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 2.5D NOTICE GUEST


 럼로우는 흐르는 시간이 빠른지 느린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가끔은 하루가 통째로 사라진 것 같기도 했고, 어떨 때는 아예 멈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럼로우는 기계처럼 생활 했고 주어진 명령대로 움직였다. 영혼이 빠져 나간 빈껍데기 같았다. 럼로우가 쉴드고 하이드라고 다 벗어나 브룩 럼로우로서 시간을 갖는 것은 오직 길고 긴 밤 뿐이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 밤을 꼬박 새우며 럼로우는 이와 같은 시간을 몇 번이고 보냈을, 그리고 보내고 있을 스티브를 떠올렸다.


 그러는 사이 날은 점점 추워져만 갔다. 겨울 초입의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날선 바람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럼로우는 스티브가 했던 말을 생각했다. 그 아픈 기억 때문인지 스티브는 유독 추위에 약했다. 럼로우는 그가 조심히 속삭였던 것을 기억했다. 여느 날처럼 관계를 맺고 나서 이불을 턱끝까지 끌어 올린 스티브의 손에 깍지를 꼈을 때, 그는 햇살처럼 반짝 웃었다.


 “자네의 손은 따뜻해서 좋군.”


 어쩐지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손을 뺄까 싶었으나 저를 보고 웃는 얼굴이 좋아 럼로우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어리기만 한 미소를 보며 럼로우는 캡틴 아메리카의 딱딱하고 완벽한 이미지가 대체 어디서 나올까 따위의 생각을 했다. 그런 시덥잖은 생각의 기저엔 내심 그가 캡틴 아메리카라는 인물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도 어느 정도 섞여 있었다. 정말 그렇다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을텐데. 이내 럼로우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되는 생각이었다. 만일 스티브 로저스가 캡틴 아메리카가 아니라면, 만날 일조차 없었을 터였다.


 럼로우는 깍지 낀 손을 들어 스티브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 그 끝마다 정성스레 입술 도장을 찍었다.


 “이쪽이 더 따뜻하지 않습니까?”


 그는 화드득 달아오르는 스티브의 얼굴이 더 따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발갛게 볼을 붉힌 스티브의 옆에 럼로우가 몸을 뉘였다. 스티브는 습관처럼 럼로우의 품 안쪽을 파고들 듯 자리를 잡았다. 완벽하게 끌어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멀찍이 떨어진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였다. 럼로우는 스티브의 둥근 어깨를 제쪽으로 잡아당겼다.


 “안길거면 그냥 푹 안기십쇼. 캡이 들어갈만큼은 됩니다.”

 “…고맙네.”


 부끄러워하는 대신 스티브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럼로우의 어깨에 제 이마를 기대었다. 닿은 스티브의 체온은 뜨거웠으나 그는 이상하게도 추위에 떨고 있었다. 럼로우는 부스스 흩어진 금발을 가지런히 정리해주며 드러난 이마에 키스했다.


 “아직 겨울은 멀어요, 캡.”


 그를 겨울에 쳐박은 것이나 다름없는 주제에 럼로우는 하이드라의 가면을 숨기곤 뻔뻔하게 위로를 건넸다. 그런 말을 내뱉는 스스로가 우습고 기가 찼다. 럼로우는 다시 한 번 고맙다고 작게 중얼거리는 스티브의 머리통을 제쪽으로 꾹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럼로우는 그 날 동이 틀 때까지 조금도 자지 못했다.


 그러던 스티브였으니 지금 이 날씨에 어떻게 버티고 있을지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전과 달리 지금은 깍지 껴 손을 잡아줄 이도, 넉넉하게 안아줄 품도 없을 것이 뻔했다. 물론 다른 누군가가 스티브의 곁을 지켜줄 가능성도 있었으나 럼로우는 어째서인지 스티브가 혼자라고 확신했다. 그것이 슬픈지 기쁜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오롯이 저만을 원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오히려 최악의 불행일테니 말이다.


 가끔 럼로우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배너를 찾아가 그의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물론 진짜로 그런 짓을 했다간 커다란 초록 괴물에게 처참히 살해당할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충동이 일 때가 있었다. 배너라면 스티브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려줄 것이다.


 배너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했을 때 그는 친절하게도 제 연락처를 럼로우에게 주었으나 이미 그 종이 쪼가리는 버려진지 오래였다. 쓸데없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럼로우는 이미 몇 개월 전에 비워버린 쓰레기통을 뒤적이는 짓을 벌써 세 번이나 했다. 정말로 갖고 있다간 연락이라도 할까 두려워 바로 버리고 말았던 그 연락처가 이제와 왜 이리 간절해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스티브가 옆에 있을 때에는 그토록 떨쳐내려고 했던 그 마음이 오히려 그를 떠나고나자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그러나 스티브에게 직접 연락을 하는 일만큼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럼로우는 제가 밑도 끝도 없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럼로우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스티브의 애처로운 모습을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이미 수도 없이 되새김질해 아예 머릿속에 콱 박혀버린 얼굴이었다. 그것이 마지막 대화가 되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날이었다. 럼로우는 제 상상 속에서나마 지나간 기억 속의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으면서, 그런 주제에 럼로우는 그 속에서 달콤한 말을 던져보았다.


 “좋은 밤이라니, 그럼 같이 보내야 하는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캡이 제 옆에 누운 것만큼이나 좋은 밤은 없는데요.”


 럼로우는 당황해서 뻣뻣히 굳은 스티브의 입술에 아주 살짝 입술을 맞대고선 눈에 다 들어차지도 않을 정도로 가까워진 그에게 속삭이는 제 자신을 떠올렸다.


 “제 아래면 더더욱 좋고요.”

 “럼로… 웃!”


 크게 뜨인 눈이 당황으로 물드는 것을 기분 좋게 바라보며 럼로우는 스티브의 입술을 찾아 들었다. 벌어진 사이를 가르고 들어가 질척거릴 정도로 혀를 얽히고선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잡았다. 스티브가 움찔하자 럼로우는 입술을 떼어 내고선 상냥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당분간은 무리겠네요. 저도 당신이 쓰러지는 꼴을 보고 싶진 않거든요.”

 “쓰러진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캡. 조심해야죠.”


 럼로우는 판판한 스티브의 아랫배 위로 조심히 손바닥을 올리며 달게 웃었다.


 “우리 아인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럼로우로서는 그 다음 그림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우리 아이라니. 캡티 아메리카와 하이드라의 아이만큼 아이러니한 조합도 없었다. 쉴드고 하이드라고 이 사실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고 스티브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었다. 그는 제 아이를, 그리고 럼로우를 용서하지 못하면서도 사랑하고 마는 자기 자신을 죽도록 미워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미 벼랑 끝까지 왔으면서도 럼로우는 스티브에게 그러한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건 정말로 스티브를 그 아래로 밀어버리는 일이었다.


 가끔은 스티브의 동산처럼 부풀어 오른 배와 그 안에서 꼬물거릴 아이를 생각하기도 했다. 태어날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럼로우는 내심 스티브를 꼭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적어도 자신을 닮지는 않았으면 싶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의심하지도 않겠고, 무엇보다 스티브가 아이를 보며 제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테니까. 외모 뿐 아니라 성격까지 저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편이 좋았다. 스티브와 똑닮은 아이로 태어나서, 자신과 스티브의 아이가 아니라 오롯이 스티브의 아이면 좋을텐데. 그 편이 스티브에게도, 아이에게도 훨씬 행복한 인생일 터였다.


 럼로우는 뻔뻔하게도 그 아이를 안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 세차게 고개를 저어 그 터무니없는 바람을 저편으로 날려버렸다. 피로 물든 제 손으로는 아이를 만지지 않는 편이 나았다. 아무리 속죄해봤자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흔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럼로우는 좋은 아버지가 될 수도 없었고 좋은 가족이 될 수도 없었다.


 한심하군. 럼로우는 스티브를 더 이상 볼 수 없어 도망친 제 자신이 하루 종일 스티브 생각만 하는 꼴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쏟아지는 온갖 생각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일이라도 바쁘면 좋으련만 초반에는 여기저기 들쑤시느라 잠도 자지 못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모든 것이 잠잠했다. 럼로우의 하루는 그저 정찰하고, 지켜보고, 시간을 때우고, 보고를 올리는 일의 반복이었다.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있던 럼로우가 곧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어제나 오늘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내용은 거기서 거기였다. 이상 없음. 특별한 징후 보이지 않음. 럼로우는 딱딱하게 쓴 보고서를 전송하고 난 뒤, 지겹지도 않게 다시 스티브를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일을 쉬고 있어야 했다. 어느 정도 배가 나왔을 테고 그렇다면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휴식을 취하고 있는게 맞았다. 제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아마 스티브는 임신 사실을 숨길 터였다. 실험 대상이 될 가능성도 있고, 무엇보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할테니까. 책임도 지지 않고 도망간 사람인데. 럼로우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책임지지 않는 편이 오히려 좋을 겁니다, 캡. 아이에게 낙인을 찍을 순 없잖아요.


 솔직히 말해 후회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럼로우는 지금껏 생각이라는 것을 억누르고 살아 왔다. 제 의견, 제 사상, 제 의지 같은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인생이었다. 럼로우는 하이드라에 속한 부속품이나 다름 없었다. 불필요한 생각은 럼로우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밖에 되지 않았다. 럼로우는 그저 위에서 명령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 왔고 럼로우는 이런 삶이 무척이나 편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스티브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럼로우라고 딱히 하이드라의 사상을 옹호하거나 크게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쪽에 붙는 편이 훨씬 편하니까 그 아래에 있을 뿐이었다. 이미 몇십 년을 그렇게 살아와 그렇지 않은 삶이 오히려 어색했고, 사실 그런 삶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질 않았다.


 그러나 곁에서 스티브를 보고 있을 때면 의도치 않게 럼로우의 심연 속 잠들어 있던 본능이 하나 둘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넓은 등이 한없이 애처로워 보여 제 품으로 당겼던 것도, 자잘한 상처가 생긴 광대 위로 입을 맞추었던 것도,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뚝뚝 떨구는 그 얼굴을 쓸어주었던 것도 모두 럼로우의 진심이 행한 것이었다. 그 모든 행동엔 다른 누군가의 명령도, 그래야만 한다는 명분도 들어있지 않았다. 순전히 럼로우는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그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스티브를 꼭 끌어안고서 그를 달래주고 싶었다. 추위에 떠는 그 손을 잡고서 제 온기를 나눠주고 싶었다. 입술을 씰룩이며 웃는 밝은 미소가 조금 더 그 얼굴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망친 뒤였다. 럼로우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대신 미워했고, 위로하는 대신 망가뜨렸으며, 구해주는 대신 살해했다. 오랜 세월 동안 럼로우가 배운 것이라곤 고작 그런 것 뿐이었다. 럼로우는 제가 조금 더 일찍 스티브를 만났더라면 젊은 패기로 모든 것을 다 떨쳐 버리고 달려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실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을 가정해보는 사이 새벽은 한층 더 깊어졌다. 어슴푸레한 새벽 사이로 럼로우의 폰이 푸르게 빛났다. 쉴드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럼로우는 잠시 망설이다 폰을 집어 들었다. 답장은 간결했다. 보고서 확인 완료. 바로 귀환할 것.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임무가 드디어 끝을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돌아가야 했다. 가져갈 것도 없이 몸만 떠나면 되는 일이건만 럼로우는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쉴드로 복귀하면 스티브를 만나게 된다. 그와 떨어져 있는 무수히 많은 밤동안 그를 생각한 주제에, 막상 얼굴을 마주하려하니 깊은 불안감이 들이닥쳤다. 만약 그가 원망하는 눈으로 저를 쳐다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지금까지의 럼로우답게 태연한 얼굴로 “캡, 설마 저와 결혼이라도 생각했던 건 아니겠죠?” 정도로 대꾸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러나 럼로우는 스티브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제 목이 턱 막히고 말 것이란 점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곧이어 럼로우의 폰이 붉은 빛을 띄었다. 이번엔 하이드라 쪽에서 보내온 명령이었다. 캡틴 아메리카, 레벨 4 코드 발동. 럼로우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럼로우는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았다. 이미 다른 타겟을 상대하며 수도 없이 받아 본 메세지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럼로우의 눈앞을 깜깜하게 만든 적은 없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언제든지 타겟을 처리할 수 있도록 경계할 것’.


 럼로우는 서둘러 본부로 복귀했다. 쉴드로 돌아가는 동안 럼로우는 정처없이 흔들렸던 마음을 다시 고쳐잡았다. 그를 사무적으로 대해야 했다. 더이상은 스티브 로저스도, 그 안에 있을 아이도 생각하지 말아야 했다. 그는 캡틴 아메리카였고, 자신은 하이드라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늘 그랬듯이. 럼로우는 자신에게 되뇌이듯 중얼거렸다.


 “팀장님!”

 “어어, 오랜만이다.”

 “와… 그게 답니까? 정말 변함이 없으시네요. 정말 오랜만인데 좀 더 격하게 반응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럼 내가 부둥켜 안고 울기라도 해야 하냐?”


 마침내 럼로우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그 건물에 발을 들인 순간, 타이밍 좋게도 스트라이크 팀원이 럼로우를 발견하고선 두다다 달려 왔다. 돌아오는 내내 자신은 하이드라 소속이라는 것을 수도 없이 반복했음에도 럼로우는 그 순간 제 가슴에 어떠한 안정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우스운 일이었다. 마치 이곳이 제가 진짜 있을 곳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그래도 캡틴 만나면 좀 격하게 반응해주십쇼. 팀장님 없는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무슨 고생?”

 “몸이 그렇게 됐으니 당연히 고생을 하죠. …팀장님? 제 말 듣고 있는 겁니까?”

 “……그 망할 캡틴 지금 어딨냐.”

 “네?”


 FUCK! 럼로우는 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대로 계단 쪽으로 몸을 날렸다. 무작정 계단을 오르며 럼로우는 속으로 몇 번이고 욕을 뱉었다. 럼로우가 알고 있는 온갖 욕이 방언처럼 터져나오다 저들끼리 뒤섞여 의미도 알 수 없는 이상한 탄성으로 변했다. 럼로우의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분노로 인한 것이었다.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할 겨를도 없었다. 럼로우는 무작정 닥치는 대로 건물 안을 들쑤셨다.


 몸이 그렇게 됐다니. 예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두가지였다. 그가 임신 사실을 쉴드에 공개적으로 알렸거나, 아니면 진짜로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거나. 어느 쪽이든 럼로우를 심란하게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럼로우는 그가 있을만한 곳으로 달려갔다. 자지 못해 뻑뻑해진 눈가를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며 럼로우는 스티브를 찾기 위해 열심히 눈을 굴렸다.


 그리고 평소라면 잘 가지도 않던 쉴드의 의료실 복도에서 럼로우의 발이 멈추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뛰어 왔다. 럼로우는 멍하니 서서 저 끝에 있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노란 머리칼이 럼로우의 시선을 확 끌어당겼다. 뒷모습이었으나 럼로우는 그가 스티브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캡?”


 배너의 말에 따르면 임신하기에 조건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잘못 될 가능성도 컸다. 그래도 럼로우는 막연히 스티브가 괜찮을거라 믿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정말로 심각한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든 연락을 해왔을 거라 여긴 탓도 있었다. 그래서 스티브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을 때 럼로우는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 놀라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얼굴은 분명 럼로우가 아는 그대로였다. 비록 살이 쪽 빠져 볼살이라곤 찾아 볼 수 없어졌지만 그 푸른 눈동자와 햇살 같은 분위기는 여전했다. 그 아래가 문제였다. 볼품없이 마른 어깨는 이제 럼로우가 강하게 쥐면 그대로 으스러질 정도였다. 탄탄하고 보기 좋았던 근육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그 아래의 마른 거죽이 그대로 드러났다. 앙상하기 짝이 없는 팔뚝은 어린 아이가 힘을 주어도 금방 부서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인 것이 럼로우의 모든 사고를 정지시켰다.


 “스티브….”


 럼로우는 아주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렀다. 캡틴이라는 호칭이 아니라 스티브라고 이름을 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럼로우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스티브는 가느다란 양 팔로 제 몸만한 바퀴를 열심히 굴려댔다. 익숙한 일인지 스티브는 도와주려 다가온 쉴드 요원을 향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스티브가 앉은 휠체어가 느릿느릿 움직이며 반대 쪽으로 멀어져갔다. 럼로우는 그저 망연한 얼굴로 그 모든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허리께부터 발목까지 두꺼운 담요를 덮고 있었다. 담요 아래로 언뜻 보이는 다리가 두터운 옷을 입었음에도 빼빼 마른 나뭇가지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눈썰미 좋은 럼로우는 펑퍼짐하게 스티브의 몸을 덮은 담요 아래로 동그마니 나온 배를 눈치 챘다. 스티브가 잠시 멈추곤 담요 아래로 손을 넣어 배를 쓰다듬는 것까지 본 럼로우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그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망할 쉴드에서는 먹을 것도 안준답니까?!”

 “……러, 럼로우?”

 “빌어먹을, 대체 그 꼴은 뭡니까? 네?”


 럼로우의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토끼 눈이 되어서 럼로우를 올려다 보는 스티브는 멀리서 볼 때보다 더욱 작고 가냘퍼보였다. 럼로우는 꼭 우는 것처럼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리곤 스티브의 어깨를 쥐려다, 부들부들 떨리는 제 손이 행여 그 어깨를 부수기라도 할까봐 손을 거두고 말았다.


 럼로우는 밀려 드는 온갖 감정에 머리가 어지러워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 좋을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것처럼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 왔다. 벙긋거리는 입새로 빠져나오는 것은 거친 숨 뿐이었다. 럼로우는 꼭 절망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언젠가 제가 그랬던 것처럼 눈가가 젖어드는 그의 손을 조심히 잡아 왔다. 전에도 작았던 손이 이제는 정말 럼로우의 한 손으로도 양손을 모두 쥘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마해져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네.”


 낮은 목소리에 듬뿍 담겨 있는 감정은 럼로우가 예상했던 것처럼 원망도, 질책도, 실망도 아니었다. 스티브는 럼로우를 향해 살며시 웃어 보였다. 쓰러질 듯 여린 모습을 하고선 햇빛보다도 찬란하게 웃는 그 얼굴에 럼로우는 돌아오는 내내 제가 했던 모든 생각이 다 부질 없는 짓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스티브를 와락 끌어안으며 다시 이 손을 놓게 만든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남김 없이 부셔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