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 2.5D NOTICE GUEST


 오가는 사람이 있는 복도는 대화하기에 편한 장소가 아니었다. 스티브는 럼로우를 이끌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그 보폭이랄 것도 없는 느린 휠체어 속도에 럼로우가 결국 스티브를 밀어주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맞겠지만.


 아무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나서 럼로우는 다짜고짜 스티브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짙은 한숨과 함께 터져 나오는 목소리엔 꾹꾹 누르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분노가 잔뜩 섞여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꼴입니까? 그 잘난 근육은 다 어디다 버리고 왔어요? 뭐라도 잘못 맞은 겁니까?”

 “아, 그게 아닐세. 럼로우, 일단 진정하고….”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빌어먹을, 이 상황에서 침착한 당신이 이상한 거라구요!”


 부실 듯 바닥을 쿵 내리친 럼로우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스티브는 럼로우와 같이 일을 한지 제법 오래 되었지만 럼로우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에겐 언제나 능글맞은 여유로움이 함께 했기에 이렇게까지 조급해하는 것을 볼 일이 없던 탓이었다. 럼로우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후우, 깊은 숨을 내쉬었다.


 럼로우 스스로도 제가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고 있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솟구치는 분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제가 모르는 사이 이렇게 처참한 꼴이 된 것도 화가 났고, 그런 주제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화가 나는 대상은 그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자신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체 자신의 안위 따위나 생각했던 스스로에게 화가 치밀었다.


 반면 그런 럼로우를 바라보는 스티브의 광대가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입술이 자꾸 호선을 그리는 것을 막느라 끝이 씰룩였다. 럼로우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는 상태였지만 어쩐지 스티브는 그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슴께가 간질간질한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고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 못내 기분 좋았다. 정확히는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좋았다. 제가 생각했던 대로 그가 정말로 마음에서 자신을 밀어낸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물론 스티브 역시 제가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서히 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을 때엔 제 몸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일에 스티브조차도 제 배를 만지는 것이 어색했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 때부터 스티브의 몸을 꽉꽉 채우고 있던 근육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촘촘하게 엮인 몸은 근육이 사라지는 대신 꼭 그만큼의 양을 스티브의 배로 보냈다. 팔이나 다리 따위가 앙상해질수록 배는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제가 보기에도 조금 말랐나 싶어졌을 때 스티브는 배너를 찾았다. 아이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배너는 그 사이에 근육이 반 정도는 사라진 스티브를 보고 깜짝 놀라 입만 벙긋거렸다.


 “근육 다이어트라도 했어요?”

 “그럴 리가 있겠나.”

 “…당연히 그렇겠죠.”


 배너는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검사를 시행했다. 검사 결과 배너가 내린 결론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혈청이 그쪽으로 모든 힘을 쏟아 붓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티브의 몸에는 자궁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것이 가까스로 존재할 뿐이었고, 때문에 아이를 키우기에는 매우 부적합한 신체였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곳에 있는 힘까지 모두 끌어 써야 했다. 가장 좋은 것이 바로 혈청이었다. 스티브를 단단하고 완벽한 몸으로 만들어주었던 혈청은 이제 그 힘을 작고 연약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 스티브의 몸이 예전처럼 점점 말라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말라지기만 하는 거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다행히도 예전에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던 병들이 다시 스티브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다만 하루가 다르게 근육은 물론이고 살이란 살까지 쏙 빠지는 터라 스티브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가 되었다. 일은 커녕 스티브가 조금만 움직여도 다들 호들갑 떨며 좀 쉬라고 스티브를 억지로 침대에 눕히곤 했다.


 스티브는 처음에 그런 대우가 불만스러웠으나 후에는 스스로도 인정하고야 말았다. 거울을 통해 바라본 제 모습은 캡틴 아메리카가 아니었다. 캡틴은커녕 지나가는 아이에게 얻어맞아도 꼼짝하지 못할 정도로 마르고 연약한 청년이 그곳에 서 있었다. 꼭 브루클린에서 살던 그 작은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배가 동산처럼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근육이 사라지고 몸이 점차 말라가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배가 점점 더 동그랗게 커져가면서 무게 역시 상당해져갔다. 허나 스티브는 더 이상 그 무게를 감당할만한 체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끙끙거리며 상체를 움직이는 것 정도는 괜찮았지만 걸어서 이동하는 일은 힘에 부쳤다. 그 옛날에도 이렇진 않았는데. 스티브는 자신의 몸이 이렇게 무거웠나 싶어 아침마다 힘겹게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고 배가 점점 더 남산처럼 부풀자 스티브는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릴 지경이 되었다. 그는 결국 배너에게 연락을 하고야 말았다. 걸어 다닐 수 없으니 휠체어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스티브는 전화 너머로 배너가 얼마나 충격 받았는지 말도 하지 못하고 굳은 것을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배너는 한숨인지 걱정인지 모를 것을 토해내며 조심히 속삭였다.


 “캡, 정말 그것뿐이죠? 다른 문제가 있으면 지금 말해줘요.”

 “아니, 다른 것은 멀쩡하네. 그냥 몸이 너무 무거울 뿐이야.”


 스티브에게는 당장 휠체어가 주어졌다. 체형에 꼭 맞는 휠체어를 건네주며 콜슨이 얼마나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는지, 부탁한 스티브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를 정도였다. 콜슨은 다 말라서 뼈가 드러난 것과 다름 없는 스티브의 손을 꼭 잡고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정말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나서야 콜슨은 겨우 발을 뗄 수 있었다.


 휠체어가 어색하기는 했지만 스티브는 곧 익숙해졌다. 제 상체만큼 커다란 바퀴를 휙휙 굴리는 것 역시 곧 손에 익었다. 제가 지나갈 때마다 따라붙는 시선은 여전히 신경 쓰였지만 견디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잠시 생각을 마친 스티브는 럼로우를 바라보며 간결하게 답했다.


 “혈청이 내 몸을 완전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그 힘이 이제는 아이에게 돌아갔을 뿐이야.”

 “그럼 그 전에 당신은 이런 꼴이었단 말입니까?”

 “하하, 보기에 좀… 한심해보이긴 하지.”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닙니다, 캡.”


 하도 들었던 말이라 스티브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실제로 자신의 나약하고 마른 몸을 개의치 않고 평범하게 대해주었던 것은 버키 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은 스티브를 비웃거나 조롱했고 때때로 손가락질하기도 했었다. 럼로우는 스티브의 자연스러운 체념 조에 단번에 얼굴을 굳혔다.


 럼로우 역시 스티브가 혈청을 맞기 전에 어땠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서류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각종 병을 부위별로 매달고 있었고, 툭 치기만 해도 저만치 날아갈 것처럼 연약한 몸이었다고 나와 있었다. 그러나 럼로우는 그것을 문자로 읽기만 했지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제가 상대해야 할 타겟은 그 시절의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라 미국의 영웅인 캡틴 아메리카였으니 굳이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 예상보다도 훨씬 더 깡마른 스티브를 보는 것이 힘겨웠다. 이 몸으로 대체 어떻게 살아왔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어쨌거나 당신을 그런 꼴로 만든 빌어먹을 새끼가 나라는 얘기군요.”

 “아니, 딱히 그런 건….”

 “맞잖아요.”


 팔짱을 낀 채 럼로우가 삐딱하게 대답했다. 따지고 보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스티브가 답을 하지 못하자 럼로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혀를 찼다. 그 새끼를 잡으면 족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스스로 목을 매게 생겼다. 아닌 게 아니라 럼로우는 진짜로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스티브가 저렇게 될 동안 저는 그저 먼 곳에서 추억을 미화시키는 일 따위나 하고 있었으니까.


 아이를 고려하지 못한 것은 둘 모두 마찬가지였다. 허나 럼로우는 그 일에서 도망친 반면 스티브는 온갖 부작용을 죄 그 몸으로 다 받아내고 있었다. 럼로우는 비겁했고 또 나약했다. 지금 체격 조건으로 따지면 스티브따위 럼로우에게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 뻔했으나 그 정신만큼은 럼로우보다 훨씬 더 크고 강했다. 스티브는 럼로우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강 짐작했으나 그 점에 대해서 질책하거나 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래도 자네가 걱정해주니 기분이 좋네.”

 “나 참, 제가 언제 걱정을 했다고 그럽니까?”


 럼로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티브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깜짝 놀란 럼로우가 재빠르게 스티브의 마른 어깨를 받쳐 들었다. 고개를 든 스티브가 럼로우를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고 있지 않나.”


 장난스러운 미소에 럼로우는 기가 차서 허, 웃었다.


 “캡. 언제 이렇게 변했습니까?”

 “난 원래 이랬다네.”

 “뻔뻔하기까지 하네요.”

 “아이가 자네를 닮은 모양이야.”


 뜬금없는 말에 럼로우가 나불거리던 입을 멈추었다. 스티브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다.


 “그래서 나까지 덩달아 닮아가는 것 같네.”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아이 이야기에 럼로우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이내 그는 표정을 갈무리하곤 스티브의 상체를 휠체어의 등받이 부분에 기대게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쇼.”


 럼로우의 말에도 스티브는 마냥 웃기만 했다. 정말로 아이는 잘 있다가도 가끔 이유 없이 스티브를 괴롭혔다. 자주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 소소한 변덕에 스티브는 내심 아이가 럼로우와 닮았다고 생각했더랬다. 비단 스티브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닌지 콜슨이나 나타샤 역시 닮지 않아도 될 부분을 닮았다고 비난 아닌 비난을 했었다. 스티브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마침 밖에서 나타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티브는 어디 있어요?”

 “조금 전에 스트라이크 팀장님께서 오셔서….”

 “그 새끼가 무슨 낯짝으로 뻔뻔하게 여길 왔대요? 다 늙어 빠진 게 용케 죽지도 않았네.”


 문 너머로 들리는 나타샤의 신랄한 말에 럼로우가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스티브가 곤란한 듯 웃으며 그런 럼로우의 손등을 잡아 왔다. 제 위에 올려진 작달만한 손에 럼로우는 순간 솟았던 짜증마저도 소리 없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어쨌거나 스티브 좀 보면 알려줘요. 어디서 구르고 있는 게 아닌지 심히 걱정되니까.”


 스티브는 민망한 듯 볼을 긁적였다.


 “나타샤는 나를 너무 어린아이 취급 하는 것 같군.”

 “그야 지금 그 모습을 보면 그럴 만도 하죠. 그나저나 캡, 전 저 여자랑 척을 질만한 짓을 하진 않았는데요. 설마 다 불기라도 한 겁니까?”


 설마 했는데 스티브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자신이 스티브를 찾느라 쉴드 내부를 뛰어다닐 때 와 닿는 시선들이 유독 따갑다고 생각한 차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럼로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워가 아니라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쉴드에 공개적으로 알리고 나서 벌어질 일이 문제였다. 말문이 막힌 럼로우의 손을 양손으로 꼭 잡아 오며 스티브가 설명했다.


 “아이가 있는 것은 진작 알렸지만 자네가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밝힌 지는 얼마 안 되었네. 반대가 조금 있어서….”

 “어쩌자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겁니까, 캡.”


 책임도 지지 않고 떠난 못난 저와 엮이는 그림이 결코 좋을 리 없었다. 또 쉴드에 숨어 든 하이드라가 저뿐인 것은 아니라 하이드라에도 그 소식이 알려졌을 것이 뻔했다. 럼로우의 구겨진 얼굴에도 스티브는 단호히 말했다.


 “럼로우. 나는 이것이 속죄하는 길이라 생각하네.”

 “…무슨 말입니까.”

 “모든 것을 회피하지 않고 껴안고 가야 한다는 말이네.”


 럼로우는 스티브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모르는 척 하고 다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럼로우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서 스티브는 쓰게 웃어 보였다.


 “자네가 한 곳에만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네.”

 “……캡!”


 갑작스러운 말에 럼로우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쩌면 혹시 라고 생각은 해봤지만 정말 그런 줄은 몰랐다. 애당초 제가 하이드라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스티브가 그것을 가만 둘 리가 없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럼로우의 멱살을 잡거나 화를 내는 대신 씁쓸히 웃을 따름이었다.


 “럼로우. 내가 자네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거나… 실망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세. 당연히 자네를 원망하기도 했었지. 하지만 그게 결론이 될 수는 없네.”

 “캡, 잠시만요.”

 “자네도 느꼈겠지만 나는 분명 변했네. 물론 훨씬 좋은 방향이었지. 자네가 있어주었기 때문일세, 럼로우. 그리고 나는 그게… 자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네.”


 스티브의 푸른 눈동자가 똑바로 럼로우를 응시했다. 그 곧고 맑은 눈을 어쩐지 럼로우는 피할 수가 없었다. 그 눈을 보고 있노라면 모든 거짓이나 위장이 사라지고 인간 브룩 럼로우만이 남는 기분이 들었다. 스티브는 럼로우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 깊은 눈동자에 어떠한 망설임과 부끄러움이 스며드는 것 역시 놓치지 않았다. 스티브는 럼로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나. 피하거나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고.”

 “캡.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건 알고 있습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도망치는 것이 정당하지는 않네.”


 물론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말이야. 스티브는 자신이 외면했던 수많은 나날을 떠올리며 씁쓸히 뱉었다. 그러나 그런 과거가 있기 때문에, 지금은 더 이상 등을 돌리고 서있을 수 없었다. 잘못된 일을 반복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고 비겁한 짓이었다.


 럼로우는 말없이 스티브를 바라보기만 했다. 끝없이 고민하고 거짓을 반복하며 보낸 밤이 무수히 많았다. 사랑스러운 저 얼굴에 행여 상처라도 날까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주제에 금방이라도 배를 갈기갈기 찢을 수 있도록 준비하던 모순의 나날이었다. 그에 관한 보고를 꼬박꼬박 하이드라에게 보내며 동시에 잠든 그의 떨리는 눈꺼풀에 입을 맞추던 날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럼로우는 무엇 하나를 선택하지 못했다. 쉴드와 하이드라에 걸쳐져 있는 이 가짜와 같은 삶처럼 럼로우는 두 군데에서 모두 발을 빼지 못한 채 망설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잠든 스티브의 품을 안아주며 듣지 못하게 사과를 속삭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한 자신과 달리 스티브는 끔찍한 현실 속에서도 발을 내딛었다. 럼로우는 한없이 위태로워 보이던 스티브 로저스가 어째서 캡틴 아메리카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제가 그를 위로해주었다 자신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럼로우는 자신이 그를 무너뜨리거나 부수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미션이었다고 생각했다.


 “젠장, 날 감회시키지 마십쇼. 난 내가 당신을 울리겠다고 했지 내가 우는 꼴을 보여주겠단 말은 안했으니까.”

 “관계란 주고받는 것이지 않나.”


 스티브의 말에 럼로우는 젖은 눈으로 웃었다.


 “전 아이가 당신을 꼭 닮은 딸이길 바랐는데, 아무래도 완전 빗나간 것 같네요.”


 어쩜 그렇게 똑 닮았답니까. 럼로우의 말에 스티브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웃을 때마다 마른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럼로우는 살이 내려 뾰족해진 어깨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캡. 내가 싫다고 그러면 어쩌려고 이럽니까.”


 우습게도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스티브는 제게 향한 럼로우의 쓸쓸한 눈동자를 보고 그럴 일은 절대 없으리란 것을 알았다.


 “싫다는데 강요할 수야 있겠나.”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비겁하게 나온다 그겁니까?”


 제가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요. 아닌 게 아니라, 이런 모습의 스티브를 보고도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 럼로우의 가슴을 강하게 조여 왔다. 스티브가 말하고 있는 ‘정면으로 부딪혀야 한다’는 것은 럼로우가 스스로 하이드라라는 사실을 쉴드에 밝혀야 한다는 말과 같았지만, 럼로우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사실을 밝히면 아이를 지우라고 강요당할지도 몰라요.”

 “그런 일은 없도록… 최선을 다해보겠네.”


 럼로우는 그것마저도 감당해야 한다는 듯 처연하게 웃는 스티브를 보자 더는 참을 수 없어졌다.


 “캡. 앞으로는 절대로 말 안할 거니 그냥 흘러 들으십쇼.”

 “말해보게.”

 “죄송합니다.”


 스티브는 떨리는 그의 목소리의 끝이 조금 젖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 럼로우가 해주었듯 손을 뻗어 럼로우를 제 품안으로 끌어안았다. 저를 다 안지도 못하는 그 빠듯한 품이 왜 그렇게 따뜻하고 안정적인지, 럼로우는  쉴 곳을 찾은 사람마냥 그를 가득 품었다.