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없이 럼로우가 떠나고 며칠이 지났을 때에도 스티브의 상태는 좋아지질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스티브는 점점 더 우울해졌다. 피하고 싶었던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힘겨웠다. 버키가 허무하게 아래로 추락했을 때에도, 무력하게 빙하에 갇혀 꼬박 70년이란 세월을 보냈을 때에도 스티브는 감당하기 힘든 괴로움 속에서 몸서리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스티브는 나날이 끝없는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제 몸을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 그 안에 있는 아이에게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배가 부풀어 오른 것도 아니었고 태동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기에 실감이 나지 않는 탓도 있었다. 스티브는 가끔 배가 쿡쿡 쑤셔 오는 것도 모두 제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넘겼다. 사실 스티브는 몸이건 마음이건 아플 때 미련하도록 꾹 참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알지도 못했다.
일이 터진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오늘따라 아래로 축축 처지는 몸을 이끌고 겨우 임무를 성공한 날이었다. 스티브는 다른 이들의 걱정을 모두 만류하고 집으로 향했다. 늘상 드나드는 집 안으로 발을 딛는 순간 스티브는 문득 집 안 곳곳이 서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유도 없이 오한이 일었고 집은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춥게만 느껴졌다. 스티브는 절로 몸을 웅크렸다. 이제는 홀로 보낼 밤이 힘겨워 부를 사람도 없었다.
간단히 씻기 위해 스티브는 욕실로 들어섰다. 순간 욕실 전구가 깜빡이더니 팟 소리를 내며 꺼졌다. 스티브는 짧은 한숨을 쉬며 식탁에 있던 의자를 가져 왔다. 의자에 올라가 전구를 돌리던 그 때 불현듯 아랫배가 팽팽하게 조이며 스티브의 내장을 콕콕 쑤셔왔다. 아. 스티브의 작은 탄성과 함께 고통은 불에 데인 것처럼 점점 더 화끈거리기 시작했고 이내 스티브의 손끝과 발끝까지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스티브는 머리가 핑그르르 돌고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의자 위에서 비틀거리던 스티브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나게 머리를 박고 나서도 몸을 휘감은 고통은 가시질 않았다. 스티브는 끙끙거리며 어떻게든 연락을 하기 위해 바닥을 기어갔다. 조금만 움직여도 불꼬챙이로 아랫배를 쑤시는 듯한 감각에 시야가 흐릿했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져왔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 아픔 속에서도 스티브는 둔한 머리로 전화를 집어 들었다. 스티브는 습관처럼 럼로우의 번호를 누르려다가, 그 정신으로도 제 본능을 억누르고 다른 이의 번호를 찾았다. 언젠가 저장해두었던 배너의 연락처를 꾹꾹 누르는 스티브의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스티브가 마지막 1을 누른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이 번쩍 하고는 펄쩍 튀어 올랐다.
“으윽…!”
스티브는 참을 수 없는 아픔에 이를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 새로 피가 흘러내렸다. 스티브는 발작이라도 하듯 온몸을 뒤틀며 식은땀을 흘려댔다. 비명조차 제대로 지를 수가 없어 억누른 신음만이 간헐적으로 튀어나올 뿐이었다. 한참을 경련하듯 움찔거리던 스티브는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스티브가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제 다리 사이가 무척이나 축축하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스티브의 앓는 소리를 들은 배너가 쉴드 쪽에 연락을 넣었고, 가까이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근처에 거주하던 요원이 재빠르게 일을 처리했다. 스티브는 곧 병실로 옮겨졌다. 기절해 있는 사이 모든 것을 내팽겨치고 달려온 배너가 정밀 검사를 했다. 꼬박 사흘이 지나도록 스티브는 눈도 뜨지 못했다. 배너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스티브가 얼른 눈을 뜨기를 바랐다.
하혈은 심각했지만 아주 다행히 아이에게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둘 모두 위험했던건 사실이라 스티브와 아이는 앞으로 꾸준히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나흘 째 되던 날, 스티브가 겨우 눈을 뜨자 배너는 엄한 얼굴을 하고서 다짜고짜 경고했다.
“캡. 앞으로도 저한테 연락 없이 이렇게 몸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면 디 아더 가이가 튀어나올지 몰라요.”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있어 스티브 역시 자세한 것은 몰랐지만 제 다리 사이가 싸했다는 것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피를 흘려본 스티브였으나 그것만큼은 제 아무리 캡틴 아메리카라고 하더라도 기함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스티브는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배너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은 나도 사양일세.”
스티브의 흐트러진 얼굴에 배너가 표정을 풀었다. 스티브는 기분이 이상한지 손을 꼼지락거리며 제 배 위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그 사이에 말쑥해진 것 같기도 했고 변함없이 멀쩡한 것 같기도 했다. 허나 확실한 것은 존재조차 잘 느껴지지 않는 제 아이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었다는 사실이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스티브는 정말 아이에게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사건이 뒤늦게나마 스티브가 진정으로 아이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기점일지도 몰랐다. 스티브는 자신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이 유약한 아이를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해졌다.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명백한 자신의 실수였다. 처한 상황이 어떻든, 아이를 위해서는 힘을 내야 했다. 아이마저 떠나고 나면 정말로 스티브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다.
스티브가 조심조심 제 배를 문지르는 것을 배너는 잠자코 바라보았다. 입맛이 썼다. 스티브는 괜찮은 척 하고 있었지만 배너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무리를 한 탓에 몸이 피로한 것은 문제의 축에도 끼지 못했다. 배너는 지금 스티브의 가장 큰 문제는 신체가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일지 배너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돌아가는 대신 스티브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그는 상당히 초조한 기색이었다. 난처해보이기도 했고 가끔 자책하듯 스스로를 욕하는 것 같기도 했다. 스티브는 머뭇거리는 그를 재촉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마침내 배너가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캡틴. 사과할 일이 있어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끝으로 꾸욱 누르는 배너의 목소리엔 낮은 한숨이 섞여 있었다. 우습게도 그 순간 스티브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뭔가가 잘못됐어요, 캡.” 같은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에 관한 것은 아니고… 정확히 말하면, 그 아이의 아버지에 관한 거예요.”
“……럼로우 말인가?”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말에 스티브는 어느 쪽이 더 괴로운 소식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스티브의 눈썹이 반사적으로 구겨지자 배너 역시 말을 망설였다. 실로 오랜만에 담는 그 이름에 스티브의 눈동자가 우울한 빛을 띠었다. 배너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스티브가 어쩐지 애처롭다고 느꼈다. 그는 괴로움을 참아내는 아이처럼 주먹을 꼭 쥐고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미안해요. 그러지 못했어요.”
배너는 제가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스티브가 잠들어 있는 사이 배너는 그의 기록을 낱낱이 훑어보았다. 분명히 몸을 좀 사려야한다고 말했건만 캡틴 아메리카의 임무는 늘면 늘었지 전혀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일부러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어떤 문제에서 도망쳐 일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배너는 그 마음을 아주 잘 알았기에 스티브의 속을 읽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얼마 전 럼로우가 떠났다는 것까지 읽고 나서 배너는 안경을 벗고선 탄식을 뱉었다. 원인은 명확했다.
스티브는 배너의 말을 도중에 끊지도, 그렇다고 반응 하지도 않은 채 듣고만 있었다. 살짝 숙인 탓에 흘러 내린 머리가 그의 표정을 알 수 없게 했다.
“미안해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말하지 않는 거였는데….”
무거운 죄책감에 배너의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괜히 오지랖을 부려 럼로우가 떠난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배너가 입을 다물고 나서도 스티브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스티브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다 알고 있었구나. 그제야 스티브는 럼로우가 이제껏 해왔던 행동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당연히 럼로우에게도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스티브가 받은 충격 못지 않게 럼로우 역시 충격받았을 것이 뻔했다. 스티브는 아주 가끔 럼로우의 시선이 제 배를 스치듯 지나갔던 것을 떠올렸다. 조금 더 격렬하게 임무를 마치고 난 뒤에 잔소리라도 하듯 저를 쏘아붙이던 그 시선도 모두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제가 예상했던 것처럼 아이따위 생겨서 귀찮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이 기회를 잡아서 하이드라의 승리를 위한 발판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을까. 스티브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가는 안좋은 생각에 다시금 가슴께가 저릿하고 아파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스티브는 문득 그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척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어째서?
그런 말은 결코 듣고 싶지 않았지만, 만약 아이가 생긴 것이 문제라면 럼로우는 가차 없이 그에게 와 아이를 지우라고 말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이드라를 위해 혹은 어떠한 생체 실험을 위해 아이가 필요하다면 오히려 모르는 척 할 것이 아니라 스티브를 위해주는 척 연기를 해야 했다. 사실 럼로우로서는 스티브와 조금 더 가까워지면 가까워졌지, 멀어질 이유가 하등 없었다. 그러나 럼로우는 그렇게 했다. 스티브는 그 모습이 꼭 언젠가의 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그 문제로부터 도망쳤다는 뜻이었다. 외면하고 회피한 것이다. 스티브는 이미 럼로우의 진실을 그렇게 외면한 적이 있었다. 결정을 할 수 없다는 말은 그것이 그에게 있어 무척 괴로운 것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스티브가 럼로우가 하이드라에도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도망을 쳐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했던 것처럼.
그는 스티브가 임신했다는 걸 알았지만 아는 체 하지 않았다. 하이드라에 따로 보고를 올리지도 않았다. 그가 취한 행동은 기껏 해야 조금 더 멀어진 것 뿐이었다. 그건 정말 애매한 거리였다. 스티브와 거리를 두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멀어지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건 럼로우의 망설임이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 스티브는 그렇다고 확신했다. 럼로우는 완전히 선하고 착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감정 따위 한톨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악인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망설이고 있었다. 도와주러 달려오지는 못하는 주제에 무리하는 거 아니냐며 걱정스럽게 묻기는 할 정도로.
그동안 럼로우가 보여준 태도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그는 고민했다. 스티브를 선택할 것인지, 하이드라를 선택할 것인지. 그렇다면 더이상 스티브가 망설일 것은 없었다. 쓸쓸해 하던 스티브의 곁을 럼로우가 채워주었듯 이제는 스티브가 럼로우의 고민을 해결해 줄 차례였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지 계속 말이 없는 스티브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마음 졸이던 배너에게 돌아온 것은 의외로 담담한 미소였다.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꼬리에는 설핏 상쾌함마저 담겨 있었다.
“고맙네.”
배너는 꼭 그것이 실로 오랜만에 보는 스티브의 진짜 얼굴 같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 꽉 쥐고 있던 주먹은 어느새 풀려 시트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스티브는 고개를 들어 똑바로 배너를 마주했다. 더 이상 그 얼굴엔 어떠한 그늘도 존재하지 않았다.
럼로우는 돌아올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는 일단 소속된 인물이었으니 무작정 도망칠 수는 없었다.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막바지에 접어 들면 럼로우는 다시 본부로 귀환할 것이다. 몇 달이야 걸리겠지만 평생 보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스티브는 이미 오랜 시간을 버텨왔다. 그깟 몇 달 정도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가 돌아오면 어떤 얼굴을 하고, 무슨 말을 할까. 떨어져 있는 동안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을테니 하이드라를 향한 충성심이 보다 강해질 수도 있었다. 어쩌면 럼로우는 돌아와서 태연하게 웃으며 아이를 지우라고 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달콤한 말을 속삭여놓고 몰래 아이를 빼돌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그 모든 것들을 우선 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이었다.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괜한 짓을 했다고 언성을 높일 수도 있었고, 제 말에 순순이 따라주지 않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럼에도 스티브는 이렇게 해야한다고 확신했다.
럼로우가 제게 말했듯이 이제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마주보는 일이 필요했다.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외면하고 눈을 돌리는 것은 임시 방편밖에 되지 않았다. 스티브는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 왔다. 곪아가는 상처를 치료하지도 않았고 떠나가는 이들을 아직도 마음 속에서 놓아주질 못했다. 달라진 현실에서도 스티브는 여전히 70년 전의 그곳에 존재했다. 럼로우가 하이드라라는 벼락같은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스티브는 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런 식으로 눈물을 참는 일은 결코 해답이 될 수 없었다. “그냥 울어요.” 그게 정답이었다.
결과는 스티브로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모두 무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스티브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속죄였다. 스티브는 다시 모든 것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설령 그 끝에 절벽이 도사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스티브가 선택한 길이었다. 그렇지 않은 주제에 수도없이 제게 되뇌었던 나는 괜찮다는 주문은 사실 스티브를 옭아매는 사슬이었고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족쇄였다. 스티브는 이제 그 바다에서 벗어나야 했다. ‘나는 괜찮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야 해. 왜냐하면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네만….”
“뭔가요?”
“이 사실을 쉴드에 알리고 싶네.”
예상 외의 발언이었는지 배너가 눈을 크게 떴다. 스티브는 굳게 결심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전부 말인가요?”
“그렇네. 아이의 아버지가…… 럼로우라는 것도.”
붙여진 말에 배너가 멈칫했다. 그건 스티브가 스스로 말하지 말아달라 부탁했던 것이었다. 물론 제가 지키지 못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커지긴 했지만. 스티브는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네.”
결의가 단단한 스티브를 보고도 고개를 저을 수 있을리 없었다. 결국 배너는 알았다며 자리를 일어나고 말았다. 또 그는 어떤 선택을 했든, 앞으로는 몸을 더 조심해야 하니 무리는 절대 삼가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눈을 뜨기는 했지만 몸은 아직 완벽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라 스티브는 며칠 더 입원해 있어야 했다. 스티브는 그날 밤 병실에 멍하니 누워선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스티브는 돌연 럼로우도 이렇게 밤을 보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악몽을 꾼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럼로우는 꼭 스티브가 잠이 든 후에 눈을 감았더랬다. 거칠게 관계를 맺고난 후에는 다 지친 행색을 하고도 나도 자야 하니 얼른 주무시라고 잔소리를 하던 그였다. 먼저 잠이 드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그가 혼자 있을 때에는 밤을 어떻게 보내는지 역시 알 수가 없었다.
그를 생각하자 또 가슴 한켠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제게 내어준 따뜻한 품이 그리웠고 퉁명한 듯 다정하게 불러오던 목소리가 간절했다. 스티브는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 놓인 거울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동자가 선명했다.
결심을 했으니 앞으로는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러니 감성에 젖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여야 했다. 거울 속의 스티브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럼로우가 꼴이 어떤지 보라고 했던 그 때처럼 스티브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푸른 눈동자엔 슬픔이 일렁였지만 동시에 물기 하나 없이 건조했다.
“이거 참, 자네가 없으니 울지도 못하지 않나.”
스티브는 타오르듯 붉어진 눈가를 문지르며 씁쓸히 웃었다. 아무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