찾아들곤 하는 그 악몽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럼로우가 있을 때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럼로우가 없을 때엔 스티브는 도중에 눈을 뜨지도 못하고 꼼짝 않고 누워 나락 속으로 빠져야 했다. 럼로우는 창백하게 질려 가는 그 얼굴에 정말 까딱하면 죽는게 아닐까 싶어 놀란 적이 이미 두어 번 있었기에 그 악몽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잘 알았다.
위로라도 해주는 것처럼 제 뺨에 와닿는 손길은 투박하나 따뜻했다. 스티브는 그 손을 쳐내지 않고 거친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 럼로우의 눈이 동그래지자 스티브가 살짝 웃었다.
“위로 고맙네.”
“…뭐, 명색이 스트라이크팀 대장 아닙니까. 이것도 제가 해야 할 일이죠.”
곧 저를 부르는 호출에 스티브는 럼로우를 뒤로 해야 했지만 깊은 밤 내내 고민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마음이 편안했다. 그가 하이드라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겠지만 브룩 럼로우라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변했다고 생각했다. 스티브는 제게 닿아오는 조용하지만 따스한 눈빛과 단단하고 부드러운 손길을 되새기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로 인해 변했던 것처럼, 그 역시 저로 인해 변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스티브는 그렇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럼로우의 행동은 분명 스티브에게 막 접근했을 때와 비교해 보아도 확연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같이 저녁이라도 하죠.”
다른 임무를 보고하느라 한참은 뒤에 끝난 스티브를 굳이 기다렸다가 늦은 저녁을 권유하는 지금의 럼로우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스티브는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기쁘게 럼로우의 손을 잡아 왔다. 스티브 쪽에서 먼저 접촉해오는 것은 퍽 드문 일이라 럼로우가 과장 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정말 위로가 필요한 모양입니다, 캡.”
“하하. 그런 건 아닐세. 자네 손은 나와 달리 커서 잡기가 편해 그러네.”
“핀잔 주려고 한 말 아니니 애써 변명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좋아서 잡는다 해도 상관없어요.”
“그럼 좋아서 잡는 걸세.”
“…캡, 어째 나날이 반칙이 느는 것 같습니다.”
“이게 다 자네 덕분이지. 고맙네.”
손을 꼭 잡은 채 싱긋 웃는 스티브의 얼굴이 밝았다. 어두운 구석 없이 환하게 웃는 스티브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럼로우도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침엔 우울해보이더니 금세 기분이 또 좋아졌나보다. 럼로우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스티브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 날 저녁은 평소보다도 더 맛있었고 스티브는 소소한 대화에도 방긋방긋 잘 웃었다. 캡틴 아메리카처럼 번듯한 모습이 아니라 잔뜩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선 웃는 모습이 제법 귀여워 럼로우는 문득 그가 병아리 같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돌아가지 않고 자연스레 침실로 향하자 더 환해지는 얼굴은 더욱 그러했다. 럼로우는 말없이 스티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럼로우가 제 옆에 눕고 나서야 스티브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워 제 임신 사실을 알리는 것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이불을 턱끝까지 끌어 올린 스티브가 눈을 돌려 럼로우를 보았다. 그는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 스티브의 시선이 제게 향한 것을 느낀 럼로우가 어깨를 그러쥐었다.
“잠이 안옵니까?”
“그런 건 아니네.”
“그럼, 안아줘요?”
“…괜찮네.”
뭐, 그럼 됐네요. 럼로우가 다시 자세를 고쳐잡기 전에, 잠시 망설이던 스티브가 빠르게 럼로우의 까슬한 턱끝에 입술을 쪽하고 붙였다. 순식간에 떨어진 깜찍한 뽀뽀에 럼로우가 목을 뒤로 쭉 뺐다. 스티브는 서둘러 반대 편으로 등을 돌렸으나 홧홧하게 달아오른 귀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럼로우가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캡, 그냥 여기 봐요. 그래봤자 얼굴 붉어진거 다 보입니다.”
웃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에 스티브가 머뭇거리다 겨우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럼로우의 입술이 스티브의 벌어진 입새를 가르고 들어 왔다. 꼼짝 없이 럼로우의 품에 갇힌 채 스티브는 진득한 키스를 받아내었다. 빨아먹을 듯이 입 안을 휘저은 주제에 키스를 마친 럼로우의 얼굴은 상쾌하기 그지 없었다. 럼로우는 제 거친 뺨을 스티브의 말간 뺨 위로 비비적거렸다. 까끌한 감촉에 웃음을 흘리면서도 스티브는 그를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손을 뻗어 너른 등을 가득 끌어안았다.
제 위로 느껴지는 럼로우의 체온에 스티브는 비로소 행복이 차오르는 기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가 제게 입 맞추고, 저는 그런 등을 끌어 안고, 그 사이에 둘의 결실이 존재하는 지금이 스티브가 그토록 바라던 행복이었다. 혼자 있을 때는 꿈도 꿀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잠이 들고 일어난 아침에도 스티브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쏟아지는 햇살 사이로 저를 향해 부드러이 웃음 짓고 있는 럼로우의 얼굴에 스티브는 조금 울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으니까.
스티브가 럼로우가 어떤 사람이든, 그는 좋은 방향으로 변했고 그것을 믿어도 되겠다 생각한 바로 그 날 럼로우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그는 알 리 없었다. 그리고 제가 변한 것을 깨달은 럼로우가 그 사실에 공포를 느끼곤 멀어지려 결심했다는 것 역시도, 스티브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그 다음 날부터 럼로우는 스티브와 미묘한 거리를 두었다. 처음에는 스티브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변화에 불과했으나 날이 갈수록 그 구분은 점점 뚜렷해져갔다. 스티브가 오랜만에 럼로우를 집에 초대해도 돌아오는 답은 거절이었다.
“제가 워낙 할 일이 바빠서요. 식사는 나중에 같이 하죠, 캡.”
럼로우는 평소와 달리 매우 어색하게 답하고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갑자기 달라진 럼로우의 태도에 스티브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멍하니 서있었다. 스티브는 얼마 전까지 기분이 좋았던 것이 무색하게 불안이 끈적하게 발목을 잡아오는 것을 느꼈다. 아직 말도 하지 못했는데. 스티브는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제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스티브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럼로우는 그 뒤로 조금씩 스티브를 피했다.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뚜렷하게 럼로우는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콧잔등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던 거리는 어느새 상체가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자신을 부르라고 속삭여 놓고는 이제 더이상 밤을 함께 보내지도 않았다.
“오늘도 일이 바쁜가?”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부려먹을 거면 돈이라도 더 줘야 하는데, 완전 착취 아닙니까 이거.”
“…내가 한 번 말해보겠네.”
“워, 워. 당연히 농담입니다, 캡. 그럴 필요 없어요.”
매우 오랜만에 럼로우가 스티브의 집을 찾았을 때 스티브는 불현듯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흘려보냈던 평소와 달리 오늘만큼은 가려는 럼로우를 붙잡고 싶었다. 주저하던 스티브가 결국 럼로우를 불렀으나 돌아오는 답은 여느 때와 같은 것이었다. 좋은 밤 보내요, 캡. 스티브는 혼자가 된 집에 우두커니 서서 실소를 흘렸다. 혼자 두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스티브의 쓸쓸한 중얼거림은 럼로우에게 닿지 못했다.
처음 의도는 안 좋았을지 몰라도 분명히 변했다고 생각했다. 스티브는 제가 담겨 있던 럼로우의 눈동자가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볍게 빈정거리던 말투도 어느 순간부터는 잔뜩 누그러져 럼로우는 가끔 스티브조차 놀랄 정도로 따스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지금 럼로우가 자신을 피하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갑자기 왜? 대체 무슨 이유로? 둘 사이에 특별한 일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하이드라 쪽에서 무슨 명령이라도 내려왔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그 모든 것이 너무도 감쪽같은 거짓이었던 것일까.
조금 나아졌던 스티브의 마음은 다시 끝없는 바닥으로 추락해갔다. 움켜쥐었다고 생각했던 행복이 실체 없는 것이 되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것 때문인지 야속하게 빈 공간은 전보다도 더 뚜렷히 느껴졌고 마음은 공허해졌다. 그가 잠시 채워주었던 곳이 뻥 뚫린 구멍이 되어 스티브를 좀먹었다. 불어오는 바람은 차가웠고 스티브는 더이상 그 공간을 막을 수 없음을 느꼈다.
이런 감정이 처음은 아니었다. 스티브는 안타깝게도 제 곁을 떠나는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불행은 그림자처럼 스티브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스티브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힘들고 버거웠다. 여러 번 겪어왔던 일임에도, 제 옆을 채워주었던 누군가가 떠난다는 사실은 스티브를 또다시 갈기갈기 찢어놓기에 충분했다. 이를 버티기 위해 스티브가 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열심히 캡틴 아메리카로서 일에 전념하는 것 뿐이었다.
이리저리 구르느라 엉망이 된 헬멧을 벗었을 때, 스티브는 끓어오르는 충동을 더 참아내지 못했다. 어떻게든 그와 다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단순히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전처럼 친밀한 사이로 돌아가고 싶었다. 스티브는 오랜만에 그를 불러세웠다. 스티브는 부디 럼로우가 제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않았으면 했다.
“럼로우.”
“뭡니까, 캡.”
평소와 같은 대답에 스티브는 조금 안심이 되어 늘 하던 소소한 화제를 꺼내보았다. 대화가 잘만 풀린다면, 분위기가 예전처럼 나쁘지 않다면 조금 더 깊은 이야기까지 나눌 생각이었다. 하지만 럼로우는 적당히 대꾸할 뿐이었다. 결국 그는 스티브의 말을 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캡,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스티브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본론만을 요구하는 럼로우에게 전과 같은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스티브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닐세. 스티브는 럼로우의 눈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눈치 챘으나 이제 와서는 다 소용없었다. 그가 늘 제게 하던 밤 인사를 똑같이 건네며, 스티브는 이제 지긋지긋한 악몽이 제 숨을 조여 와도 깨워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마침내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